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62화 (62/250)

62화

히마리의 연주를 들은 사람은 모두 그녀의 손놀림을 칭찬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주가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하지만, 히마리는 크게 자각하지 않는 부분이었다.

마치 음악을 듣고,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로드맵이 그려지듯.

단순히 원하는 만큼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그녀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는 쇼팽 콩쿨의 우승자, 사토라도 인정한 영역이었다.

“히마리 상은 손가락 하나하나에 섬세함이 특징이군요. 그걸 잘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초호화 연습실까지 대관하여 연주를 살폈던 사토라였다.

사토라 또한 한때 렌카의 제자였기에.

자신의 오래된 스승이 젊은 제자를 들였다는 사실에 사토라의 흥미가 물씬 일렁였다.

사토라는 날카로운 렌카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으니까.

제자가 되고 싶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 직접 제자를 뽑았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연주를 듣는 순간.

사토라는 렌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틀에 한 번. 함께 연습을 하도록 하죠.”

히마리는 사토라를 만난 것만으로도 소녀처럼 들떴는데, 그가 자신의 연주를 피드백해준다는 것에 어쩔 줄 몰라 활짝 웃었다.

선망하던 우상의 앞에서 최대한의 기량을 보여주겠노라고.

건반에 올린 그녀의 손가락이 어느 때보다 정확하게 움직였다.

활기찬 선율을 펼친 히마리를 향해 사토라는 언질해 주었다.

“때론 곡에 따라서 흥을 조절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히끅.

엄숙한 사토라의 태도에 히마리는 놀라 딸꾹질을 했다.

최근 들어서 처음 듣는 피드백.

하지만, 그 피드백의 내용이 상세하고 정확했기에.

히마리의 눈빛이 되려 크게 일렁였다.

“바로크 시대의 곡은 르네상스의 즉흥성과 고전의 형식미를 절반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려하게 펼치는 것처럼 보여도 에튀드처럼 형식에 가까운 선율을 지니죠.”

직접 시범을 보이는 사토라의 모습에 히마리의 눈길이 매서워졌다.

사토라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팔과 손가락의 움직임은 어떻게 펼쳐지는지, 페달의 세기와 조절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까지.

마치 사진을 찍듯 그녀의 뇌리에 사토라의 피드백이 깊게 박혔다.

기본적인 손가락 위치에 따라서도 히마리에게 필요한 음색을 표현할 수 있었다.

“때론 들뜬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장조에선 플러스로 다가오겠지만, 단조에서는 마이너스로 다가올 테죠.”

사토라의 말에 그녀는 단조의 분위기에 적응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낮으면서도 분명하게 음색을 나타낼 수 있도록.

페달의 차이로 음색이 퍼지지 않도록.

손가락에 힘을 주되, 신나서 주는 힘이 아닌 엄숙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몇 가지 변화점을 주었음에도 곡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모습에 히마리는 신기함에 감탄사를 냈다.

도리어 그 변화점을 순식간에 흡수하는 히마리의 모습에 사토라가 놀라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런 히마리도 이안의 연주에는 혀를 내둘렀다.

‘무척 농익은 연주 같아.’

히마리도 영상을 통해 이안의 연주를 들었다.

호텔에서 펼친 오래된 피아노.

하지만, 그 곡이 스카를라티의 곡이었기에 더욱 눈여겨보았다.

이번 콩쿨 경연곡을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하는 이안의 손길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조율의 차이에 듣기 어색하면서도 속에 들어간 본질은 하나였다.

장조와 단조.

표정의 변화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안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만 떠오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곡의 분위기에 따라 표정이 달라 보여.’

이안의 연주를 마주한 히마리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그가 무척 올곧다는 것이었다.

두 종류의 소나타를 연주하면서 그 감성에 쉬이 젖기 힘들 텐데.

히마리에겐 쉬운 일이었지만, 그동안 함께 피아노를 수학하던 친구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일이었다.

장조의 밝은 선율을 이어가다가 급박하게 단조의 선율을 연주하면 앞선 곡의 스타일이 그대로 묻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이안의 연주는 그러한 점이 전혀 없었다.

마치 중심에 큰 초석이 존재하고 그것에 따라 음악이 파생한 것처럼.

이안의 미소는 장조 소나타에서는 밝은 햇살 같았고, 단조 소나타에서는 은은한 달빛 같았다.

‘게다가 연주도 그때보다 훨씬 좋아졌어.’

분명 같은 스카를라티의 곡이었다.

호텔에서 연주했을 때도, 음악당에서 연주했을 때도.

아무리 피아노가 달라서 낸다기엔 그 소리의 미묘함이 너무나도 컸다.

강세 자체가 달라진 것은 물론 트레몰로를 이어가는 소리가 전혀 달랐으니까.

‘음의 연결이 저렇게까지 자연스러울 수 있다니.’

손가락을 떨다시피 하여 연속적으로 소리를 내는 기교.

본래 소리도 떨림에서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분명 연주하는 모습은 호텔 영상 속 모습과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음악당에 퍼지는 선율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모습이었다.

부드러운 손놀림이 강점이라는 히마리조차도 닿지 못한 레가토의 영역.

마치 두 개의 건반으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울림통에서 소리가 퍼지는 것 같다.

분명하게 갈라진 선율인데.

새끼줄을 꼰 듯 하나가 된 선율이 부드럽게 퍼져나간다.

얼마나 노력하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떨림보다 울림이 느껴져.’

깨달음을 얻은 듯 히마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의 기교보다 더욱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이안의 손가락에 그녀는 기염을 토했다.

단시간에 소리를 깨닫고 몸을 체득하는 면모.

그 때문일까, 이안의 연주가 귓속으로 파고들자 히마리의 심장이 공명하듯 두근거렸다.

새로운 소통과 깨달음의 장.

그녀가 원하던 콩쿨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이번 콩쿨, 나오길 잘했다.’

***

스카를라티의 전공은 피아노가 아니었다.

하프시코드.

피아노보다는 오르간에 가까운 하프시코드는 엄밀히 말하면 관악기였다.

건반을 눌러 공기를 전달하고, 그 공기로 관을 울리는 악기.

기교를 채우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관악기 특유의 선율을 나타내기 위해 잦은 트레몰로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 소리를 재현하기 위해 일전에 아버지가 일러주셨던 주법을 사용했다.

보다 자연스럽게 선율을 연결하기 위해.

그 덕에 심사위원들이 골머리를 앓았지.

“우열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의 표현은 간략했다.

예상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선율에 감탄밖에 할 수 없었다고.

우위를 평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덧붙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만들어냈다.

“공동 우승이라니. 살면서 이런 광경도 다 보네.”

으레 콩쿨이란 경쟁의 장.

누가 더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갖췄는가에 대해 싸우는 곳이었다.

매번 예술가들을 줄 세우는 현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다고 판단한 듯 심사위원들이 두 손을 들었다.

“네가 참여한 콩쿨에서는 너의 우승이 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말끝이 흐려진 큰아버지의 말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느껴졌다.

큰아버지도 몸서리치게 만들 정도의 실력이었으니까.

나 또한 그녀의 성장세에 놀랄 정도였으니.

“그 친구 솜씨가 제법이더구나.”

큰아버지가 불꽃 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단박에 큰아버지의 인정을 살 정도라면 정말 대단한 수준이리라.

나 또한 그렇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번 무대는 본선.

아직 결선이 남아있었다.

결선 무대에서는 어떤 변화를 선보일지.

미묘한 기대감이 가슴 속에서 일렁였다.

“하지만 너도 만만치 않지.”

큰아버지가 큼직한 손으로 내 어깨를 툭툭.

사뭇 어색한 손길이었음에도 그 안에는 따스함이 가득 묻어났다.

그동안 성장해온 것을 모두 봐온 장본인이니까.

믿는다고.

앞으로 어떤 연주를 보여줄지 묘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나 또한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결선에서 만들고 싶은 이야기와 그 이야기에 응답할 히마리의 연주가 기대되었기에.

연습실로 향하는 동안에도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일주일 뒤에는 우열을 가려볼 수 있도록.’

***

렌카는 카타리네 스튜디오의 일원으로 살면서 숱한 음악가들을 만나왔다.

오케스트라 선율을 활용하기 위해 거대 오케스트라 마에스트로를 만나기도 했고, 재치있고 독특한 선율을 만들어내는 미국의 거리 예술가를 만나기도 했다.

그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것은 바로 울림.

웅장한 규모의 오케스트라도, 젬베와 재활용 악기를 사용한 예술가도 그들만의 울림을 만들어내어 펼쳤다.

좋은 선율은 그러한 울림이 있어야 한다고 확신한 계기였다.

울림의 차이가 음악의 우열을 가린다고.

그래서 이번 결선이 더욱 기대가 되었다.

초유의 사태. 아시아 월드 피아노 콩쿨 측, 공동 우승 선언.

한국과 일본의 샛별. 과연 결선에서 우열을 가릴 수 있을 것인가.

렌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대서특필된 신문 기사를 읽고 있었다.

전례 없는 결과에 열도가 뜨겁게 들끓고 있었다.

이안과 히마리.

두 피아니스트의 접전이 예상된다며 콩쿨을 공개 방식으로 변경하자는 요청도 있었다고.

신문을 내려놓은 렌카는 햇살을 바라보며 히마리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새파란 아이인 줄 알았었지.’

주제곡 오디션에 히마리의 곡이 선택되어 스튜디오로 왔던 날.

렌카는 크로스백 줄을 부여잡은 히마리와 마주쳤다.

유난히 작은 체구였던 탓에 렌카는 히마리가 10대 소녀라고 생각했었다.

자신을 바라보면서 연신 인사를 건네는 히마리의 모습에 다른 피아니스트와 다른 점을 찾지 못했다.

의심 어린 눈초리로 녹음을 지켜보던 렌카는 히마리의 연주에 눈을 끔뻑였다.

‘저 체구에 저런 선율을…’

히마리의 연주는 가히 힘이 넘쳤다.

조그마한 몸집에서 나오는 선율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강세와 속도를 바꾸는 솜씨는 지금껏 제자로 받아달라고 한 사람들 중 단연 최고였다.

마치 꿈을 꾸듯 살며시 눈을 감고 연주를 이어가는 모습은 신내림을 받은 모습이었지.

자신의 곡을 만드는 것은 물론 기존의 곡도 자신의 느낌과 생각으로 해석하는 면모에 렌카는 처음으로 먼저 제자로 들어오라는 제의를 했다.

‘표현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실력.’

표현력.

무척이나 추상적인 말이지만, 히마리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만든 존재였다.

밝은 선율이라는 말 대신 아이가 뛰놀며 해맑은 표정을 짓는 것 같은 선율이라고.

어두운 선율이라는 말 대신 밤중에 내리는 비를 맞으며 도망치는 늑대의 선율이라고 표현하는 모습에서 히마리의 가능성을 알아본 렌카였다.

그보다 더한 천재는 없을 줄 알았는데.

미우가 보라며 건넨 영상 속 이안의 연주는 오랜만에 렌카의 눈썹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살리에리가 무덤에서 일어나겠군.’

미우가 생동감이 넘친다고 했던가.

살리에리가 생전 쳤던 피아노에서 여유롭게 연주를 이어가는 모습은 기묘할 정도였다.

렌카조차 처음 듣는 음색인데.

젊은 한국 청년이 그것이 도리어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펼쳤다.

만만치 않은 표현력에 렌카도 혀를 내둘렀다.

‘두 표현력의 강자들이라…’

OST를 녹음하러 왔던 현장에서도 들었지만, 이안의 표현력은 히마리처럼 뛰어나면서도 미묘하게 결이 달랐다.

히마리의 표현력은 마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동화를 읽어주는 엄마를 쳐다보듯 세밀한 묘사와 선율이 특징이었다.

아이를 위해 표정을 찡그리거나 목소리를 바꾸는 것처럼 정성이 가득 들어간 음색.

그에 반해 이안의 표현력은 마치 고문서를 보는 기분이었다.

거장이 고서적을 꺼내어 그 뜻을 알려주는 듯.

이안의 연주는 멀끔한 설명을 곁들임과 동시에 과거의 사조를 현대로 이끌어오는 것 같았다.

‘이번 곡이 드뷔시의 곡이랬던가.’

결선곡을 떠올리던 렌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인상주의 연주가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

그녀 또한 피아노를 수학할 때 수없이 마주쳤던 거장이었다.

인상주의 피아노는 현대 뉴에이지의 초석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까.

곡에서 특정 주제를 찾을 필요 없이 그저 자연스러운 선율에 녹아들면 된다.

주제부나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분위기를 강조한 선율.

그래서 인상주의 음악은 그 분위기를 어떻게 이끌어가는지 중요한 관건이었다.

분위기는 표현력에 의해 만들어지고 강조되기에.

렌카의 가슴 한 켠에 두 신예의 표현력이 어떻게 피어날지 기대감이 어렸다.

‘히마리의 깔끔한 표현력이 일품일 테지.’

이미 결선곡을 들어본 렌카의 눈앞에 제자의 연주가 선했다.

마치 모래를 끌어모으듯, 히마리의 손길에 한데 뭉치는 화음.

주제곡에서 더할 나위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던 히마리였기에.

꿈을 꾸듯 눈을 감고 인상주의 특유의 몽환적인 선율을 펼칠 그녀가 선했다.

느릿하면서도 힘 있는 연주가 그 특색을 더해주겠지.

마치 구름 위에 자신이 떠오른 듯.

연주는 느릿하면서도 환희를 담은 듯 밝게 전개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 청년도 무시할 바가 아니지.’

이안을 떠올리는 렌카의 가슴이 미묘하게 뛴다.

이안이 어떤 곡을 선택하고, 어떻게 연주를 할지 기대된다는 듯.

형식미가 가미되어 절제했던 바로크 연주를 벗어나 인상주의 연주를 펼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됐다.

마치 야생마가 날뛰는 것처럼.

과연 이번에도 그 시기의 선율을 재현해낼 수 있을지 궁금증이 떠올랐다.

‘과연 어떤 쪽이 더욱 날뛸지.’

빙긋.

렌카는 묘한 웃음을 보이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리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신문에 담긴 두 신예의 얼굴로 향했다.

하지만, 렌카의 눈길이 향한 곳은 한 곳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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