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황혼의 시작이 순탄치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다.
은퇴 연주회에서부터 수많은 제의를 받은 현철이었으니까.
그를 방증하듯 연락들이 줄지어 오고 있었다.
이미 거절한 자리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달라며 연락이 오곤 했다.
-친구 좋다는 게 뭔가. 자네가 우리 학교 명예 교수로 있기만 해도 지휘과 지망생이 얼마나…-
“끊음세.”
툭.
학장은 용이한 상대였다.
친구인데다가 나이를 먹어도 개구쟁이 같은 성정이라 이렇게 해도 모레쯤 되면 다시 전화를 오리라.
조금 귀찮을 뿐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진짜 어려운 상대가 오면 골치가 아팠다.
-박 선생님. 시안 보지 않으셨습니까. 이안이와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말이죠.-
“서 회장님. 지금 이안이가 한국에 없어서…”
서천 그룹의 수장.
필무가 자꾸만 이안을 찾았다.
평생 동안 염라로 살아온 현철이었지만, 그에게도 어려운 사람이 딱 셋 있었다.
드높은 스승님, 김종수.
엄한 모습을 보이기 민망한 제수씨, 전은희.
마지막으로 서천 그룹의 수장이자 대한 오케스트라의 최대 후원자, 서필무.
필무가 대한 오케스트라에 투자한 돈을 산정한다면 억대로는 어림도 없었다.
단원들의 악기는 물론, 해외 순방을 다닐 때마다 어마어마한 투자를 했던 필무였기에.
돈에 연연하지 않는 현철이었지만, 그렇게 거금을 투자한 사람에게 함부로 할 순 없었다.
-그럼 지금은 어쩔 수 없겠군요. 다음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현철은 그 단어들이 그리 무서운 단어인지 처음 알았다.
이안의 근황을 묻는 모든 전화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단어.
은퇴를 했음에도 더 바빠진 것 같은 느낌은 단순 기분 탓이 아니었다.
‘녀석은 일본에서 뭔 일을 한 거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늘은 일본에서까지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대한 오케스트라와 자매결연을 맺은 일본 대학교 학장이 연락을 청하는가 하면, 한일 평화 기원 오케스트라 협연에서 만난 인연들도 쉴 새 없이 메일을 보내왔다.
이안의 무대를 기획하고 싶다고.
은퇴 연주회에서 보여줬던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냐며.
콩쿨 이후 이안의 일정을 아냐는 질문도 오곤 했다.
차라리 전화를 꺼놓는 게 마음 편하리라.
하지만 왜일까.
당장이라도 버튼을 눌러 휴대폰 전원을 꺼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손길이 가지 않았다.
‘싫진 않군.’
어디까지나 귀찮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수십 년간 마에스트로로 지내온 세월 동안 그런 잡념을 떨치는 데 도사가 된 지 오래.
쓸데없는 생각들을 배제하고 남은 감정은 묘한 기대감이었다.
처음 지휘 연단에 올랐던 것과는 다른 묘한 기분.
‘꽤 좋은 제안들도 있었지.’
현철은 이안에게 들어온 제안들을 차근히 떠올렸다.
종수를 통해 들어온 빈 필의 제안은 말할 것도 없었고, 각국의 내로라하는 오케스트라도 이안과 협주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내왔지.
오케스트라 음원 발매를 함께했던 유수의 음반 제작사도 이안의 활동에 주목하고 있었다.
자신이 평생을 다 바쳐 일궜던 제안들과 인맥들.
순식간에 이안에게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싫기도 하건만.
현철의 심장이 묘하게 뛰었다.
문득 그는 이안이 참전용사를 모신 자리에서 녹턴 연주를 펼쳤던 때를 떠올렸다.
“확신에 찬 표정이었지.”
마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안의 연주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연주를 펼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수철이 그랬던 것처럼, 그 아들도 똑같을 테니까.
연습은 혼자만의 싸움이다.
아무리 남들이 피드백을 할지라도 틀린 것을 바로잡는 것은 본인의 몫이기에.
현철은 그것을 너무 빨리, 많이 했기에 지쳐버린 것이었다.
스스로에게도 끝없이 채찍질을 했던 시절.
이안의 실력도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괜스레 뭉클한 생각이 드는 것에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갱년기인가.’
하지만, 그런 갑작스런 생각이 아니었다.
무언가 오랫동안 예정되어 있던 감정이 퍼져나가듯.
현철의 머릿속엔 그 어떤 때보다 굳건한 생각이 자리 잡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현철의 전화가 다시금 울렸다.
박수철.
현철은 전화를 받자마자 수철에게 통보하듯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 다녀오마.”
***
나는 물끄러미 손을 쳐다봤다.
손에서 묘하게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살리에리의 피아노.
세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엇나간 음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다.
내가 낼 수 있는 색채가 하나 더 추가됐으니까.
‘다음 곡은 가장 낮은 선율로 만들어볼까.’
미묘한 악상이 떠올랐다.
마치 하프시코드의 선율처럼, 가장 낮은음을 펼친 곡.
독주회에서 다양한 조율로 연주를 선보였지만, 이번만큼 낮은 음색은 한 적이 없었다.
만약 이 선율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자작곡을 만든다면.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짙은 암흑을 노래하는 것처럼 진하고 묵직한 음악을 만들어내면 어떨까.
어쩌면 내 음악사에 한 줄이 새겨지지 않을까.
내 음악사는 아직이었지만, 지배인의 호텔 인생에는 큰 획이 그어진 듯.
사무실로 초대한 그가 고급 홍차를 건넸다.
세상 환한 표정은 해방감마저 어려 보였다.
“갑작스런 요청에 흔쾌히 응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몇 번이고 허리를 숙였던 지배인이 다시금 감사 표시를 전했다.
이번 프로젝트로 수많은 VIP들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다고.
피아노를 기증한 오스트리아에서도 연주 영상을 보더니 가능성을 보았다고, 피아노를 활용한 컨텐츠를 개발해보자는 이야기를 했단다.
본사에서도 이번 일을 높게 사서 지배인에게 적절한 보상을 내리겠다고.
오늘 체크 아웃한 투숙객들도 신박한 이벤트를 받았다고 좋은 평을 내렸단다.
“이안 씨가 아니었다면 제가 어찌 됐을지…”
지배인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며 몸서리를 쳤다.
아무리 무리인 부탁이라도, VIP라는 거물들의 요청에 할 수 없다고 답하기엔 어려웠을 테니까.
VIP나 되는 사람들이 보복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저 다음에는 다른 호텔에 묵는 정도이겠지.
그것만으로도 호텔의 명성에는 큰 타격이리라.
게다가 요청을 거절하는 것은 호텔리어로서의 자긍심을 꺾는 것이자, 명성에 금이 가는 행위일 것이다.
누군가에겐 무례하고, 불가능한 일이라도 무언가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변치 않을 테니까.
마치 전생의 기억 속 귀족처럼.
아랫사람이 일을 성공하지 못했다는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의뢰한 일을 하지 못했다는 짜증과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갈까 걱정할 뿐.
그런 무시무시한 존재에서 구해줘서 고맙다는 듯.
나를 향한 지배인의 눈빛이 경외감을 넘어 구원자를 바라보는 듯 반짝였다.
하지만, 지배인은 내 앞에서는 겸손함을 보였다.
“이걸 어찌 제 성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배인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하여 내게 답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앞으로 얼마나 있든 편안하게 묵으라는 말과 함께 이미 납부한 숙박비도 모두 돌려드리겠다고 했다.
룸서비스는 물론 팰리스 호텔의 모든 서비스를 맘껏 이용할 수 있도록.
수영장, 사우나, 등 호텔에 없는 시스템이라도 내가 원한다면 구해주겠다고.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하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의 빚이 해결되지 않는 듯.
지배인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뭐든지 말만 하십쇼. 이안 씨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뭐든지?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지배인의 호의는 파격적이었지만, 크게 관심 가지 않았다.
도리어 그가 말한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말에 관심이 갈 뿐.
“정말 뭐든지 괜찮습니까?”
“물론입니다! 원하는 게 있으십니까? 말씀만 하십쇼!”
그는 당찬 제스처를 취하며 나를 바라봤다.
이번 일을 크게 성공시킨 탓일까.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들어주겠다는 어마어마한 자신감이 내비쳤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살리에리의 피아노. 제가 원할 때 한 번 빌려주시죠.”
***
사각사각.
미우의 작업실에서 흑연이 깎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은 수작업.
그의 손에서 모든 환경과 인물들이 피어난다.
스팀펑크 세계관에 등장할 법한 철갑 비행체를 비롯하여 환상 속에 등장하는 작고 귀여운 마수들, 수백 번 나무와 철골을 덧대어 이동하는 집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을 법한 창조물들이 그의 손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똑똑.
“들어오게.”
미우의 작업실에 조심스레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와타나베였다.
그녀의 등장에 미우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열심히 움직이던 손마저 내려놓을 정도로.
와타나베를 향한 미우의 눈길엔 기대감이 잔뜩 어려 있었다.
“호텔에서 재미난 일이 있었다고?”
“네. 총지배인이 이안 씨에게 다소 무례한 부탁을 하였는데, 흔쾌히 들어줬다고 합니다.”
상황을 전해 들은 미우의 미간이 좁아졌다.
누군가 미우의 방문을 두드리더니 드로잉쇼를 해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불청객의 방문을 피하기 위해 최고급 호텔, 팰리스를 예약했거늘.
이런 불상사가 일어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귀빈이니 잘 부탁한다고 했거늘.’
한껏 얼굴을 찌푸린 미우를 향해 와타나베가 휴대폰을 건넸다.
‘팰리스 호텔 피아니스트’라는 이름으로 수십 개의 영상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중 가장 잘 나온 영상을 틀자 미우는 직접 휴대폰을 들어 영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처음 옅은 분노로 찌그러졌던 미우의 미간이 순식간에 펴지기 시작한다.
연주가 진행될수록 미우의 입은 점점 크게 벌어졌다.
“저도 직접 듣지 못했는데, 아쉬울 지경입니다.”
와타나베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연습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이안이 별도의 연락을 주지 않으면 방문하지 않는 게 원칙.
하지만,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에 이안이 와타나베를 부를 겨를도 없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한국어에 능통한 총지배인이 있었으니.
영상을 다 본 미우는 안경을 벗어 살포시 내려놨다.
“어쩔 수 없지. 다음을 기약하는 것밖에 더 있겠나.”
초연한 모습을 보인 미우였지만, 미우도 은근히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영상에서 보였던 모습은 그 어디에 가서 들을 수 없는 선율이었으니까.
음악에 전문가까진 아니었지만, 그동안 애니메이션 곡을 수도 없이 들었던 미우였기에.
이안의 연주는 신비로움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까지 제시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팰리스 호텔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저희가 지불했던 숙박비를 모두 환불해주겠다고요.”
호오.
미우의 표정에 옅은 탄성이 떠올랐다.
‘믿음을 배로 돌려주는 청년이군.’
삽입곡을 맡겼을 때도 이러지 않았던가.
미우가 준 것은 오직 콘티와 주제곡뿐.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일절 제공하지 않았다.
계약비를 지급한 것도 아니고, 그것을 확정 짓는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안은 그때도, 이번에도 믿음에 대한 보답을 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도리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이렇다 한다면 그것은 천운이 함께하는 것이겠지.
“솔직히 걱정했습니다. 선생님의 선택을 의심한 것은 아니지만, 우려가 많았으니까요.”
와타나베가 작게 읊조렸다.
그녀 또한 처음엔 의아했었다.
사업의 기본인 계약서를 쓰지 말라는 지령을 내리는 것은 물론, 호텔 투숙비를 대신 내주고, 스위트룸에 피아노를 비치하는 것까지.
다시 한번 미우가 노망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회사에 돌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 우려는 이안의 영상이 뜸과 동시에 완벽하게 사라졌다.
“몇몇 직원은 기대할 정도더군요. 임시로 보낸 파일이 정식으로 녹음되면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와타나베의 말에 미우가 끌끌거리며 웃었다.
최근 겪었던 일 중에 가장 신난다는 듯.
기대감 어린 웃음이 만개했다.
“어쩌면 우리 애니메이션이 덕분에 더욱 흥행하지 않겠나?”
항상 낭만적이고 개구질 것 같던 미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 또한 수십 년간 애니메이션계를 살아오면서 쌓아온 노하우가 있었으니.
아무리 작품성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고리타분하면 곧바로 사장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였다.
그런 사이에 혜성같이 등장한 이안의 연주, 그리고 화제성은 그야말로 단비였다.
애니메이션이 개봉됨과 동시에 기사에는 이렇게 뜨겠지.
한국에 새로 떠오른 별이 애니메이션에 함께했다고.
그리고 그 별이 만든 음악이 애니메이션에 붙는 순간 어떤 시너지를 일으킬지.
미우의 손에 전율이 일었다.
그 어떤 때보다 자신감 있는 눈빛으로.
펜을 쥔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