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예술은 가난하다.
악기를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돈이 나오지 않으니까.
마땅한 기틀이 없어서 예술을 포기하는 경우는 현생은 물론 전생의 기억 속에도 많았다.
이안 로크실트도 도련님이라는 후원체가 없었다면 피아니스트로서 살 수 없었을 테니까.
현대에도 후원 문화는 바뀌지 않았다.
지금도 기업에서는 사회공헌과 예술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예술가들을 후원하곤 한다.
경제적 여유가 생긴 예술가들은 자신의 기량을 더욱 크게 발휘하고.
그 덕에 더욱 좋은 음악, 좋은 그림, 좋은 예술을 탄생시킨다.
최근에는 앞선 후원 문화에 더해 한 가지가 더 추가되곤 했다.
‘새로운 컨텐츠 창출.’
좋은 예술 작품은 새로운 컨텐츠가 된다.
사람들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는 컨텐츠.
광고도 마찬가지였다.
주목받는 신예 아티스트와 콜라보한 광고로 성공한 사례는 지금도 회자되곤 했다.
퓨전 국악을 전문으로 하는 아티스트를 기용하여 국가 홍보 컨텐츠를 만든 것에 많은 국민들이 환호했었지.
아마 필무가 나에게 제안한 것도 그런 것일 테다.
“회장님이 네가 원하는 바를 최대한 수용해주시겠다더구나.”
통장에 찍힌 금액은 필무의 실행력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20대 초반에 쉽게 만질 수 없는 금액이었지.
하지만 그보다 내게 중요한 것은 이번 광고가 가지는 의의였다.
광고라는 수단을 통해 영감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내 행동반경을 넓힐 수 있으리라.
나도 유명세를 위해 유튜브를 활용했지 않았던가.
유튜브가 대중을 위한 투자였다면, 이번에 일을 맡은 것은 업계 사람들을 향한 투자일 테지.
강예진 감독님의 영화 음악에 참여한 덕에 애니메이션 거장, 미우와 연결되었듯.
서천 그룹을 활용한 발돋움은 국내는 물론 해외 광고 기획자들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다.
앞으로 위대한 피아니스트로서 나갈 수 있는 활로를 빠르게 개척할 수 있다는 것.
개인의 움직임보다 조직의 움직임은 더 공격적이고 거대하다.
기업과 함께했을 때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이점이었다.
‘게다가 자작곡 권한도 모두 준다고 했지.’
강 팀장이 전한 필무의 뜻.
저작권을 비롯해 내가 만든 광고 음악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하겠다는 것.
온전히 나의 작품으로 인정해줄 터이니 마음껏 곡을 써보라는 뜻이었다.
자작곡으로 독주회를 준비하려던 나에게는 그보다 좋은 조건은 없었다.
게다가 광고가 방영되면 곧바로 자작곡이 세상에 알려질 테지.
좋은 영감은 물론 자연스럽게 홍보까지 되는 것을 마다할 리 없었다.
‘운이 좋으면 애니메이션 개봉일과도 맞출 수 있겠어.’
미우가 시시때때로 애니메이션 진행 상황을 메일로 알려주곤 했다.
한 달 남짓이 지나서 개봉을 할 수 있겠다는 말을 덧붙였지.
아마 빠르게 녹음이 완료되어 편집 과정까지 거치면 비슷한 때에 광고가 나올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된다면 애니메이션 업계는 물론, 이번 광고 제작으로 광고 업계까지.
더 많은 기업에 러브콜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으로 콘티를 잔뜩 봤건만.’
비행기에서 본 콘티와 그 속에 들어갈 음원의 악보들은 대부분 훌륭했다.
수많은 실력자들이 만들어낸 콘티일 테니까.
개중에는 업계에서 유명하다는 작곡가들의 작품도 여럿 있었다.
직접 연주를 해보니 당장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하지만, 미묘한 이질감이 손가락을 자꾸만 멈추게 했다.
‘충분히 좋은 곡이지만, 배기음에 어울리는 선율은 아니야.’
아마 이런 광고는 경험해보지 못했을 테니까.
광고에서 필요한 선율을 잘 만들어낸 곡들도 있었지만, 나에겐 자꾸만 아쉬움이 일렁였다.
마치 어울리지 않는 두 쌍을 가져다 둔 느낌처럼.
내가 작곡을 했을 때도 그 미묘한 차이가 자꾸만 거슬렸다.
좀 더 배기음과 잘 합치되게 하려면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살리에리의 피아노를 떠올렸지.’
여전히 내 손에는 살리에리의 피아노를 만지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
오래된 탓에 건반이 다소 묵직했지만 도리어 그 덕분에 힘이 들어간 선율이 강렬하게 튀어 올랐지.
중후한 매력을 펼치던 살리에리의 피아노 선율이 여전히 귓속에서 맴돌았다.
당대의 조율을 최대한 재현해 놓은 산물.
현대의 피아노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무게감 있는 음색이 이번 곡의 핵심 포인트였다.
웅장한 배기음에서 터져 나오는 울림과 가장 흡사한 소리이기에.
피아노와 배기음.
두 개의 선율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음색을 표현하려면 살리에리의 피아노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그 속을 채우는 것은 내 몫이겠지.’
계약 조건도 훌륭하고, 악기도 정해놓은 상태.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곡을 완성하는 것이리라.
성치열 팀장과 미팅을 하고 일주일 남짓.
내 머릿속엔 완성을 코앞에 둔 오선지가 저장되어 있었다.
달려가는 말발굽 자국처럼 오선지에 찍힌 규칙적인 음표들.
단순히 악보의 형태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선율도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배기음이 없어도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지되, 배기음과 함께 들으면 하나의 오케스트라곡을 듣는 것처럼 장엄하게 들리게끔.
철저한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곡이 완성을 앞두고 마지막 태동을 시작한다.
Adagio.
조금은 편안한 선율로 시작하는 음색.
배기음을 강조하기 위한 광고에서 피아노부터 튀어나올 순 없으니까.
시작은 배기음의 웅장함을 더욱 강조한다.
피아노 선율은 조금 더 아래의 위치하면서.
하지만 배기음을 띄워주는 듯 잔잔한 선율을 방출한다.
차량이 점차 속도를 더하면 선율도 따라서 속도와 그 세기를 더해간다.
배기음이 차량의 바퀴가 돌아가듯 일직선으로 소리를 펼치면 피아노 선율은 말발굽처럼.
음표와 음표의 간격이 점차 줄어들면서 소리가 더욱 빨라진다.
‘단순히 커지는 게 아니라 달려나가듯이.’
선율은 어느덧 알레그로를 넘어 비바체로 향한다.
빠르고 활발하게.
날뛰는 야생마처럼 강렬한 선율이 배기음과 함께 나아간다.
처음은 약간의 불협화음으로 전혀 다른 노선을 가는 것 같았지만, 이제는 어느덧 배기음과 하나가 되어 선율이 이어진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속도전을 펼치다가 결국 동등한 선상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배기음이 커지면 피아노 선율도 따라 커지고.
차량이 공회전을 하여 역동적인 소리를 내뱉으면 피아노 소리도 덩달아 강렬한 화음을 떨어뜨린다.
마지막으로 차량이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일으키는 스키드마크를 멜로디 삼아 반주를 하듯 선율이 펼쳐지면 끝.
한 편의 경주를 본 것처럼 심장 한 켠이 벌렁거린다.
‘다섯 번째 자작곡.’
이제 화룡점정을 찍을 차례.
존재에 그쳤던 곡에 이름을 붙여줄 시간이었다.
머릿속에 그동안 만들었던 자작곡들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독주회에서 펼쳤던 자작곡, <환생>.
큰아버지의 은퇴 연주회에서 연주했던 <염라>.
그리고 카타리네 스튜디오 애니메이션의 OST로 만든 <환상>과 <추격>.
이번에는 배기음에 맞춰 달려가는 자동차를 표현한 곡.
자동차와 어울릴 수 있도록 말이 달려가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장렬하게 터져나가는 선율이다.
자동차와 말의 특성을 모두 갖추면서도 제목으로 적절한 단어 하나가 단박에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목 칸에 두 자리 단어가 새겨진다.
<질주>
다섯 번째 자작곡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곡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곧바로 회신이 왔다.
필무가 만나고자 한다고.
단순히 광고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여러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전했다.
서천 그룹 본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다소 가벼웠다.
“이제 쇼팽에 도전할 수 있겠구나.”
큰아버지가 내 계획이 훤히 보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청악 콩쿨에 이어 이번에 우승을 차지한 아시아 월드 피아노 콩쿨까지.
쇼팽 콩쿨에서 지정한 콩쿨에 2회 우승 기록이 생겼으니 쇼팽 콩쿨에 도전할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전 세계에서 모인 천재들이 서로의 연주를 펼치는 자리.
아마 히마리보다 더한 존재들이 나올 테지.
우승을 하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피아니스트라는 명망을 얻을 수 있으면서도 내게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리라.
하지만 쇼팽 콩쿨이 오려면 2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전까지 나의 커리어를 차근히 쌓는 것이 목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자작곡 독주회였다.
“이번에 만든 곡이 다섯 번째였지?”
독주회를 생각하고 있다는 말에 큰아버지는 크게 동조했다.
독주회는 일종의 발표회였다.
교수들이 논문을 발표하듯, 개인의 색깔이 담긴 연주를 펼칠 수 있는 장.
어디서 독주회를 펼치는지에 따라 커리어에 새겨지는 명망이 크게 달라진다.
특히 자작곡으로 이뤄진 독주회라면 이루 말할 수 없을 테지.
<환생>과 <염라>를 통해 이미 국내 음악계에서 내 다음 자작곡 발표에 대한 관심이 올라오고 있었다.
카타리네 스튜디오에서 자작곡을 만들었다는 소식에 사전 공개를 할 예정이 있냐는 질문이 들어올 정도였으니까.
현재까지 만든 곡은 <질주>를 포함해 모두 다섯 곡.
이제 절반 이상, 앞으로 3개의 곡이 남아 있었다.
“속도를 보아하니 충분히 할 수 있겠구나.”
<질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모두 지켜본 큰아버지였다.
그 또한 사뭇 놀랍다는 듯.
내가 곡을 만드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지.
큰아버지는 지금 속도라면 반년 안에 자작곡 독주회를 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벌써부터 그에 맞춰 대관을 알아보고 있다고.
누구보다 클래식 세계를 잘 알고 있는 큰아버지라면 최상의 무대를 찾아낼 것이다.
큰아버지와 독주회 관련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고 있던 찰나.
거리 한 켠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는 밴드가 눈에 들어왔다.
키보드와 기타, 젬베 등, 기본적인 악기로 선율을 만들어내고 있는 밴드.
무심코 듣는 것만으로도 박자를 맞추게 만들 정도로 빼어난 선율이었다.
“큰아버지. 시간 좀 있죠?”
큰아버지가 시계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떤 것 때문에 관심을 가지는지 이미 눈치챈 듯.
큰아버지도 어디 한번 보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빼어난 연주실력에 버스킹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보컬의 팔을 높게 들어 박수를 치자 몇몇 사람들이 호응하며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를 드럼 삼아 연주를 이어가는 모습에서 버스킹 경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내가 더욱 눈여겨본 것은 키보더의 연주였다.
“조금 튀는구나.”
이번에는 내가 큰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개개인의 연주도 훌륭하고 선율도 괜찮았다.
서로를 쳐다보며 타이밍을 맞추는 팀워크도 상당할 정도.
하지만, 피아노 선율이 과도하게 튀어나왔다.
단순히 소리 설정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강약을 조절하지 못하는 듯.
때론 보컬과 기타의 선율을 위해 한발 물러나줘야 하는데,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미세한 손가락 차이만 있으면 더욱 좋은 선율이 탄생할 텐데.
옅은 아쉬움에 입술이 꿈틀댔다.
“한마디 하고 싶으냐?”
그랬다.
개인의 기량이 충분히 좋은데.
아마 소리가 들어갈 타이밍을 보느라 세세한 부분을 놓친 듯 보였다.
버스킹은 장소에 따라 선율이 달라지기 십상이니까.
하지만, 내가 손을 대고 싶진 않았다.
“그냥 가죠.”
그들도 한 명의 예술가일 테니까.
어쩌면 의도한 것일 수도 있을 테지.
다 함께 연주하는 밴드라면 연주를 끝내고 함께 한마디씩 건넬 것이다.
어디에서 아쉬웠다, 어떤 부분이 좋았다며.
밴드를 이뤄 공연하는 사람의 가장 큰 매력은 그렇게 믿을 수 있는 팀원들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것일 테지.
그 매력을 반감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거침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고 다시금 길을 가려는데…
“저기 혹시!”
뒤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눈여겨봤던 키보더가 가쁜 숨을 쉬며 나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확신에 찬 눈빛을 장착하며 미소 지었다.
“맞죠! 피아니스트 박이안!”
“유라랑 콜라보한 그 피아니스트?”
외침에 가까운 키보더의 말에 다른 밴드 멤버들도 덩달아 소리쳤다.
키보더는 무척이나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라고 악수까지 청했다.
“안녕하세요! 허니레인의 박태양이라고 합니다!”
유튜브에서 많이 봤노라고.
이렇게 만날 줄은 전혀 몰랐다며 신난 기색을 여지없이 내비쳤다.
사람들이 뭉치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이 궁금한 듯 내 주변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저희 연주 어떠셨나요? 실례가 안 된다면 한 말씀 부탁드려도…”
도리어 피드백을 바란다는 듯.
어떤 이야기든 좋으니 해주면 좋겠다는 반응이었다.
시계를 바라보니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꽤 여유가 있었다.
“제가 느낀 대로 말씀드릴까요?”
내가 빙긋 웃으며 밴드에게 다가가자 그들을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아까 머릿속에 생각해뒀던 내용들을 그대로 표출했다.
다소 소리가 강렬했다고.
충분히 좋은 소리지만, 조화 면에서는 아쉬웠다는 말.
내 말에 곁에 있던 보컬과 다른 멤버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키보더는 내 피드백을 곧잘 따라 하면서도 유독 한 부분에서 소리를 자제하지 못했다.
화려함과 잔잔함을 넘나드는 선율.
잔잔한 상태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전의 화려함을 떨치지 못하고 자꾸만 커다란 소리가 새어나갔다.
“시범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키보더가 울상을 지었다.
그동안 연습했던 것을 단박에 뒤집긴 어려울 테니까.
그런 그를 향해.
나는 키보드 건반에 조심스레 손가락을 올렸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이 숨을 죽였고, 내 주행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