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56화 (56/250)

56화

도쿄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연주를 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달빛에 빛나는 보석을 보는 듯.

형형색색의 빛깔을 자랑하고 있었다.

미우는 자신이 본 아름다운 모습 중 하나라며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곡을 만들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며.

도쿄의 야경을 내게 선물해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그의 선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안 씨. 가츠동이 식겠습니다.”

와타나베의 울상 섞인 말에 식탁으로 향했다.

편백나무로 된 도시락통의 뚜껑을 열자 돈가스가 얹어진 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종의 돈가스 덮밥.

가츠동의 ‘가츠’가 일본에서는 ‘이기다’라는 발음과 비슷하단다.

미우는 중요한 행사를 앞둘 때마다 가츠동을 먹는다고 덧붙였다.

내일부터 실질적인 콩쿨 일정 시작이니 그것을 응원하고 싶었다고.

예비 소집부터 잘 거쳐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냐고 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국제 콩쿨은 처음이라 들었는데.”

“기대가 됩니다.”

의외의 대답이라는 듯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익숙한 반응.

대개 콩쿨은 상을 따지 못하면 아쉬운 것이고, 무대에서 실수하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는 일일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내겐 아니었다.

수많은 사조들과 개인의 선택, 그에 대한 해석들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

자신이 생각하는 음악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곳.

이번 콩쿨은 아시아 전체에서 그러한 인재들이 오는 자리일 테지.

그러니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곡들을 즐기고, 내가 전달하고픈 악상을 내려놓으면 된다.

내 소신을 듣던 미우가 감탄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이번에 저희 주제가를 만든 친구도 콩쿨에 나가는데. 결선에서 만났으면 좋겠다 하시네요.”

친구?

아, 미우 입장에서는 렌카가 친구이니 당연한 말이려나.

그렇다 해도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선택이었다.

렌카가 지금 그 위치에서 뭐가 아쉬워서 콩쿨을 나갈까.

물론 도전은 자유라지만.

여든을 넘긴 나이가 대단하다고.

하지만, 내 말을 듣던 와타나베는 고개를 저으며 내 말을 수정해줬다.

“아뇨. 렌카 선생님의 제자가 이번 콩쿨을 나간다는 말이었습니다.”

“주제가는 렌카 감독님 몫 아니었나요?”

내 말을 듣던 와타나베는 그제야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려줬다.

이번 주제가는 렌카가 작품이 아니라는 것.

히마리라는 신예 피아니스트의 곡이 선택되었다고.

내게 전달한 주제곡도 히마리의 작품이었다고 덧붙였다.

와타나베의 말에 도리어 몸속에서 궁금증이 일었다.

어떤 사람이 만든 곡일까.

“이안 씨와 히마리. 두 사람이 콩쿨에서 만난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되기도 한걸요.”

“... 제가 일본에서 그렇게 유명한가요?”

이야기가 전해졌을 수는 있겠지.

유튜브도 크게 흥행했고, 독주회를 통해 세계 각국에 내 소식이 전달된 상태였으니까.

가장 이웃 나라인 일본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을 터.

하지만 대서특필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퍼졌다는 사실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내 의문에 와타나베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우는 휴대폰을 몇 번 건드리더니 내게 기사 하나를 보여주었다.

일본어로 적혀있어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것을 와타나베가 대신 읽어주었다.

“한국의 샛별 박이안, 독주회로 검증된 실력. 이제는 세계 무대로 도약할 것인가!”

***

아시아 월드 피아노 콩쿨.

아시아 전역의 피아노 신예들이 모이는 거대한 행사.

취재를 나온 기자진들의 모습만 봐도 그 스케일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각각의 국기, 언론사 마크를 단 사람들이 플래카드와 음악당의 전경을 찍고 있었다.

공연장 내부에 들어서자 그 열기는 더욱 뜨거웠다.

기존에 있던 참가자들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벌써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걸요?”

예비 소집에 동행한 와타나베가 소감을 덧붙였다.

동감이다.

보통 이러한 자리는 금방 시끄러워지고, 어수선해지기 마련인데.

자리에 앉은 참가자들은 벌써부터 서로를 적대하는 듯 날카로운 눈길을 쏘아대고 있었다.

아마 여타 콩쿨에서는 볼 수 없는 신기한 전통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겠지.

“자, 모든 참가자가 온 것을 확인했으니 추첨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콩쿨의 순번은 신청순이거나 이름순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아시아 월드 피아노 콩쿨은 수십의 참가자 이름이 담긴 통에서 직접 이름을 뽑아 순서를 정한다.

그리고 이번 추첨자는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모두 일본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이번 추첨을 맡게 된 마쓰모토 사토라라고 합니다.”

처음으로 뜨거운 박수가 울려 퍼졌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그가 누군지 아는 듯.

방금까지만 해도 경쟁심을 한껏 불러일으켰던 참가자들이 한뜻으로 모여 환호했다.

마쓰모토 사토라.

일본에서는 그를 피아노 황제라고 불렀다.

아시아 월드 피아노 콩쿨 우승 경력자이자 내가 목표로 둔 쇼팽 콩쿨에서 우승을 거머쥔 사내.

게다가 그는 쇼팽 콩쿨 우승과 더불어 쇼팽 콩쿨에서 주는 특별상 두 개를 한꺼번에 받은 사람이었다.

‘마르주카 연주상과 폴로네즈 연주상이었던가.’

쇼팽 콩쿨의 주관사, 쇼팽협회와 폴란드 라디오 측에서 주는 상.

등수를 떠나 각 주관사의 개인적 주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증거로 사토라는 현재 폴란드에서 거주하며 연주회와 독주회를 펼치고 있었다.

아마 그의 존재로 이번 아시아 월드 피아노 콩쿨이 쇼팽협회의 눈길을 사로잡았겠지.

추첨을 통해 나간 참가자들이 미리 제출한 경연곡을 확인하고 리스트에 이름을 새기고 내려왔다.

한참을 기다리던 내 이름이 호명된 것은 40번이 조금 넘었을 시점이었다.

“Ian Park. Korea.”

내 이름이 호명됨과 동시에 수차례 플래시가 터졌다.

이전에 터졌던 플래시보다 월등하게 많은 수로.

동시에 내가 단상으로 나가자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사토라도 나에게 큰 관심이 있다는 듯 아까와 다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본에 대서특필 된 것 이상으로 내 이름이 퍼진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하는 대신 무대 한 켠에 놓인 피아노를 바라봤다.

‘저게 내가 연주할 피아노.’

첫 국제무대나 다름없었다.

독주회에 빈 필 사람들을 비롯해 외국인 관객들도 많았지만, 한국인이 월등히 많았지.

사실상 외국에 내 연주를 직접 보여주는 것은 처음이리라.

먼 타지에 와서 긴장감에 심장이 꿈틀거릴 법도 하건만.

피아노와 관객석에 가득 찬 참가자들을 보자 가슴 한 켠이 뜨거워진다.

음악이란 언어로 내가 하고픈 이야기를 전달하겠다고.

박이안.

나는 거침없이 리스트에 사인을 하곤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자리에 돌아오자 한 묘령의 여인이 와타나베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여인은 곧장 나에게 다가오더니 악수를 청하며 인사말을 건넸다.

와타나베가 재빨리 그녀의 말을 전했다.

“이안 씨. 히마리 상이 무척 반갑다고 하네요.”

나도 손을 내밀자 그녀는 신이 난 듯 손을 흔들며 일본어를 길게 내뱉었다.

히마리는 예전부터 내 팬이라고 했다.

평소 K-pop에 관심이 많았는데 내가 편곡한 <기다려>에 푹 빠져버렸다고.

그 때문에 유튜브를 구독하고 곡을 듣는데 매번 새로운 해석에 놀라웠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마치 나를 연예인 본 듯한 모습으로 바라봤다.

아이 같은 맑은 표정.

일본어를 모르는 나였지만, 그녀의 말투에선 상냥함이 가득 묻어났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아직 어리둥절했다.

‘이 사람이 히마리?’

이시이 히마리라고 했던가.

이번 카타리네 애니메이션 주제곡을 만든 일본의 신예 피아니스트.

내가 만든 OST들의 모태가 바로 그녀가 만든 주제곡이었다.

높은 완성도와 능숙한 화음 활용에 처음엔 렌카가 만들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거장의 모습 너머.

히마리의 첫인상은 내가 생각하던 이미지와 너무나도 달랐다.

적어도 30대.

노련함이 가득 묻어나는 모습을 상상했건만.

히마리는 내 가슴팍 정도 되는 키에 여리여리한 체형, 아이 같으면서도 청초함이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제곡과 완전 반대되는 모습이네.’

주제곡은 무척 강렬하고 몰아치는 느낌이었다.

마치 자연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사람을 집어삼킬 듯.

연하게 흐르는 장조의 선율은 낮 동안에는 아름다운 숲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둠이 드리우고 달이 뜨면.

단조의 선율이 펼쳐지면서 곡은 순식간에 공포감을 자극시켰다.

워낙 암울한 선율이 돋보이는 선율에 고스족을 떠올릴 정도였는데…

‘엄청 밝아 보이네.’

미우가 전하길 나와 동갑이랬던가.

하지만, 히마리의 행동은 한창 궁금한 게 많을 개구쟁이 꼬마 같았다.

그 내용이 무척이나 심오하고 전문적이었을 뿐.

“<환상>은 주제곡과 완전히 반대되는 분위기였어요. 흑건(黑鍵)을 많이 사용한 저와 달리 이안 씨는 밝은 선율을 사용하셨더라고요. 상반된 선율이 마치 경쟁하듯 펼쳐지는 것 같았죠. 덕분에 곡이 더욱 살아나는 기분이었어요.”

내가 주제곡을 어떻게 들었는지.

파생된 곡에서 중점을 어디에 두었는지.

음악에 관한 질문을 연발하는 그녀의 모습은 미묘하게 나와 닮아 있었다.

내가 연주를 듣고 전생의 기억으로 모든 상황을 예측한다면, 그녀는 스스로 질문과 대답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사람 같았다.

“이안 씨의 콩쿨 무대가 어떨지 무척 궁금하네요. 우리 잘해봐요!”

해맑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녀 또한 음악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는 것을.

경쟁의식으로 날카로운 눈빛을 전하고 있는 다른 참가자와 달리 그녀의 눈길에는 오묘한 기대감만 젖어있었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기대감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히마리가 표현하는 바로크 곡은 어떤 것이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

도쿄의 야경도 새벽 늦게는 점차 힘을 잃었다.

새벽녘을 넘긴 시간이 되자 야경을 빛내던 간판들이 하나둘씩 꺼져갔다.

시가지가 완전히 어둠에 젖어 들고 있는 시간이었지만, 내 연주는 멈추지 않았다.

예비 소집까지 마쳤으니 이제 불과 며칠 뒤면 콩쿨 본선이리라.

나와 비슷한 존재가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건반에 올라간 손이 이야기를 견고하게 펼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수없이 찍힌 음표들.’

스카를라티의 피아노 소나타.

연주를 하고 있자면 바흐가 정립한 평균율을 떠올리게 한다.

이전 콩쿨에서 연주했던 클라비어.

하지만, 푸가로 나뉘어 변주곡처럼 느껴졌던 것과 달리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는 그것이 합쳐진 느낌을 전한다.

빠르게 이어지는 트레몰로를 표현하기 위해 두 개의 손가락이 쏜살같이 주행한다.

그러면서도 왼손은 베이스를 이루기 위해 무겁게.

하지만, 옅은 음들이 묻히지 않게 심혈을 기울어야 한다.

잘 다듬어진 잔디밭 위에서 음표들이 뛰놀 수 있게.

빠르고 느린 선율이 안정감 있게 흘러간다.

‘전생의 기억을 더욱 담을 수 있도록.’

쏟아지는 전생의 기억 속.

이탈리아에서 스카를라티의 곡을 들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음악을 마냥 즐기는 사람들처럼.

엄숙하게 연주를 이어갔던 고전시대 연주자와 달리 전생 때 보았던 이탈리아 연주가는 마치 현대의 재즈 피아니스트를 떠올리게 했다.

기억에서 흐르는 것을 잡아내기 위해 손가락이 더욱 빠르게 움직인다.

경쾌한 느낌이 한껏 더해지도록.

한참 연주를 이어가던 내가 눈을 뜨자 이젠 어두컴컴해진 도쿄가 들어왔다.

도리어 그래서 전생 속 기억이 떠올랐다.

그 당시에 전깃불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진한 어둠에 물든 도쿄가 전생 때 방문했던 이탈리아와 같았다.

‘한 번만 더 연습을 할까.’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상태.

연습도 남들이 보면 이미 혀를 내둘렀겠지.

하지만, 묘한 흥미가 떠오르고 있었다.

히마리라면 그동안 봐왔던 피아니스트들처럼 기계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으리라.

그녀가 연주한 주제가를 들었으니 이미 어느 정도 확인이 된 사안이었다.

그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뿐.

그리고 그 답례로 내가 가지고 있는 바로크 시대의 선율을 전해주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건반에 막 손을 올리려던 찰나.

띵-동.

차임벨이 방에 울렸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구지.’

일반 투숙객이라면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일 텐데.

아니, 일반 투숙객이 아니어도 이 시간에 잠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바깥도 이미 새카맣게 물든 상태인데.

손님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나는 천천히 문을 향해 다가갔다.

만약을 대비해 빗장 사슬을 건 채 문을 열자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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