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군.”
홀짝.
사토라는 도쿄의 야경을 바라보며 와인 잔을 기울였다.
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그의 눈망울에 네온사인 불빛이 담겼다.
매일을 연습에 음반 녹음 작업으로 바쁘게 지나왔던 나날.
이번 일본행은 그에게 휴가나 마찬가지였다.
“옛날 생각나기도 했고.”
과거 생각에 사토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또한 역사 깊은 아시아 월드 피아노 콩쿨에 나섰지 않았던가.
사토라가 출전했을 때도 쇼팽 콩쿨의 우승자가 추첨함에서 자신의 이름을 뽑아주지 않았던가.
우상을 만났다는 벅참.
악수를 한 손을 평생 씻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어린 시절이었다.
그랬던 자신이 이제는 반대로 연단에 올라 추첨함을 뽑았으니.
묘한 감정이 일렁였다.
이번 콩쿨에서는 어떤 인재가 발굴될까.
어떤 인재가 자신처럼 쇼팽 콩쿨에 나오게 될까.
와인 잔을 기울이던 손이 문뜩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연주가 참 대단했는데.”
사토라는 자신도 모르게 낮에 들었던 선율을 흥얼거렸다.
단 한 번 들었는데도 뇌리에 박힐 정도로 강렬한 음색.
꽤 오랫동안 피아노를 잡았던 그도 처음 듣는 신비한 선율이었다.
골동품처럼 서 있던 나무 피아노에서 펼쳐지는 낮고 웅장한 소리.
그 중심에는 콩쿨 추첨식에서 봤던 청년이 있었다.
“박이안이랬나.”
일본으로 돌아오기 전.
사토라는 음반사에서 괴담 같은 소문을 전해 들었다.
빈 필의 마에스트로가 한국인 청년에게 관심을 가졌다고.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사토라는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유명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가 해외를 돌아다니는 것은 항상 있던 일이었고, 그에 따라 그 나라의 유망주가 누구냐는 보도는 많았으니까.
주목을 끌고 싶은 기자들이 하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레오의 첫 방문.
두 번째 방한 소식에 소문은 더욱 실체를 갖춰 퍼졌다.
‘빈 필이 주목한 천재라고 했지.’
사토라가 관심을 가진 것은 그 시점이었다.
독주회에서 완성도 높은 클래식 자작곡을 발표하고, 한국의 최고 오케스트라, 대한 오케스트라 마에스트로의 은퇴 연주까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펼쳐내는 기사에 사토라도 점차 흥미를 갖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그 흥미가 단숨에 커진 것은 이안의 연주를 직접 들은 후였다.
‘스카를라티의 피아노 소나타.’
사토라가 호텔에서 식사를 마치고 2층 구름다리를 건널 즈음이었다.
듣는 순간 자연스레 곡의 정체를 알게 된 사토라가 1층 로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서 있는 사람들.
모두 연주 소리에 매료되어 이끌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연주를 이어가고 있는 청년.
낡은 피아노에서 피어나는 음률의 향연은 사토라도 듣지 못한 신비함을 갖고 있었다.
‘만약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그 피아노로 연주를 할 수 있었을까?’
와인을 잡은 사토라의 손이 옅게 떨렸다.
절로 눈을 감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던 선율.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의 연주를 들었던 그에게도 평생 들어 처음 듣는 선율이었다.
제대로 된 장비도 갖춰지지 않았는데도 여유롭게 연주를 이어가던 이안의 모습에 옅은 경악성을 터뜨렸지.
게다가 묘한 선율에 적응이 되었을 즘 떠오른 의문은 현재까지도 미지수였다.
‘어떻게 소리에 곧장 적응할 수 있었던 걸까.’
쇼팽 콩쿨 우승 이후 세계를 누볐던 그였다.
살리에리의 것처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피아노를 잡아본 적도 있었고, 수억대 호가하는 명품 피아노를 만져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피아노를 쳤을 때 느껴지는 이상한 기분.
평소와 다르게 조율된 선율을 마주치는 것은 처음 만난 사람과 악수를 하는 것만큼이나 어색한 일이었다.
마치 처음 만난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조율이 다른 피아노를 만지는 것은 적응이 필요한 일이었다.
헌데.
‘그의 연주는 막힘이 없었지.’
이미 다음 음도 어떤 음이 나타날지 뻔히 아는 사람처럼.
사토라는 자신도 몇 번이고 움찔했던 선율을 자연스럽게 잇는 이안의 모습에 경탄할 지경이었다.
마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어긋난 음이 나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짜릿함.
음악에도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이번 콩쿨에 나온댔지.’
흐음.
사토라가 옅은 소리를 냈다.
이번에 일본의 신예 피아니스트도 나온다고 했거늘.
콩쿨에서 두 사람이 어떤 선율을 만들어낼지.
또 어떤 매력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을지.
사토라는 남은 와인을 단숨에 털어넣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피아노를 앞에 둔 나를 향한 눈길이 뜨겁다.
기대와 우려.
여러 감정들이 한데 모여 조그맣게 난 창문으로 쏠렸다.
녹음실 안에 들어온 미우와 와타나베는 걱정스런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이안 씨. 미우 선생님께서 걱정이 많으십니다. 콩쿨을 앞두고 이래도 되는지요.”
콩쿨을 일주일 앞둔 사이.
평소와 같았으면 호텔에 있는 피아노에서 연습을 이어갔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호텔 방이 아닌 카타리네 스튜디오 녹음실.
내가 만든 OST를 녹음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녹음 제의를 먼저 한 것은 나였다.
미우가 한번 보라며 영상을 보냈던 것은 어젯밤 12시쯤.
내가 만든 OST가 삽입될 장면이라며 작화들이 펼쳐졌다.
아직 채색과 몇 단계가 남았지만, 미리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것이 내 연주 욕구를 자극시킬 줄은 몰랐다.
“한국에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이 있거든요.”
빙긋 웃는 내 미소에 와타나베가 잘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속담을 전해 들은 미우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웃던 미우가 작게 한 마디를 건넸다.
“그래서 지배인 부탁도 단박에 수락하신 겁니까?”
여기까지 이야기가 퍼졌구나.
와타나베는 상황을 잘 아는 듯 이야기를 이었다.
지배인이 연락을 주어 이미 낸 비용들도 환불을 받았다고.
게다가 이를 계기로 카타리네 스튜디오에서 새로 준비하고 있는 애니메이션에 내가 함께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실제로 호텔로 초청한 것이 미우였으니까.
발 빠르게 움직인 카타리네 스튜디오 홍보팀은 나는 물론 히마리까지 함께 내세워 이번 애니메이션을 홍보했다.
덕분에 신작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고.
“연주에 대한 소식만 알려졌을 뿐인데 벌써부터 관심이 뜨겁습니다. 작곡까지 하셨다는 것이 알려지면 인기는 더욱 커질 거라 확신합니다.”
벌써부터 상황을 상상하는 듯, 와타나베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미우도 이번에는 큰 기대를 하고 있다며 다시금 함께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이어가니 준비가 완료된 음악 감독이 창 너머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그럼 화이팅입니다!”
와타나베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곤 밖으로 나섰다.
미우도 잔잔한 미소를 보이며 나가자 녹음실은 순식간에 고요함으로 가득 찼다.
이상한 기분이 들 정도로 조용한 녹음실.
건반 한 번 누르는 것만으로도 소리가 가득 찬다.
오직 피아노 선율만 담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밖에 있던 미우가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연주를 시작하면 된다는 뜻.
나는 머릿속에 펼쳐진 악보를 따라 <환상>의 연주를 시작했다.
‘소리를 쌓아가듯 천천히.’
나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자 악보가 현현하는 것은 물론, <환상>을 작곡하면서 그렸던 그림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거기에 미우가 보여줬던 영상까지 떠오르며 내 연주와 함께 나란히 진행된다.
음악이 없던 미우의 영상에는 소리가 덧입혀지고, 데생에 불과했던 내 음악에는 미우의 그림들이 덧대어져 풍성해진다.
시각과 청각.
두 감각이 한곳으로 모이며 예술을 펼쳐낸다.
마치 미완성인 작품에 색을 입히듯.
연주를 이어갈수록 미우가 보여줬던 영상에 색이 입혀지듯 다채로워진다.
불모지에 불과했던 땅에서 나무가 자라 거대한 숲을 이루고, 그 숲으로 찾아오는 동물 손님들.
미우의 애니메이션 속 미지의 숲이 머릿속에서 현현한다.
씨앗에서 줄기가 나오고, 굳건해진 줄기에서 잎사귀가 뻗어 나가고, 잎사귀를 뻗은 가지에서 꽃과 열매가 맺힌다.
자연의 섭리가 점차 몸집을 키워나가듯, 내 연주도 화음이 점차 쌓여 웅장함이 더해진다.
발걸음을 나타내는 선율을 따라 소리가 끝도 없이 펼쳐지자 어느덧 미우가 그렸던 미지의 숲이 머릿속에 완벽하게 재현된다.
첫 연주를 끝내고 고개를 돌리자 눈이 휘둥그레진 직원들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중 하나였던 와타나베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곤 마이크에 입을 댔다.
-훌륭했습니다. 이안 씨. 곧바로 다음 곡으로 넘어가시죠!-
내가 창을 향해 고개를 끄덕거리곤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미우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곧장 내 손가락이 건반에서 질주한다.
빠르게 도망가는 사람의 발걸음처럼.
‘<추격>은 그 긴박함을 느끼는 것이 중요해.’
악보를 재현할수록 머릿속의 이미지가 떠오르고, 그 이미지에 맞춰 내 표현력도 변화한다.
<환상>이 연하게 그림을 그려갔다면, <추격>은 짧고 강한 필압으로 그림을 그려간다.
마치 내가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손가락이 빨라짐에 따라 내 심장 박동도 빨라진다.
그것을 대변하는 듯, 연주를 이어가는 손길에 속도가 붙는다.
이리저리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처럼.
옥타브와 검은 건반을 넘어 연주를 이어가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힘을 풀어 가련하게.
주인공의 선율은 약해지되, 빌런들의 선율은 강하게 전개된다.
마치 숨을 졸이는 것처럼 짧게 들어가는 트릴.
창밖의 사람들이 그 소리에 덩달아 어깨를 한껏 올린 채 숨을 죽인다.
그리고 마지막은 해방되는 것처럼.
강렬하게 내딛는 선율을 끝으로 여러 개의 화음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간다.
그제야 연주를 듣던 사람들이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몸을 편안히 한다.
연주를 끝내고 나온 나를 향해 와타나베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보다 놀라울 순 없군요. 감동입니다.”
미우는 한껏 감상에 취한 표정으로 자신의 뜻을 전했다.
녹음된 선율을 들어보는 미우는 눈을 감은 채 온전히 음악에 몰두하고 있었다.
들으면서도 무언가 그림이 떠오른다는 듯.
그의 오른손이 펜을 잡은 듯 움켜쥔 채 허공에 움직였다.
“확인해보시고 이안 씨만 괜찮다면 이대로 픽스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나도 미우의 옆에서 내 연주를 차근히 듣기 시작했다.
기존에 만들어둔 선율과 그 이야기를 가득 채운 선율.
내가 원하는 바를 모두 녹여냈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나 또한 괜찮다고.
이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문을 열고 들어온 한 직원이 와타나베에게 다가가 몇 마디를 건넸다.
직원의 말에 와타나베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안 씨. 손님이 오셨다는데요?”
***
“... 큰아버지?”
미팅룸에서 만난 사람은 정말 뜻밖의 인물이었다.
큰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잔소리를 늘어놨다.
어떻게 계약서 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냐고.
너는 음악가이지 자선사업가가 아니라며.
계속해서 잔소리를 펼치는 그였건만.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한 가지뿐이었다.
‘큰아버지가 여기 왜…’
하지만 큰아버지는 내 궁금증에 대답하는 대신 유창한 일본어로 와타나베에게 이것저것을 요청했다.
그녀는 차근히 큰아버지의 요청을 듣더니 발 빠르게 서류 뭉치를 가져왔다.
서류들을 바라보던 큰아버지가 담담하게 내뱉었다.
“계약서는 제대로 봤냐?”
계약서를 바라보는 큰아버지의 눈길이 무척이나 매서웠다.
일본어로 된 계약서임에도 다른 도움 없이 빠른 속도로 읽어가는 면모.
불꽃이 튀는 듯한 눈길에 몇몇 직원이 한껏 몸을 움츠렸다.
내용을 보던 큰아버지는 계약서의 몇몇 구간을 보곤 유창한 일본어를 내뱉었다.
“노골적으로 좋은 조건을 내거는 곳은 조심해야 해.”
한국에서도 이런 경우는 적지 않다고.
예술계 유망주를 좋은 조건으로 꼬드기곤 쓰고 버리는 말처럼 사용해 버린다고.
해외에서는 언어를 모른다는 특이점을 활용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물론 나도 그런 사례를 들었던 터라 카타리네 스튜디오와 계약하면서 동시에 공증 절차도 함께 마쳤다.
어느 회사가 신인 피아니스트에게 초호화 호텔은 물론 호텔 방에 피아노까지 갖다 줄 생각을 할까.
미우와 같은 섬세한 성격의 사람이 아닌 이상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리라.
다행히 큰아버지도 계약 대상이 카타리네 스튜디오라는 점에서 그는 한숨 놓은 듯 계약서를 읽어나갔다.
뒤늦게 사실을 전해 들은 미우도 미팅 룸에 모습을 드러냈다.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대한의 마에스트로.”
미우가 곧장 큰아버지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두 거장이 악수를 하는 손에 힘줄이 섰다.
미묘한 신경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일본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무언가 견제하는 듯 날 선 일본어를 하는 큰아버지와 눈썹을 들썩이며 잔잔한 미소를 보이는 미우.
마치 나를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큰아버지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듯 두꺼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큰아버지는 나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밖에는 고급 세단이 한 대 주차되어 있었다.
큰아버지가 준비한 차량이라고.
호텔과 스튜디오, 어디로 가든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갑작스레 펼쳐진 공세에 나는 그저 눈만 끔뻑였다.
그런 내 모습은 아랑곳하지 않던 큰아버지는 갈 곳이 있다며 기사에 말했다.
“연습실로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