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이제 스케일 업 해야지.”
큰아버지는 읽고 있던 서류 중 일부를 내게 건넸다.
수많은 기획서들.
광고와 독주회, 등 나를 활용하여 여러 컨텐츠를 만들자는 제안들이었다.
대부분 투자에 가까울 정도로 높은 인센티브를 제시한 상태였다.
내 연주는 돈이 목적이 아닌데.
이미 큰아버지는 물론 아버지도 만만치 않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수백에 호가하는 그랜드피아노를 선물이랍시고 덜컥 구매하실 정도였으니.
게다가 큰아버지도 오랜 마에스트로 생활로 후원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만 어마어마했다.
이번에 연습을 했던 초호화 연습실과 이동할 때 사용한 고급 차량과 기사.
모두 큰아버지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필요하다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을 분들이니까.
그러나.
“돈이 다가 아니다.”
설명을 곁들이는 큰아버지의 목소리가 엄숙했다.
이미 여유로운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행동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큰아버지는 이를 전략적 투자라고 표현했다.
온전히 수익을 얻기 위함 뿐만 아니라 다른 것을 얻기 위해 하는 투자.
이를 위해 예술가도 전략적인 후원을 받는다고.
후원의 목표는 결국 회사의 이익을 위한 것일 테고, 예술가는 그 이익이 무엇인지 파악하면서 연주의 동향을 찾는다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영감을 받을 수 있을 거란 말을 덧붙였다.
큰아버지의 말에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투자를 통해서 나는 영감을 얻을 수 있겠지.’
내게 광고를 통한 수익은 중요하지 않았다.
회사가 예술가 후원을 통해 사회공헌이라는 이미지를 쌓을 수 있다면, 나는 내 능력을 회사에 투자함과 동시에 그들의 아이디어를 활용할 수 있겠지.
앞으로 자작곡 독주회를 계획하고 있던 나에게는 무척 희소식이었다.
이제까지 만든 자작곡은 애니메이션 OST를 합하여 모두 4가지.
앞으로 4개를 채워야 하는 사이에 새로운 영감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게다가 큰아버지의 안목으로 1차적인 검수를 마친 안건들.
큰아버지도 감흥시킬 정도면 내게도 좋은 영감을 불러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중 큰아버지가 가장 먼저 내세운 것은 서천 그룹의 광고였다.
“회장님이 계속 광고 제안을 하셨는데, 네 콩쿨 때문에 먼저 얘기는 안 했다.”
무려 서필무.
재계 서열 13위의 서천 그룹 수장.
거대 그룹의 회장이 계속해서 내 선율을 광고로 넣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다른 사람이라면 거절했겠지만, 필무라면 예술의 조예가 깊어 안목을 믿을 만하다고 덧붙였다.
“전부 회장님의 손을 거친 광고안이다.”
내 손에 들린 광고 시안만 수십 종류.
한 그룹의 회장이 확인 작업을 할 정도면 무척 심혈을 기울인다는 뜻이겠지.
그 무게감에 시안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필무라면 단순히 내 유명세를 활용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터.
시안을 바라보니 유명세보단 연주 본연에 초점을 맞춘 것 같았다.
나 또한 소비자였기에, 소비자의 입장으로서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좋은 광고 시안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영감으로 만들어낸 곡이 더욱 빛을 발할 테니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내 연주를 펼칠 수 있는 기회.
시안을 살피는 내 눈이 더욱 매서워졌다.
***
광고에 함께하겠다는 연락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손님이 찾아왔다.
광을 낸 구두와 주름 하나 없는 양복 차림의 사내.
그는 빳빳한 명함을 건네며 자신의 소개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성치열 팀장이라고 합니다.”
서천 그룹 총괄과.
서천 그룹의 두뇌를 담당하는 곳이자 모든 시안과 컨셉이 오고 가는 곳.
회장인 필무가 직접 개입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그중 치열은 총괄과 마케팅팀의 팀장.
이번 광고의 전면적인 디렉팅을 맡은 인물이었다.
“제안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도 이안 씨의 합류를 무척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치열과 함께 음악실에 들어서자 그는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배기음을 강조한 기존의 광고.
단순 사실 전달에 그쳤다는 말을 하며 거부했다고 전했다.
“조잡하고 울림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만하네.
성 팀장이 꺼내든 태블릿에서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양새는 그럴 듯했다.
배기음의 특색을 잘 나타낸 외제차 광고를 벤치마킹한 광고.
본래의 의도가 잘 나타나는 듯 배기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완급 조절에 실패했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매력적인 배기음 소리는 소음으로 변해갔다.
배기음을 강조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광고 시간 내내 배기음이 울리는 것이 문제였다.
처음 들을 때는 배기음이 무척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량이 지나가면서 강렬해지는 음색은 압도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
하지만, 배기음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웅장했다고 생각했던 소리는 금세 시끄럽게 느껴졌다.
배기음이 좋다라는 표현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과도한 것이 독이 된 경우였다.
“그래서 이안 씨와 협업을 제안한 겁니다.”
소리를 강조하면서도 그 울림에 초점을 주어야 한다고.
단순히 소리가 좋다는 사실을 뽐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떤 매력을 가졌는지 설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러한 음색을 나타내는 것에 어려움을 느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내 연주를 들은 필무가 나라면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건넸다고 했다.
“보내주신 시안들은 모두 확인해보았습니다.”
“... 모두요?”
치열은 다소 당황한 듯 반응을 늦게 했다.
아마 갑작스레 성사됐음에 이렇게까지 준비하리라는 생각은 못했겠지.
3시간에 가까운 비행시간 동안 시안을 모두 확인한 나였다.
대부분 필무의 확인을 거친 덕일까.
콘티 뭉치라고 할지라도 그 수준은 굉장히 높았다.
대기업의 광고이기도 하고, 수많은 유명 광고인들이 시안 작업에 착수했을 테니까.
그중 내 시선을 사로잡은 시안이 하나 있었다.
“배기음과 음악의 협연. 이 시안 좋다고 생각합니다.”
시안을 내밀자 치열은 안경을 고쳐 쓰며 시안을 재차 확인했다.
마치 비행기가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동일한 수준의 소리를 내어 상쇄시키는 것처럼.
시안의 시작은 연주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배기음이 들어와 기존의 선율과 함께 주행한다.
마치 자신의 소리를 강조하려고 경쟁이라도 하듯.
두 소리가 충돌하면서 묘한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결국 두 소리는 하나가 되는 것처럼 섞이더니 배기음이 하나의 음악처럼 펼쳐지는 것.
한 유명 광고 기획자가 만들어낸 시안이었다.
“저희 팀에서도 눈여겨보던 시안입니다. 하지만 작곡에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요?”
몇 번이고 광고가 미뤄진 사안이었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광고를 만들어 발표해야 예약 구매나 다른 마케팅을 진행할 수 있을 테니.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내게 걱정은 없었다.
이미 치열이 틀어준 배기음을 듣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악보가 떠오르기 시작했으니까.
“한번 들어보시죠.”
뭐 하시려고?
치열의 눈에 호기심이 잔뜩 어렸다.
나는 말 없이 검은 피아노의 뚜껑을 열어 건반에 손을 올렸다.
기존 광고 영상을 재생함과 동시에 시끄러운 배기음이 방에 울려 퍼졌다.
내가 노린 것은 그 타이밍.
‘배기음을 베이스로.’
처음 배기음은 낮은 속도인 탓에 중저음으로 시작한다.
가히 웅장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선율.
그에 맞춰 내 생각에 따라 가상의 악보가 떠오르고, 나는 그에 맞춰 화음을 넣는다.
말발굽이 떠오르게끔 만드는 반복되는 선율.
화음이 더해지자 마치 자동차와 말이 경쟁하듯 소리가 퍼져나간다.
배기음이 단순히 소음처럼 들리지 않도록.
낮은음에서 펼치는 화음이 그 소리에 색깔을 덧입힌다.
이윽고 속도를 올린 차량으로 인해 배기음은 점차 소리가 고조된다.
‘소리에 따라 연주의 폭도 높아지도록.’
나도 지지 않고 옥타브를 올리며 연주를 이어간다.
이전보다 더욱 빨라진 선율.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말발굽 소리가 더욱 경쾌하고 강렬해진다.
그리고 일정 수준에 도달하여 소리가 유지되자 피아노 선율과 배기음의 소리가 자연스레 섞이기 시작한다.
마치 초고음의 아리아를 펼치는 가운데 반주가 깔리는 것처럼.
상상 속의 광고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음색을 펼친다.
광고 시안에 적어두었듯 경쟁하면서 진행되는 연주.
3분가량 이어진 짧은 곡조였음에도 순식간에 올라간 템포에 맞추느라 이마에 땀이 맺혔다.
“이 정도면 될까요?”
아무렇지 않게 치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는 안경도 벗은 채 눈을 끔뻑이며 나를 보고 있었다.
분명 들어올 때는 멀끔한 청년으로 보였건만.
입을 떡 벌린 그의 얼굴은 금붕어를 보는 것 같았다.
***
똑똑.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에 필무는 들고 있던 결재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조심스레 문을 들어온 사람은 총괄과 마케팅팀 팀장, 치열이었다.
필무는 부드러운 미소를 보인 채 치열을 반겼다.
“회장님. 박이안 씨와 미팅 다녀왔습니다.”
“수고했어요. 브리핑해보죠.”
치열은 고개를 끄덕이곤 곧장 서류를 꺼내 읊기 시작했다.
제시한 시안 중 하나를 이안이 마음에 들어 했다고.
이안이 선택한 시안을 바라보던 필무의 눈길이 매서워졌다.
필무도 눈여겨봤던 시안.
그것에 살을 덧댄 이안의 의견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좋네요. 곡을 제작하는 데도 걸릴 텐데.”
“그게… 이미 초안을 제시했습니다.”
“벌써?”
필무는 의아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지현에게 듣기로 이안 입국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그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가능성들이 스쳐 지나갔다.
미리 연락을 했고, 미리 시안들을 현철에게 제공한 상태였으니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리라.
그러나 치열이 내민 것은 그를 한 번 더 놀라게 했다.
“... 녹음까지?”
“예. 별도의 악보를 작성하지 않고 배기음을 듣고 곧바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필무의 흥미로운 기색에 치열은 곧바로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기존에 울려 퍼지던 배기음에 이안의 피아노 연주가 덧대어졌다.
분명 같은 배기음인데.
이안의 연주가 더해지자 배기음 선율이 악기에서 펼쳐진 새로운 소리 같았다.
필무가 원하던 울림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선율에 끌린 나머지 녹음 파일이 끝나자 필무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이거라고!”
호탕한 소리에 놀랄 만하건만.
치열은 이런 반응이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치열이 듣기에도 신세계인 선율.
평소에 소음처럼 느꼈던 배기음을 활용하여 이런 선율을 만들어낼 줄은 예상하지 못한 터였다.
그것도 즉석에서.
이안이 연주하던 것을 떠올리면 치열도 다시금 입술이 마를 지경이었다.
“곡은 이안 씨에게 맡기는 것으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안 씨가 먼저 제안한 것이 있었습니다.”
“제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생각했는데.
혹 후원과 관련된 것일까.
필무는 이안이 광고에 참여한다면 어떤 제안이든 충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제안을 얘기하는 치열의 표정이 사뭇 어리둥절하다는 듯 보였다.
“살리에리의 피아노? 그걸로 광고를 찍고 싶다고 했습니다.”
“살리에리?”
예술에 관심 많은 필무가 살리에리를 모를 리 없었다.
수많은 후배 양성에 힘을 기울인 오스트리아의 거장 아니었던가.
그런데 피아노라니…라고 생각할 무렵.
필무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한다.
클래식을 사랑하는 그이기에.
이미 유튜브에 퍼질 대로 퍼진 ‘팰리스 호텔 피아니스트’ 영상 속 이안의 행보를 모르지 않았다.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는데.
그러나 한 켠에 미묘한 걱정이 떠올랐다.
‘일본에서 그 피아노를 주려고 할까?’
그 물건은 유럽과 일본의 호텔 연맹을 체결하며 얻어낸 피아노이지 않은가.
일본에서도 좋은 도자기를 선물로 보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피아노를 대여하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 어려운 일이리라.
하지만, 호텔 측에 연락을 하자마자 지배인의 회신은 치열마저 당황하게 만들었다.
“박이안 피아니스트님이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언제가 가장 적합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