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늦은 시간에 정말 죄송합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무척이나 조심성이 묻어나는 한국어.
왁스로 머리를 깍듯하게 세운 남자가 서 있었다.
멀끔한 정장 차림인 그의 가슴팍에는 황금으로 된 성 모양 호텔 인장이 박혀 있었다.
체크인 때 봤던 얼굴이라 그가 누구인지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호텔 지배인?”
내 한국어를 알아들은 지배인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배인이나 되는 사람이 방에는 무슨 일이지.
그것도 자정을 넘겨 새벽인 시간에.
무척이나 난처한 듯한 표정에서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있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 방에 대한 용건이라면…
아.
문득 내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새벽 시간이 넘도록 연주했던 피아노.
“혹시 피아노 때문이신가요.”
지배인이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뭔가 희망을 발견했다는 듯.
다행이라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끄덕임이었다.
아마 하루 종일 연주를 한 탓에 누군가 내 연주를 들은 모양이다.
게다가 내가 있는 층은 스위트룸으로 가득한 층이니까.
거금을 들여 투숙을 했는데 피아노 소리가 자꾸 들려 컴플레인을 걸었겠지.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자제하도록 하죠.”
“아닙니다! 그 뜻으로 찾아온 게 아닙니다!”
그만 연주하겠다는 말에 지배인의 표정이 도리어 하얗게 질렸다.
소리지를 듯 경악한 표정.
입술은 할 말이 많은 듯 자꾸만 뻐끔거렸다.
하지만, 복도에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나갈까 노심초사한 모습.
자꾸만 흔들리는 동공이 그의 난처함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사과를 연발하는 지배인에게 진정하라고 다독였다.
지배인은 애써 미소를 보였지만, 여전히 난처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뭔가 할 말이 있지만 도저히 할 자신이 나지 않는 듯.
“늦은 시간에 정말 실례가 많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시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하는 내 태도에 그는 조금 감정을 누그러뜨린 듯 심호흡을 내뱉었다.
지배인은 자꾸만 이렇게 실례를 범하는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했다.
두손을 꼭 모은 채 반쯤 허리를 숙인 모습은 고양이를 앞에 둔 생쥐꼴이었다.
다 큰 어른이 어깨를 한껏 오므린 채 있는 것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안 씨의 연주가 좋다고 일부 VIP께서 연주를 직접 듣고 싶다는 요청이 들어와서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내 입에서 작은 탄식이 나왔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배인의 설명을 들으니 나는 그가 왜 그렇게 난처한 기색을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호텔리어에게 거절은 없다고 했던가.’
일본의 한 소설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호텔리어의 기본은 투숙객의 부탁을 완벽하게 들어주는 것이라고.
서비스 문화에 진심인 일본은 더더욱 그런 특색을 가지곤 했다.
그 시스템 때문에 VIP들의 연주 요청을 함부로 거절하지 못했을 테지.
하지만, 나 또한 어떻게 보면 팰리스 호텔의 VIP일 것이다.
거장 감독이 초대한 손님이니까.
지배인 또한 나에게 함부로 부탁을 하기엔 어려웠겠지.
무척 조심스러운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듯 보였다.
만약 가능성이 있다면 연주해줄 수 있겠냐는 질문을 하지, 계속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연발하진 않았을 테니까.
지배인의 사과에는 어차피 거절할 텐데 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와서 죄송하다는 마음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괜찮은 제의인데?’
피아노를 연주하고픈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미 콩쿨 준비는 완성된 지 오래.
게다가 일본 최고급, 팰리스 호텔의 VIP에게 연주를 보인다면 새로운 활로를 만들 수도 있을 터.
미우도 영화 시사회에서 내 연주를 듣고 초대하지 않았던가.
그런 상황이 다시 벌어질 수 있다면 도리어 환영이었다.
그리고 내겐 한 가지 계획이 더 있었으니까.
“좋습니다. 하도록 하죠.”
“네에?! 정말입니까?!”
지배인이 경악성을 터뜨리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아마 거절 의사를 밝혔다고 전달해도 그것에 대해 볼멘소리를 하는 VIP도 존재할 테니까.
가장 좋은 것은 내가 연주를 한다고 하는 것이겠지.
거무죽죽하던 얼굴이 금세 색깔을 되찾기 시작했다.
대신 나도 조건이 있었다.
“호텔 로비에 피아노가 한 대 있던데. 그걸로 연주를 하고 싶네요.”
“예? 그건 워낙 오래된 거라 연주가 힘드실 텐데…”
“괜찮습니다. 준비만 부탁드립니다.”
지배인은 내 제의가 상관없으면서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이드 펜스가 쳐져 있어서 근처에 갈 수 없었던 피아노를 굳이 연주한다는 게 이상한 모양.
누가 봐도 낡은 피아노를 연주하겠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겠지.
하지만 피아노 앞에 비치된 설명 문구를 바라본 순간.
전생의 기억 한 켠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생전에 연주했던 피아노.
1770 ~ 1825
***
평생 이인자로 낙인찍혔던 사람.
하지만, 전생의 기억 속 살리에리는 그 누구보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오스트리아 음악가들이 살리에리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의 지도 아래에서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 체르니 등.
지금 내로라하는 모든 음악 거장이 태어났다.
자신보다 타인을 빛나게 해주던 삶을 살았던 살리에리.
그의 피아노는 그 성격을 대변하듯 도장조차 하지 않은 채 나무 특유의 결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수백 년이나 시간이 흘렀는데.
그럼에도 잘 전달이 되어서 여기까지 왔는지 겉으로 보이는 피아노의 모습은 손색이 없었다.
마치 오래된 골동품을 보는 것처럼.
하지만, 미묘하게 기품이 느껴지는 생김새 덕에 호텔 로비 한 켠에 있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이게 여기 있을 줄이야.’
오스트리아도 만만치 않은 전쟁의 역사를 가지지 않았던가.
나치 독일의 지배를 거쳐 세계 제2차 대전까지.
수많은 세월과 풍파에도 굳건한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전생의 기억 속 분명히 존재하는 피아노.
투박하기 그지없는 피아노의 모습에 심장이 쿵쾅댄다.
마치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처럼.
“오스트리아 호텔 협회에서 기증받은 피아노입니다. 유럽계 호텔과 MOU를 체결하면서 받은 것으로 저희 측에서도 일본 유명 예술품을…”
옆에서 지배인이 피아노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
지배인은 계속해서 해당 피아노가 진품이라고 소개했지만, 그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내 머릿속에 더욱 확실한 증거가 있었으니까.
주변을 스윽 쳐다보자 VIP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비즈니스 슈트를 입은 사람부터 드레스를 입은 사람까지.
미리 정보를 알고 온 사람들이 피아노와 가장 가까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지배인과 동행한 몇몇 가드들이 피아노 주변에 놓여있던 차단봉을 치웠다.
“생각보다 소리가 괜찮은데.”
말 그대로 수백 년간 이어져 온 피아노가 아닌가.
새벽에 지배인이 우려를 표하던 것과 달리 피아노 관리는 꽤 잘되어 있었다.
정기적으로 오스트리아에서 점검을 하고 간다고.
대외 협력의 증표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지배인의 설명이 있었다.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약간씩 뒤틀린 소리를 내곤 했지만, 이만하면 기대 이상이었다.
기존의 피아노가 내는 청아한 소리는 아니었다.
다소 투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낮은 선율.
하지만, 소리를 들은 전생의 기억이 묘한 기대감을 풍겼다.
‘보존 상태가 꽤 괜찮네.’
낮으면서도 웅장한 음색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소리를 들은 몇몇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듯 피아노 주변으로 다가왔다.
일본어와 영어, 그밖에 다른 언어들이 오가자 지배인이 그들을 향해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가드들이 차단봉을 설치하고 자리를 비키자 지배인이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연주를 하면 된다고.
나 또한 지배인을 향해 자신감 어린 미소를 보이고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둥-
예스러움을 그대로 나타내듯 진하면서도 느긋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전생의 기억 속에 선명한 살리에리의 피아노라서 그럴까.
자꾸만 기억이 밀려왔다.
도련님을 따라 슈타트콘빅트에 갔던 기억들.
당연하게도 그가 오스트리아 최고 영재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음악에 두각을 보였던 도련님의 보필을 할 정도.
그러나 전생의 기억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감정을 표출했다.
‘음악을 얼마나 즐겼는지 알겠네.’
매번 전생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북받치는 감정이 몰려오곤 했다.
단순히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듯.
그게 자신에게 주어진 특혜라는 듯 기뻐했지.
살리에리를 직접 보거나 가르침을 받진 못했지만, 멀리서나마 그의 연주를 듣는 것이 전생의 낙이었다.
살리에리는 바로크에서 고전으로 넘어오는 시기의 사람.
그 탓에 살리에리가 연주하는 소리는 미묘한 선율을 자랑했다.
묵직한 바로크 시대의 음색을 표방하면서도 화려하게 펼쳐지는 고전파 시대의 선율을 나타내었으니.
그 아이러니를 지금 펼칠 수 있을까.
건반에 올라간 손이 옅게 떨렸다.
‘시작은 오리지널.’
Sonata in C major.
가장 기본이 되는 C장조의 선율이 순식간에 호텔 로비를 채운다.
경쾌하듯 펼쳐지는 음색에 웅성거림이 조금씩 잦아든다.
여러 개의 음표들이 동시에 화음을 펼치면서 빠르게 변화를 거친다.
두 개씩 동시에 떨어지는 음색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기도 하고, 그 음색의 속도가 빨라졌다가 느려지기도 한다.
마치 봄철 소풍을 나선 어린아이의 발걸음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진난만한 선율이 주를 이뤄 주행한다.
게다가 낮은음 조율은 이점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
‘본래 스카를라티는 하프시코드 연주가였으니까.’
하프시코드.
스카를라티는 이탈리아 사람이었으니 쳄발로라고 불렀겠지.
피아노보다는 오르간에 가까운 악기.
바로크 양식에서는 고전 때보다 기준음이 낮았다.
전생의 기억 속.
이탈리아에서 들었던 하프시코드 음색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 같다.
그러자 기분이 묘해진다.
‘되게 내 이야기 같네.’
고전 시기 살았던 전생의 기억을 가진 내가 현대에 와서 연주를 하는 것처럼.
바로크 시기 선율을 고전 시대의 악기로 연주한다는 아이러니.
하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선율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도리어 그 당시, 그리고 지금의 현대로 이어져 오는 발전을 그대로 드러내듯.
과거와 현재 사조와 음색들이 서로 한데 섞여 신비로운 환상을 펼쳐내고 있었다.
피아노에 자꾸만 내 모습이 겹쳤다.
‘다시 한 번 연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연주를 이어가면 갈수록 아련한 아쉬움이 서린다.
조율사에게 부탁하여 음색을 낮출 순 있겠지만, 고전 악기에서 나오는 풍채를 그대로 가져올 순 없을 테니까.
그러니 지금 많이 펼쳐놓자.
전생의 기억이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나 박이안의 기억에 겹친 시기의 음악을 담는다.
어느덧 나는 C장조에서 시작하여 콩쿨에서 펼칠 세 가지 선율을 모두 펼쳐낸다.
마치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연습했던 것처럼.
마음껏 연주를 내려놨음에도 마지막 건반을 진하게 누른 손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페달을 밟지 않았는데도 길게 이어지는 음.
하지만 결국 나는 손을 떼주었다.
연주에 갇혀있을 순 없으니까.
“Wonderful!”
누군가 쏘아 올린 감탄사를 시작으로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뒤를 돌아 사람들의 모습을 살폈다.
분명 연주를 시작하기 직전에는 열댓 명 정도의 사람이 내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세는 것이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내 연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피아노 주변뿐만이 아니었다.
3층까지 높게 트인 로비.
2층과 3층에서도 내 연주를 감상하고 있던 사람들이 난간을 따라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의 박수가 마치 거대한 물결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