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은퇴하면 무엇을 할까.
은퇴를 앞두고 수십 번도 더 고민했던 내용이었다.
여행을 다녀볼까.
어디로.
현철은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아직 은퇴를 한 초기라서 그럴까.
분명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었던 음악이 여전히 눈에 밟혔다.
훌쩍 떠날 수 있었음에도 하지 못했던 것은 그 탓이 가장 컸다.
그때 들려온 이안의 소식은 현철의 가슴 속 무언가를 크게 강타했다.
‘내가 가야 하나.’
생각만 한다고 생각했거늘.
어느새 그의 손은 캐리어를 붙잡고 있었다.
어디에도 담기 힘든 천재를 누가 감당할까.
현철의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다수의 의견 대신 자신의 뚝심을 이끌고 나아가는 청년.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기에 수많은 난관이 존재할 텐데도 이안은 그 길을 나아갔다.
그 길에서 어떻게 갈지 걱정되어서.
그리고 한 켠으로는 어떤 걸음을 걸을지 궁금해서.
현철은 자연스레 공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인터넷에는 호텔에서 펼쳤던 이안의 연주가 퍼지고 있었다.
아비인 수철 다음으로 이안의 연주를 가장 가까이, 많이 봐왔다고 자부하는 현철의 눈도 의심할 정도의 실력.
‘저 선율을 저리 자유롭게 다루는 사람이 또 있을까.’
이탈리아에서 온 살리에리가 직접 연주하는 듯.
이안의 연주는 걸림 없이 순식간에 펼쳐졌다.
단순히 잘 치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없다.
그 속에 묵직한 울림이 있어야 사람들을 울릴 수 있고,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짓게 만들 수 있다.
연주 영상 속 사람들이 그랬다.
환호성을 내는 사람부터 세상 기쁜 마음으로 박수를 치는 사람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듯 펼쳐진 선율.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현철은 놀라움에 혀를 찼다.
‘끝도 없이 성장하는군.’
줄리어드에서 수학할 때부터 수많은 천재들과 함께 생활했던 그였다.
그럼에도 이안의 성장세는 가히 비정상적이었다.
매번 볼 때마다 새로운 색깔을 장착해서 나타나고, 그 색깔을 본래 자신의 것처럼 마음껏 부린다.
마치 자신의 과거처럼.
끝없이 새로운 것을 탐닉하고 펼쳤던 서른 무렵이 떠올랐다.
자신을 자꾸만 채찍질하던 시기.
세상은 현철의 변화에 환호했지만, 현철은 그 어떤 때보다 외로웠다.
‘음악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었지.’
현철은 고독했다.
매번 완벽을 추구하여 환상적인 지휘를 펼쳤던 그였지만, 그런 현철을 아니꼽게 쳐다보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염라’라는 별명처럼 그의 성정은 무시무시했으니까.
비교적 어린 나이에 인정을 받아 오케스트라 지휘봉을 잡은 현철에게 일부 자존심 센 예술가들이 질투심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그 거짓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그는 더욱 음악에 매진했고, 사람을 믿지 않았다.
오직 음악으로 이야기하겠다는 현철의 성정은 그때 무렵 만들어진 것이다.
굳건한 호랑이도 한 마리의 동물이고 생명인 것처럼.
수차례 난자된 현철의 마음도 때론 아프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것을 꾹꾹 집어삼켰는데.
어찌 이안이 <염라>에서 그러한 감정을 일으켰는지는 지금도 미지수였다.
‘녀석이 다독이는 것 같았어.’
마치 웅장한 선율로 현철을 감싸듯.
빙긋 웃은 채 연주를 펼치는 이안의 모습은 현철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이미 흘러 지나간 세월에 대한 후회.
충분히 즐기면서 음악을 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
자신의 과거를 날것 그대로 본 것 같은 신비로움.
그것이 혼재되어 현철의 눈가에 눈물을 맺히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최근 들어 이안을 볼 때마다 가슴 한 켠이 꿈틀거렸다.
음악을 한다는 조카가 미묘하게 자신의 과거와 닮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려고 했던 젊었을 때의 현철처럼.
그 때문에 한 번이라도 더 챙겨 줄 수 있을 때 챙겨주고 싶었다.
그것을 온전히 흡수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이안의 모습에 경탄하기도 했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한 켠에서는 부정적인 생각도 떠올랐다.
‘조카를 이용해 먹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되돌릴 수 없는 후회를 번복하고자 조카를 곁에 두는 것이라고.
그것은 옳지 못한 방법이라고 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터.
하지만, 현철은 그 어떤 때보다 진심이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이 이안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앞으로 이안이 살아가면서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게 되는 초석이 된다면 상관없었다.
그것이 표현이 서툰 현철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
큰아버지가 인도한 연습실이란 곳은 음악가라면 누구든 선망할 법한 공간이었다.
무대는 단 하나.
하지만, 그 하나의 공간에 주어지는 혜택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원하는 악기를 말하면 최상품으로 대여해주는 것은 물론, 전속 조율사도 있을 정도.
녹음 시설과 촬영 시설까지 존재하여 연습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기록해둘 수 있었다.
원한다면 편집까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완벽한 맞춤형 서비스.
고객이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고, 필요한 모든 것을 최고 수준으로 준비해주는 초호화 연습실이었기에.
콩쿨을 앞둔 전문가들은 물론 일본의 예술가들이 앞다퉈 예약할 정도라고.
‘이번 콩쿨 참여자도 있네.’
예약자 확인을 하며 보게 된 리스트에는 익숙한 이름도 있었다.
예비 소집날 사토라가 말했던 이름들.
이번 콩쿨 참여자들이었다.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다.”
큰아버지가 카운터에 검은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카드를 본 종업원이 더욱 입이 찢어져라 미소를 짓는 모습에서 이곳이 범상치 않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카운터 벽 한 켠에는 이곳을 다녀간 유명 예술가들의 서명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토라를 비롯한 일본의 음악 거장들은 물론, 각국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까지.
큰아버지의 이름 석 자도 한 액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기존 대여 시간보다 일찍 왔기에.
직원은 잠깐 기다려달라는 양해와 함께 차를 한 잔씩 권했다.
몸이 떠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부드러운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찰나.
안쪽에서 연주 소리가 스며들어왔다.
나와 큰아버지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눈을 감았다.
적절한 강세가 두드러지는 연주곡.
이번 콩쿨의 경연곡, 스카를라티의 피아노 소나타 일부였다.
“덧없이 깔끔한 연주군.”
큰아버지의 언급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음원에서 흘러나오듯.
트레몰로의 선율이 소름 돋게 일치했다.
사람이라면 손가락에 들어가는 힘의 차이가 조금씩은 날 터.
하지만 연습실에서 연주를 펼치고 있는 존재의 선율은 그 미묘한 차이마저 잡아낼 정도로 정교한 연주를 자랑했다.
연속된 스타카토와 빠르게 이어지는 멜로디를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흐릿하게 들리는 것도 이 정도인데, 직접 들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그런데 선율의 느낌이 미묘하게 익숙했다.
밝은 가운데서 웅장함을 뻗어내는 솜씨.
‘이시이 히마리.’
이윽고 시간이 다 되어 연습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정답이었다.
히마리가 해맑은 얼굴을 한 채 사토라와 함께 복도로 걸어 나왔다.
일본어로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마치 사제지간처럼 보였다.
정확한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히마리가 질문하는 억양과 표정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듯한 모습이었다.
‘렌카와 사토라가 아는 사이였나.’
렌카 또한 일본의 피아니스트계를 주름잡은 사람이니 사토라와 연결점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테지.
그렇다면 렌카의 제자인 히마리와 둘이서 연습실에서 나온 것도 설명이 된다.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나를 향해 히마리가 밝은 표정으로 아는 체를 했다.
그녀는 곧바로 반갑다는 뜻을 전했다.
“이안 씨의 연주가 너무 기대돼요.”
호텔에서 펼쳤던 연주 영상을 봤노라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오묘한 선율은 직접 듣고 싶을 정도였다고 전했다.
자신은 바로크 시대의 연주가 익숙지 않아 걱정인데, 나라면 훨씬 우위의 연주를 펼칠 것 같다는 독려 아닌 독려를 덧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대되는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 또한 나처럼 범상치 않은 연주 실력을 가진 천재였으니까.
“아노…”
히마리는 조심스레 몇 가지를 더 물었다.
큰아버지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더니 통역하기 전에 먼저 대답을 건넸다.
큰아버지의 말에 히마리는 물론, 뒤에서 병풍처럼 지켜보던 사토라도 사뭇 놀란 기색을 보였다.
내가 큰아버지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한 얘기를 꺼내놓았다.
“혹시 하루 종일 연습하냐고 묻더구나. 내가 그렇다고 했다. 실제로 너도 그리할 예정이지 않느냐.”
끄덕끄덕.
나는 대답 대신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의에 히마리는 신기하다는 듯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연주를 이어가는 나의 손이 그 어떤 때보다 바삐 움직였다.
연습실은 그야말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콩쿨에서 연주할 피아노에 가장 근접하게 조율을 하는 것은 물론, 밖에 별도의 식사를 하러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최상의 요리를 제공했다.
식사를 하며 큰아버지는 연주했던 것에 대한 피드백과 함께 콩쿨에서 중요시 통하는 것들을 몇 가지 언급했다.
“콩쿨은 고지식하지. 특히 바로크 시대의 연주에서는 익숙지 않아서 오리지널을 재현하는 연주자에게 더욱 높은 점수가 주어진다.”
아마도 그럴 테지.
일반적으로 클래식은 고전 시기에 꽃폈다고 표현할 정도이니까.
베토벤과 슈베르트, 모차르트를 비롯한 고전파를 이끌어갔던 거장들의 연주가 콩쿨곡으로 자주 지정되는 이유였다.
형식미를 엄격하게 갖추어 그 해석 또한 엄격하기에.
콩쿨로서 평가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선이리라.
“즉흥에 가까웠던 바로크 시대의 사조를 그 조그마한 손으로 잘 만들어내더구나.”
큰아버지가 회상하듯 말했다.
나 또한 그녀의 손가락을 보고 놀랄 정도였으니까.
필수는 아니지만, 피아노를 잘 치기 위해서는 손의 크기도 많은 영향을 준다.
손의 크기에 따라서 한꺼번에 펼칠 수 있는 옥타브가 정해질 테니까.
그러나 그녀는 작은 손을 더욱 매력 있게 활용했다.
마치 어느 손가락에 힘이 얼마큼 들어가는지 이미 안다는 듯.
그녀의 트레몰로는 큰아버지도 인정할 정도의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나 큰아버지는 한 켠으로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일부 개인의 해석이 과해. 기존 곡의 해석을 흩트리는 것은 콩쿨 기준에 위배된다.”
차근히 생각을 하던 내 고개가 천천히 끄덕인다.
히마리의 연주는 무척 완성도가 높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하는 것처럼.
미우의 애니메이션 주제곡은 물론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도 마치 제 이야기처럼 간드러지게 표현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주제곡은 본인이 쓴 것이지만, 소나타는 엄연히 원작자가 존재한다.
그 원작자가 펼쳐낸 노선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 기본이겠지.
“네 점수는 그 재현율을 얼마나 끌어올리냐에 달라질 게다.”
큰아버지가 엄숙한 모습을 한 채 말했다.
얼핏 보면 나의 우승을 간절히 바라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경쟁을 위해 참여한 것을 알고 있는 큰아버지기에.
큰아버지는 더 이상 내게 어떻게 하면 콩쿨에서 이길 수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어떻게 하면 곡에 맞춰 더 아름다운 선율을 낼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욱 바로크 스타일에 맞춰 연주를 펼칠 수 있는지.
수십 년간 마에스트로 살아오며 수많은 스타일의 음악을 접한 거장의 코멘트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이러니까 옛날 생각나네.’
순간 피식.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예전에는 큰아버지가 호령하며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이 참 무서웠는데.
지금은 그 호령마저 맞받아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연습했던 것과 바로크의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전생의 기억, 그리고 큰아버지의 조언이 시너지를 일으키며 오선지에 화음을 쌓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