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서로의 연주를 내려놓은 우리는 그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다.
누가 잘했네, 못했네.
어떤 것이 좋았네, 말았네.
마음만 먹으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음에도 우리는 미소만 머금은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미 음악에서 모든 것을 들었다는 듯.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넨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월드 피아노 콩쿨은 본선과 결선 사이 시간이 일주일밖에 되지 않는다.
신청서를 넣을 때부터 예선은 물론, 본선과 결선에 연주할 곡을 미리 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
결선에 참여할 수 있는 보장이 없더라도, 결선 곡까지 함께 연습을 해둬야 하는 것이 이 콩쿨의 묘미였다.
하지만 다른 참여자에게는 걸림돌로 다가왔으리라.
그만큼 많은 악보를 암보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본선과 같은 음악당이었지만, 관객석은 무척 한산했다.
겨우 10명.
백에 가까웠던 인원 중에서 다시금 음악당에 초대받은 사람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분명 사람은 줄어들었을 터인데.
오가는 냉기는 이전보다 더욱 짙었다.
이번 콩쿨에서 우승하는 자는 쇼팽 콩쿨 참가 자격이 주어졌으니까.
그곳은 다른 콩쿨처럼 단순히 커리어를 한 줄 세우는 곳이 아니었다.
각국의 최고 피아니스트들이 나와 경연을 펼치는 곳.
콩쿨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피아니스트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커리어가 쌓이는 곳이었다.
그만큼 대단한 곳을 향하는 관문이라 그럴까.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히는 나와 히미라를 향해 날카로운 눈길들이 꽂혔다.
“이안 씨의 연주는 그때도 좋았지만, 이번에는 더 좋을 거란 확신이 들어요.”
히마리가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듯 뜻을 전했다.
이번에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였다.
담백한 하얀색은 마치 돛의 색을 닮은 듯하면서도, 세레나데가 끊긴 비련의 주인공을 형상화한 것 같기도 했다.
아마 그녀가 어떤 연주를 펼치느냐에 따라 바뀌겠지.
그리고 그 예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적중했다.
“저럴 줄 알았다지만, 기대 이상이구나.”
무려 큰아버지가 ‘기대’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히마리의 연주는 그 표현이 적절할 정도였다.
연주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연습실에서 서로의 연주를 나눴을 때도 충분히 좋았으니까.
하지만, 미묘하게 변경된 선율이 더욱 풍성한 음색을 내뿜고 있었다.
세세한 묘사가 가미된 것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묘사의 방향성.
‘분위기에 무게감이 더해졌어.’
이전이었다면 돛이라는 이명의 선율을 펼칠 때 차례대로 펼쳐지는 선율에 집중했을 히마리였다.
하지만, 이제는 돛이 흔들리는 이유를 탐닉하듯.
간드러지게 펼쳐진 음색뿐만 아니라 반복되며 전체를 아우르는 낮은음 도와 짤막하게 피어나는 높은음들에 힘을 가했다.
마치 돛만 조명하던 시야가 트여 배 전체를 형상화하듯.
허나, 전체를 아우르는 선율은 내 특기였다.
“저 친구 너한테 고마워해야겠다.”
큰아버지가 옅은 우스갯소리를 내뱉었다.
그 또한 나의 특색이 묻어나는 히마리의 연주를 알아보신 것일 테지.
그치만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저렇게 흡수하여 연주를 선보일 줄이야.
놀라우면서도 묘한 감정이 일렁였다.
빈 필에서 수학하던 피아니스트에게 강평을 더했을 때처럼.
직접 가르쳐주진 않아도 나의 영향으로 변화된 선율이 더욱 인상적이게 다가왔다.
‘이번 답례는 단순히 연주를 펼친 것에 그치면 안 되겠군.’
더욱 심혈을 기울인 연주를 펼쳐야 되겠다.
본선에서도 히마리의 연주에 답례처럼 연주를 꺼냈는데.
이번에는 단순히 화답의 수준이 아닌 진정 답례에 가까운 선율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크게 꿈틀댔다.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가던 찰나.
순번을 말해주는 진행요원이 내 이름을 호명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오너라.”
큰아버지가 어깨에 손을 몇 번 토닥이며 말했다.
나는 그를 향해 자신 있다는 듯 미소를 펼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단에 올라서자 히마리의 눈길이 무척 밝게 느껴졌다.
기대감이 어린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큰아버지의 눈길도 느껴졌다.
수없이 연습에 함께하며 더욱 짙어진 믿음으로.
수많은 감정들과 내 뜻이 고스란히 담긴 손이 천천히 건반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
‘이보다 더 큰 빅매치가 있을까.’
분명 두 신예는 경쟁을 뜻에 두고 참여하는 콩쿨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콩쿨이라는 것은 결국 우열을 가리고 줄을 세우는 경쟁의 장.
그 1차원적인 규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 규칙을 깨어버릴 기세로 펼쳐지는 연주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 일주일 사이에 열의를 불태우더니.’
온전히 음악을 즐기듯 연습에 열중하면서도 밤을 새우거나 매달리지 않던 히마리였다.
하지만, 이안의 연주를 들은 후부터 히마리는 눈에 불을 켠 듯 연주에 임했다.
일주일 사이 잠도 아껴가며 연습을 하는가 하면, 새벽녘에도 녹음한 선율을 사토라에게 보내기도 했다.
열의에 불타는 히마리의 모습에 사토라도 덩달아 그녀를 응원하고자 피곤함을 이겨내고 그녀의 연주를 성심성의껏 들었다.
그리고 수많은 노력 끝에 피어난 꽃은 그 어떤 때보다 아름다웠다.
‘정말 표현력의 극을 달리는군.’
이미 표현력이 완성됐다고 생각했던 터였는데.
이안과 조우 후 살이 더해진 연주의 풍성함은 완벽에 가까운 수준으로 더해져 있었다.
더 나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을 나아가는 것이 신기할 정도.
히마리가 이 정도라면.
과연 이안은 어느 정도의 선율을 꺼내 들까.
사토라는 먼발치서 이안의 등장을 지켜봤다.
‘분명 흔한 20대 피아니스트와 다른 것이 없는데.’
관객석에 앉아 있다가 연단 위로 올라오는 이안의 모습.
눈빛은 꽤 살아 있었지만, 모든 제스처는 일반적인 청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피아노를 잡는 순간.
일반적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은 비범하게 바뀐다.
‘정말 하프의 선율을 듣는 것 같군.’
세계를 무대로 주행하며 수없이 많은 악기와 연주가들을 만난 그였다.
그중에서도 하프.
현악계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음색이 난데없이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마치 이안이 건반을 누르면 해머가 울림판을 치는 것이 아니라 하프의 현을 치는 것처럼.
가련하게 펼쳐지는 선율은 듣는 것만으로도 숨을 멎게 만드는 것 같았다.
후우.
현악처럼 느껴지는 선율이 지나가고 나서야 사토라는 참던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잔혹하게 펼쳐지던 선율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그 자리를 잔잔한 피아노 음색이 채우기 시작한다.
‘속도를 제어하는 건 히마리의 특성을 따왔군.’
이안의 연주까지 살피자 사토라는 혀를 내둘렀다.
이안의 장점을 흡수하는 히마리를 보면서도 신기하던 그였건만.
이번에는 이안이 그 행동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인상주의 연주는 워낙 변칙적인 탓에 사뭇 어색해지기 십상이다.
전혀 다른 선율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을 히마리는 무척이나 매끄럽게 전개했다.
그런데 히마리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그 전개법을 이안이 똑같이 펼치고 있었다.
‘하나이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끊임없이 선율을 전개하는 오른손.
반복적으로 낮은음을 펼치는 왼손.
음표의 색채가 분명히 드러나야 하는 곳은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고, 가련한 음색을 펼쳐야 할 때는 유연하게 손이 움직이며 소리를 표현한다.
살리에리의 피아노로 바로크 시대의 선율을 재현할 때처럼.
이안의 연주는 전혀 다른 선율을 연주하는 것 같으면서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인상주의마저도 완전히 자신의 것을 만든 것처럼.
‘이번에도 심사는 글렀겠는걸.’
연주를 듣고 있던 사토라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지지 않았다.
각자의 개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선율.
둘 다 아름답다는 말로 형용하는 것 이외에 다른 수식어를 붙이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도 공동 우승이라는 표명을 내도 사토라는 전혀 불만이 없을 지경.
하지만, 이안이 두 번째 연주를 펼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이전과 같았다.
드뷔시의 11번 프렐류드, <퓌크의 춤>.
마치 춤곡을 형상화하듯 빠르면서도 재치있는 선율이 음악당을 가득 채웠다.
무도회장을 들어온 것 같은 분위기.
인상주의의 느낌을 잘 살린 연주였다.
그러나 사토라가 주목한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지?’
탁. 탁. 탁.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토라는 한쪽 발로 박자를 맞추며 이안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마치 춤을 추기에 앞서 스텝을 밟는 것처럼.
사토라는 자연스럽게 이안의 연주에 매료되어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뛰어난 예술가의 음악을 감상하면서 자연스레 흡수되는 것처럼.
이안의 연주는 다른 장점을 흡수하는 것도 모자라 듣는 이까지 연주에 흡수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재즈 피아노도 배운 적이 있나?’
클래식과 재즈.
둘 다 피아노로 펼칠 수 있는 장르였다.
단순히 같은 피아노를 활용한다 하더라도 두 선율은 완전히 달랐다.
마치 드뷔시의 곡이 이안이 만들어낸 즉흥곡처럼 자연스럽게.
듣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는 재즈의 선율이 음악당에 가득 퍼졌다.
그리고 춤추는 사람을 상상이라도 하듯.
이안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팔이 마치 춤을 추는 듯 절도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관객석의 사람들이 같은 박자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한 심사위원이 곡조에 맞춰 볼펜을 책상에 두드리는 모습에서 사토라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 단독 우승감이다.’
***
하네다 공항 한 켠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미우를 비롯한 카타리네 스튜디오 식구들이 내가 돌아가는 길을 배웅하고 싶다고 동행한 탓이었다.
저마다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내가 만든 OST를 잘 쓰겠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직원들의 이야기를 기다리던 미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은 경험을 하고 가는군요. 우리와의 협업은 물론 우승까지 거머쥐고 가니 무척 후련하겠습니다.”
미우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축하 인사를 덧붙였다.
아시아 월드 피아노 콩쿨 우승.
가방에 든 금빛 트로피가 묵직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듣자 하니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요?”
아마 쇼팽 콩쿨을 말하는 것이겠지.
미우의 말대로 쇼팽 콩쿨은 피아니스트계에서 최상위 콩쿨이었다.
트로피보다 더욱 값진 보상을 꼽으라면 단연코 쇼팽 콩쿨 참가 자격을 채웠다고 할 수 있을 터.
게다가 이번 콩쿨을 준비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으니까.
그렇게 만든 주인공이 미우의 옆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춤을 추게 만드는 선율이었어요. 이안 씨의 특색을 최대한 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면에서는 부족했나 봐요.”
분명 피아노를 연주하는데도 비트가 덧붙여진 것 같았다고.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인상주의의 기초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었으니까.
춤을 추는 무도회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펼쳤다는 것에서 높은 점수를 준 듯했다.
“새로운 깨달음을 줘서 고마워요. 콩쿨곡은 물론이고 이안 씨의 OST까지도요. 제 주제곡도 다시 보게 되는걸요.”
강력한 우승 후보로 주목받다가 우승을 놓쳤다면 조금이라도 아쉬울 법도 한데.
나를 향한 히마리의 눈망울에는 그 어떠한 적개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쉬운 기색 대신 이번 콩쿨을 충분히 즐겼다는 듯.
도리어 고맙다고 말하는 히마리의 입가에 생글한 미소가 맺혔다.
“다시 한 번 축하해요. 다음에는 더 큰 무대에서 만나요.”
먼저 악수를 건네는 히마리의 손에 강한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이번에 보여준 연주보다 더욱 좋은 연주를 펼칠 것이라는 자신감과 더 높은 무대에서 만날 것이란 확신이 담긴 손길이었다.
나도 손을 내밀어서 그녀의 악수에 화답했다.
나보다 훨씬 작은 손인데도 히마리의 손에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두 신예의 화합이 뿌듯한 듯.
옆에 있던 미우가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애니메이션 시사회 때 도쿄로 초청하도록 하지요.”
미우는 내 덕에 애니메이션 제작에 속도가 붙었다고 전했다.
곡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방울방울 피어나는 것 같다고.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콘티가 나온다고 껄껄 웃었다.
그 때문에 힘들 지경이라고 곁에 있던 문하생이 장난투로 볼멘소리를 냈다.
“덕분에 재미난 이야기를 그릴 수 있겠어요. 고마워요.”
진짜 작별.
출국 게이트를 앞에 두고 미우가 묘한 눈길을 보냈다.
그는 주름진 손으로 조심스레 내 손을 꼬옥 붙잡았다.
나 또한 그에 화답하듯 손을 꼬옥 잡곤 출국 게이트를 넘어갔다.
막 시야에서 미우가 사라지려던 찰나.
“잘… 가요!”
게이트 너머로 한국어로 된 미우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의 행보에 옆에 있던 카타리네 식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움을 표했다.
내가 감사하다는 표시를 일본어로 했던 것을 여태 기억하고 있었구나.
묘한 떨림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미우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곤 비행기로 향했다.
‘얼마 만의 한국이지.’
애니메이션 때문에 미리 일본에 도착한 것까지 합하면 한 달이 다 되는 기간 동안 일본에 있던 셈이었다.
비행기 창문 너머로 작게 변한 도쿄 스카이트리가 눈에 들어왔다.
빠르게 지나간 시간이 신기해서였을까.
창밖을 바라보는 눈길이 괜히 묵직해졌다.
큰아버지는 비행기에 올라서도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 종이를 넘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큰아버지는 이제 한국 돌아가면 뭐 하시려고요?”
내 말에 종이를 넘기던 큰아버지의 손이 멈췄다.
흐음.
잠깐 말을 참던 그의 눈길이 서류뭉치에 머무르다가 나를 향했다.
대답 대신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큰아버지.
내게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