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61화 (61/250)

61화

‘콩쿨에 오길 잘했네.’

남들은 경쟁에 의의를 두지 않은 콩쿨을 왜 나가냐고 하겠지.

이왕 나갔다면 뭐라도 타와야 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더 이상 내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번 히마리의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공부가 되었으니까.

‘세상에는 뛰어난 사람이 생각보다 많으니까.’

나는 오른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불과 작년만 해도 바이올린을 잡던 손.

수많은 전생의 기억을 학습하고 떠올린 덕에 지금은 그때와 비슷한 수준의 연주를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보다 더욱 우수한, 더 화려한 손길이 존재했다.

그 중 히마리는 큰아버지도 인정할 정도로 섬세한 컨트롤의 소유자였다.

그 특유의 능력으로 곡을 주무르는 것이겠지.

특히 반복적인 음을 연주하는 트레몰로에서 그녀의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스타카토와 음의 반복이 많은 스카를라티의 소나타에서는 최적의 조건이리라.

‘오랜만에 예전 생각났지.’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깨치던 전생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것을 이어받은 듯 내 머릿속에서도 깨우침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나에게 특유의 트릴법을 전수해주었을 때.

나는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속에 감성을 어떻게 넣을지 생각했다.

단순히 빠르게 하는 것이 아닌 곡이 나타내고자 하는 감성에 맞춰서.

에튀드, 겨울바람을 나타낼 때는 눈발처럼 군데군데 뭉친 선율이 이어질 수 있도록.

그렇게 바라보니 완벽해 보이던 히마리의 연주에도 빈틈이 느껴졌다.

‘모든 선율이 높은 분위기에서 연출되는 것 같았어.’

나는 어렴풋이 들렸던 히마리의 연주를 기억해냈다.

그녀의 스타카토는 통통 튀면서도 생기가 넘쳤다.

마치 꼬까신을 신은 아이가 뛰어놀듯.

아마 연주를 할 때 손가락을 세운 채 스타카토를 이어갔겠지.

그렇게 하면 타건이 더욱 밝아질 테니까.

하지만 모든 선율이 그렇다는 것은 일부 단조곡에서 흠으로 다가왔다.

묵직해야 할 음이 과하게 떠올랐던 것.

큰아버지가 말한 자신만의 해석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손가락은 히마리의 스타일을 차용하되, 해석은 내 해석을 따른다.’

한 차례 깨달음을 얻은 내 손가락이 질주한다.

장조의 선율은 보다 생기를 얻어 펼쳐진다.

마치 사뿐히 트램펄린을 타듯.

두 개 이상의 화음이 스타카토로 터지자 가벼운 선율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스타카토는 같은 음이지만, 앞선 음색보다 짙다.

손가락을 내린 채 누르는 선율은 묵직함이 더해지고 그 세기도 진해진다.

‘즉흥이라는 것이 단순히 신나는 감정에서 나오는 게 아니니까.’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는 감흥.

바로크 시대는 그것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던 시대다.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사이.

즉흥적으로 인간의 감정을 펼치면서 형식을 치중했던 시기.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펼쳐진 선율이 내 손에서 피어난다.

이번 콩쿨에서는 이 부분을 중점으로 펼쳐야겠구나.

연주의 갈무리를 마치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곧 예약 시간이 끝나가기에.

나는 천천히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육중한 방음문을 열자 뻗어 나가는 긴 복도.

그 복도 끝자락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를 보자 빙긋 미소 짓는 남자.

“굿모닝.”

마쓰모토 사토라가 아침 인사를 건넸다.

나 또한 그를 향해 자연스레 영어로 대답했다.

사토라는 무척 좋은 발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연하지.

한국대 클래식 교수 중에는 원어민 교수들도 허다했으니까.

“팰리스 호텔에서 본 연주는 내 생에 처음 듣는 선율이었습니다. 이번 콩쿨에서의 모습도 기대됩니다.”

사토라는 자신도 나와 같은 호텔에 묵고 있다고 전했다.

조식을 먹고 오는 길에 연주를 들었다고.

늦잠을 자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연주를 이어가는 여유로움.

특히 소리도 제대로 맞지 않을 오래된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하며 나를 향해 장인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였다.

“고물이 골동품으로 재탄생되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한 기분입니다.”

“사토라 씨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연주입니다.”

사토라는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자신이라면 오묘한 선율에 공포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그것을 거침없이 연주하는 내 모습이야말로 음악계의 개척자 같았다고 덧붙였다.

쇼팽 콩쿨에서 우승한 실력자였음에도.

사토라의 목소리엔 진심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처음 빈 필의 수장이 한국에 갔다고 했을 때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안 씨의 연주를 들으니 왜 두 번이나 오갔는지 알 것 같더군요.”

사토라의 입에서 내 정보들이 술술 나왔다.

관심이 생긴 순간 알아보기 시작했다고.

유튜브 채널에 올라간 연주 영상들은 물론이고, 히마리를 통해 카타리네 스튜디오 신작에도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1년 만에 이러한 성장을 이룬 것은 정말 센세이셔널 그 자체라고 감탄했다.

“그래서 더욱 자주 보고 싶습니다. 이번 콩쿨도, 다음 연주에서도 어떤 모습을 보일지 기대되거든요.”

사토라는 활짝 웃으면서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내가 손을 내밀자 두꺼우면서도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움켜쥐었다.

따스하면서도 묘한 기분.

나도 사토라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그대를 따라 위로 올라갈 것이라는 포부를 담은 눈길로.

***

특별 연습실에서 하루를 지새웠던 것이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호텔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에서 연습을 며칠 했더니 벌써 본선 날.

다시금 음악당이 붐볐다.

예비 소집 때는 평복을 입고 있던 참여자들이 저마다 빼어난 옷을 입고 앉아 있었다.

단조로운 백색 드레스부터 검은색 턱시도까지.

히마리는 옅은 분홍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 다시금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

어떤 연주를 선보일지 기대된다고.

견제가 아닌 순수한 궁금증과 호기심에 하는 질문.

나 또한 그녀를 향해 기대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때 그 사람이구나.”

옆자리에 있던 큰아버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콩쿨에서 나와 가장 비슷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

나처럼 경쟁이 아닌 소통을 위해 콩쿨에 뛰어든 사람.

그런 히마리가 어떤 연주를 펼칠지 기대된다는 마음에 심장 박동이 내심 속도를 더해간다.

‘어떤 식으로 바뀔까.’

마지막으로 들었던 히마리의 소나타는 밝음 그 자체였다.

큰아버지의 말대로 그녀의 성정이 고스란히 묻어났었지.

하지만 연습실에서 사토라의 피드백을 받았다면 분명 그가 그 부분을 지적했을 터.

내가 생각한 바가 맞다면 그 부분을 철저히 연습했을 거다.

이윽고 히마리의 차례가 오자 그녀는 생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무대로 올라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미소에 심사위원들도 옅은 미소를 내비쳤다.

우아한 자세로 인사를 건넨 히마리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작게 손을 풀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분위기는 여전히 밝았다.

Sonata in A major.

시작은 다르지 않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트레몰로와 스타카토가 통통 튀며 뻗어나간다.

장조의 특징을 살린 선율에 음색이 깔끔하게 펼쳐진다.

유려하게 움직이는 손길은 빠르고 느려지는 속도에도 금세 적응하면서 그녀만의 색깔을 드러낸다.

악상을 머릿속에 그려가며 즐기듯.

그녀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마저 피어 있었다.

마치 그 즐거움이 소나타에 고스란히 묻어나듯.

즉흥을 그대로 펼쳐진 곡에 생동감이 더해진다.

큰아버지가 평했던 깔끔한 선율.

하지만 단조곡이 시작되는 순간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기 시작했다.

“허…”

옆에 있던 큰아버지가 얕게 탄식했다.

큰아버지가 짚어두었던 히마리의 단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번 콩쿨에서 펼치는 곡은 장조 소나타 2개와 단조 소나타 2개.

방금 전 장조 소나타를 펼칠 때만 해도 생글하던 분위기는 단조로 바뀌며 빠르게 변화했다.

가히 매섭다는 표현으로도 충분치 않은 날카로운 눈빛.

마치 건반을 잡아먹을 듯이 펼쳐지는 선율에 곳곳에서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비로소 애니메이션 주제곡을 펼쳤을 때의 아우라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같은 트레몰로와 스타카토의 연속이지만, 손에 들어간 힘은 크게 바뀌었다.

가벼운 발걸음이 아닌 무거운 추가 떨어지며 충돌파를 일으키듯.

묵직하게 더해진 음색이 자욱하게 깔린다.

연한 선율에서 진한 선율로.

장조 소나타에서 보여줬던 장점을 단조 소나타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과도하게 어두워지지 않게.

자칫 퍼질 수 있는 낮은 선율의 음색을 특유의 간드러진 연주로 커버한다.

이것이 히마리가 가진 특기이자 무기.

엄숙한 그녀의 표정이 전투적으로 느껴진다.

“불과 며칠 만에 달라졌군.”

동감이다.

이 정도로 급변하는 모습은 예상외였으니까.

사뭇 튀어 나갈 수 있는 감각을 잘 통제하려는 듯.

손아귀에 들어간 힘이 과도하게 튀는 분위기를 억제하고 있었다.

그 덕에 고전으로 넘어가기 직전, 바로크 스타일의 형식미가 부각된다.

과도하게 즉흥적이었던 감성을 통제하여 히마리만의 바로크를 완성한 것이다.

자신의 장점을 부각시켜 단점을 통제하고, 그것으로 형식을 맞춰나가는 모습.

내가 콩쿨에서 보고 싶었던 모습을 히마리가 가장 잘 보여주고 있었다.

히마리가 연주를 마치며 건반에서 손을 떼자 그녀의 표정이 곧장 맑게 변했다.

자신은 보여줄 것을 다 보여줬다는 듯.

활짝 웃은 히마리의 모습은 후련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를 향한 히마리의 눈망울에는 묘한 기대감이 내비쳤다.

자신이 생각하는 소나타는 이런 것이라며.

이제 내 소나타가 어떻게 펼쳐질지 보고 싶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답례를 해야지.’

나는 히마리를 향해 옅은 미소를 보였다.

훌륭한 연주를 보여준 답례로 나 또한 내가 생각한 바로크를 들려주겠다고.

머릿속에 생각해뒀던 이야기가 꿈틀대기 시작한다.

그동안 연습을 하면서 생각했던 내용들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르네상스와 고전 사이에서 즉흥과 형식의 간극에 선 바로크 시대.

시대적 메시지를 비롯하여 작곡가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는 어떤 면모를 지녔을지 생각해보았다.

전생의 기억이 더해져서일까.

히마리의 연주에서도 표출되지 않은 특성이 내 안에서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표출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잠시 후 내 이름이 호명되자 나는 피아노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크의 재현율을 올려야 한다는 큰아버지의 조언.

전생의 기억을 가진 나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이리라.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그 이상의 것.

단순히 기억이 아닌, 그 기억 속에서 느낀 과거의 특이점을 떠올렸다.

생각을 거듭한 결과.

내 머릿속엔 하나의 확신이 차올랐다.

‘떨림이 아닌 울림이다.’

머릿속에 새겨진 생각과 함께 손가락이 건반 위를 질주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