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63화 (63/250)

63화

피아노에 올라간 내 손이 빠르게 질주한다.

평소 선보였던 음색과 전혀 다른 선율이 피아노에서 퍼져나간다.

지극히 규칙적이고 형식을 지켰던 고전을 지나 현대에서 펼쳐진 선율.

‘인상주의 피아노.’

미술의 영역으로 좀 더 잘 알려져 있으나 음악에도 인상주의는 존재했다.

마치 최근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뉴에이지처럼.

화음의 규칙적인 전개보다는 무언가 한 켠이 불안한 듯 펼쳐지는 선율과 앞뒤를 예측할 수 없는 파격적인 음색이 특징이었다.

그중 결선곡은 드뷔시의 프렐류드에서 선택한 두 곡.

‘드뷔스 프렐류드의 5번과 11번.’

일명 ‘아나카프리의 언덕’과 ‘퓌크의 춤’.

인상주의가 가득 담긴 듯 두 곡 모두 전개를 예측할 수 없이 펼쳐진다.

한 음씩 담담하게 펼치던 중에서도 갑자기 여러 개의 음색을 동시에 드러내기도 하고, 잔잔하던 선율에 갑작스레 속도가 붙기도 한다.

수많은 변칙들 속에서도 어떤 선율을 보이느냐가 관건.

전혀 다르게 펼쳐지는 음들 속에서도 분위기 하나만큼은 일관되어야 한다.

단순히 악보를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닌 전체의 선율을 이해하듯.

몽환적인 선율을 특유의 색깔로 채워나간다.

“분산화음을 현악 선율처럼 표현했구나.”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큰아버지는 납득된다고 맞장구를 쳤다.

마치 하프를 연주하는 것처럼 개별적으로 울리던 선율이 아르페지오라는 명령 아래에 신속하게 펼쳐진다.

바이올린에서도 네 개의 현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선율이 있듯.

있는 그대로의 표현이 떠오른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펼쳐지는 화음에 큰아버지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새 손놀림이 더 늘었구나.”

큰아버지의 말투는 차분했다.

신기한 것 같으면서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듯.

드뷔시의 곡은 지금껏 연주했던 것에 비해 가장 빠른 선율을 자랑했다.

특히 인상주의 사조가 가득 묻어나서 그럴까.

잔잔하게 흘러가다가도 선율은 급변해 몰아치는 폭풍처럼 흘러간다.

그것에 맞춰 빠르게 손가락을 변화시키는데, 그것을 본 큰아버지가 혀를 내두른 것.

본선과 결선 사이의 시간은 고작 일주일.

이제는 미리 익혀둔 선율에 어떤 곳을 강조하고, 어떤 부분에 힘을 가할지 결정할 때였다.

문득 시계를 보던 큰아버지가 짧게 한 마디를 건넸다.

“오늘은 여기까지구나.”

장장 12시간.

하지만 내 얼굴에는 피곤함이 전혀 없었다.

곡의 완성도에 너무 집중한 탓일까.

지금도 몸속에서 아드레날린이 도는 듯 머릿속에서 선율이 떠다녔다.

새롭게 떠오른 생각은 호텔 방에 있는 피아노에 펼쳐야지.

그것을 그대로 콩쿨에 펼칠 생각에 도리어 가슴이 뛴다.

나서기 위해 문을 연 순간.

우리는 그 앞에 서 있던 다음 예약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오늘도 연습을 하셨나 보네요!”

히마리와 사토라가 동시에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아마도 다음 차례를 기다렸던 것이겠지.

사토라는 가장 먼저 공동 우승을 축하한다는 뜻을 전했다.

유례없는 일에 벌써 사토라가 있던 오스트리아에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나와 히마리가 펼칠 연주를 벌써부터 기대하는 눈치라고 덧붙였다.

나 또한 기대가 된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녀가 어떤 곡을 선택했을지, 그 곡을 어떻게 펼칠지 궁금하다고.

콩쿨에서 확인하겠다는 말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발걸음을 옮기려던 철나, 사토라가 우리를 향해 새로운 뜻을 전했다.

“함께 연습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사토라의 뜻은 명확했다.

이미 경쟁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고.

히마리의 의사는 물론 나 또한 경쟁에 크게 연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만약 함께 연습실을 사용한다면 더욱 긴 시간을 투자할 수 있을테고, 공동 우승자인 만큼 서로에게 배울 것도 많을 것이라며.

사토라의 제안에 히마리는 곧장 괜찮다는 듯 밝은 미소를 뽐냈다.

반짝이는 그녀의 눈망울에서 여러 감정이 우러나왔다.

어서 음악을 통해 대담을 나누고 싶다고.

내가 준비한 곡은 어떤 곡인지 궁금하다는 듯 생기가 어렸다.

하지만.

“죄송합니다만, 저는 혼자가 편합니다.”

내 뜻을 전해 들은 사토라와 히마리는 아쉬운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사토라는 일부 납득을 하는 듯 애써 미소를 보였지만, 히마리는 울상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히마리와 함께 온 사토라는 아시아 월드 피아노 콩쿨에서 우승한 전적까지 있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의 조언을 듣는 것도 분명 나쁘진 않을 테지.

하지만 결선을 일주일 앞두고 함께 연습을 이어가는 것은 무척 비효율적인 일이다.

번거로움도 있을 테지.

함께 일정을 맞추고, 곡에 대한 피드백을 이어가려면 개인 연습시간은 줄어들 테니까.

오직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었던 나에겐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정도는 괜찮겠지.

“지금 여기서 자신의 연주를 한 번씩 보여주는 건 어떤가요?”

새로운 제안에 히마리가 눈을 번뜩였다.

그녀는 이내 뜻을 이해하고 울상이던 표정을 거두고 맑은 웃음으로 반겼다.

사토라는 내 제의에 다소 놀란 듯 보이더니 박수를 치며 경의를 표했다.

“정말 아름다운 경쟁이군요.”

본래 내가 콩쿨에 오려고 했던 이유.

쇼팽 콩쿨의 참가 자격을 얻기 위함도 있었지만, 다른 실력자들과 소통하고 싶었다.

히마리는 그 조건에 가장 적합한 사람.

서로의 곡을 미리 볼 수 있다면 나는 물론 히마리도 한층 더 향상된 연주를 펼칠 수 있으리라.

내 가슴 한 켠에 기분 좋은 기대감이 일렁였다.

나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테니까.

주제곡에 강세를 보였던 히마리가 드뷔시 특유의 분위기를 어떻게 자아냈을지.

어떤 기법을 활용하여 강세를 줬을지 묘한 궁금증이 일었다.

서로 연주를 보여주고 그것에 맞춰 성장해보자는 약속이자 제안.

히마리는 그 제안이 너무나도 좋다는 듯 자연스레 건반에 손을 올렸다.

자신의 연주를 먼저 보일 수 있다는 게 기쁘다는 듯.

건반에 올린 그녀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뷔시의 2번 프렐류드.’

일명 ‘베일’.

하늘에 오로라 같은 베일을 두른 듯 신묘한 선율이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한다.

무척이나 느릿하게.

그에 맞춰 내 머릿속에서도 악보가 그려진다.

악보와 더불어 펼쳐지는 꽃들의 세례.

펼쳐지는 선율은 마치 밤하늘에 점차 피어나는 달맞이꽃을 닮았다.

계속해서 보이진 않지만, 어느덧 펼쳐진 것처럼.

그녀의 음악 또한 보이진 않지만 내 주변에 베일을 둘러둔 듯 환상에 가까운 선율을 점차 퍼뜨려간다.

기준음보다 한 옥타브 아래의 있는 낮은 도가 지속해서 소리를 내며 베일의 정체를 굳건히 한다.

차근히 흩날리듯 진행하던 선율은 어느 순간 갑자기 빨라지며 여러 개의 화음을 토해낸다.

‘마치 흔들리는 돛 같군.’

2번 프렐류드의 또 다른 이명.

돛대에 걸어둔 돛이 흔들리듯 옅은 선율과 강렬한 선율을 반복한다.

느릿한 산들바람을 만난 듯 천천히 일렁이다가도 세찬 폭풍에 갑작스레 커진 음색이 폭발적으로 터진다.

그 상세한 이야기를 모두 전달하는 듯.

히마리의 연주는 흔들리는 결들이 모두 느껴질 만큼 세세했다.

이어지는 9번 프렐류드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다르다면 이번에는 시작부터 빠르고 느려짐을 계속해서 반복한다는 것.

‘9번, 끊어진 세레나데.’

격앙된 감정과 쉴 새 없이 뛰는 가슴을 표현하듯 빠른 속도의 음표들이 질주하듯 펼쳐진다.

두 개의 화음을 동시에 반복하면서도 그녀의 손가락은 유려하면서도 끊김이 없다.

이미 완성에 가까운 솜씨.

그 마음이 격앙될수록 속도는 더해간다.

끝없이 변화하는 선율에도 굳건하게 이야기를 지키는 히마리의 모습은 마치 전사 같았다.

‘본래의 속도로 돌아오는 속도가 무척 빨라.’

긴장으로 연주의 속도가 빨라지는 이유는 심장 때문이다.

점차 빨라지는 심장 박동에 따라서 연주를 펼치는 손가락이 빨리 움직이니까.

드뷔시의 프렐류드는 그 심장 박동이 빨라질 만도 한 부분들이 수없이 많았다.

문제는 그 속도를 다시금 되돌려야 하는 부분이 잔뜩 있다는 점.

같은 음을 내더라도 위치에 따라 빨라진 손길이 그대로 적용되면 음색이 급하게 나아가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들어보길 잘했군.’

히마리의 곡을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행여 내가 채울 수 있는 부분을 찾을 수 있는지 볼 뿐.

히마리 또한 연주의 공백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실력자니까.

그녀의 특이점을 한 수 배워간다는 느낌으로.

감상을 이어가던 중 히마리가 연주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도의 말은 오가지 않았다.

그저 충분하다는 듯 미소를 선보일 뿐.

히마리가 자리를 비켜주자 나는 천천히 의자에 앉아 건반에 손을 올렸다.

이제 내가 생각하는 바를 얘기해줄 차례.

손가락이 느릿하면서도 힘있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

‘소름 돋아.’

이안의 연주를 듣던 히마리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손으로 감쌌다.

그의 연주는 마치 현악기를 다루는 것처럼.

하프의 고요한 음색을 나타내는 것 같다가도 빠르게 스트로크를 펼치듯 주행한다.

한꺼번에 여러 음표들이 작렬하자 히마리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자신도 표현력에는 누구에게 밀리지 않다고 생각했거늘.

이안의 연주실력은 맞붙는다면 조금씩 밀릴 것만 같았다.

‘그의 연주엔 무언가가 섞여 있어.’

이안의 연주를 바라보는 히마리의 눈매가 좁아졌다.

마치 세기의 난제를 발견한 듯한 표정.

분명 자신과 같은 피아노를 사용하여 연주를 펼치는데도 이안의 연주는 묘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무엇이 다를까.

점차 이안의 연주에 매료되던 히마리는 그 미묘한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마치 숲을 보는 것 같아.’

히마리는 연주를 하며 무척 세세한 것을 따지는 사람이었다.

주제곡을 만들 때도 멜로디를 시작으로 하고 싶은 선율을 표현했고, 곡을 묘사할 때도 그 속에 깃든 세밀한 생태계를 꾸미려고 애썼다.

특별한 색깔을 나타내듯 다양한 화음을 펼쳤고, 그 화음들을 통해 전체 그림이 어떤지 설명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안의 연주는 히마리와 완전히 상반된 느낌이었다.

‘밖에서 안으로 점차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야.’

곡이 진행되면서 히마리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5번 프렐류드가 끝나가는데도 그녀는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 알지 못했다.

히마리가 그 원인을 찾은 것은 이안이 11번 프렐류드를 연주할 때부터였다.

‘나와 반대되는 선율이야!’

분명 연습할 때 쳤던 곡이었다.

‘퓌크의 춤’이라는 이명처럼 빠르고 변칙적인 선율이 이어가는 선율.

만약 곡이 펼쳐지는 공간을 표현하라면 히마리는 춤을 추는 사람을 먼저 조명할 터였다.

사람의 움직임으로부터 시작하여 주변에 다른 춤꾼들을 그리고, 그들이 모여 군무처럼 펼쳐지는 것을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이안의 연주는 반대로 배경이 되는 무도회장부터 표현하는 것 같았다.

춤꾼들의 발소리가 거대한 무도회장에서 어떻게 퍼지는지, 그 울림이 어디서, 어떻게 펼쳐 나왔는지 연구하듯 세세하게 들어가겠지.

이안은 혼자 연주하면서도 관현악단과 악단의 연주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의 기운을 한껏 머금은 연주를 펼치고 있었다.

‘이게 그와 내가 다른 점이구나.’

입구에서부터 차근차근 펼치는 연주.

그러다 보니 이안의 연주를 들으면 들을수록 매료가 되었고, 연주가 마쳤을 즘에는 언제 끝났는지 몰라 눈만 끔뻑일 정도였다.

마치 정신없이 걸어 나왔더니 뒤에 긴 숲길이 뻗어있는 것처럼.

히마리의 머릿속에 작은 깨달음이 피어났다.

이것이 그와 자신의 차이라는 것을.

넓은 로드맵을 그리듯 펼쳐나간 선율의 특이점을 이해한 히마리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벌써부터 어떤 식으로 칠지 생각을 해둔 듯.

히마리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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