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나비>라는 제목을 가진 가요.
숱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말고 날개를 펴라는 가사가 일품인 곡.
가사에 담긴 메시지 때문에 졸업식 축하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는 자리에서 자주 펼쳐지는 곡이었다.
밴드 세션에 따라 약간의 편곡을 거쳤지만, 이미 내 머릿속엔 악보가 만들어져 있었다.
천천히 전주를 이어가자 이내 다른 악기들도 점차 곡조를 더해간다.
잔잔한 키보드 선율에 힘입어 일렉기타, 베이스, 등 여러 선율이 차곡히 쌓여간다.
보컬도 차근히 박자를 타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힘이 약해져야 하는 부분이 나올 때마다 키보더를 쳐다봤다.
바로 이곳.
말을 하는 듯한 강렬한 눈빛에 키보더가 마찬가지로 눈을 반짝였다.
마치 메시지를 던지는 것처럼.
장엄하게 선율이 퍼져나가지만, 그 위에 실린 가사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게끔 손에 들어간 힘을 도리어 회수한다.
그 힘을 보컬을 향해 전해주듯.
보컬을 향해 시선을 옮기자 보컬이 더욱 자신감 어린 눈빛으로 노래를 불렀다.
“널 세상이 볼 수 있게 날아 저 멀리~”
보다 완성도 높은 선율에 보컬은 물론 곁에 있던 다른 멤버들도 후련한 듯 미소를 지었다.
키보더도 이제야 뜻을 알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는 듯 해맑은 표정을 지은 채 끝낸 연주.
이에 화답하듯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앵콜! 앵콜!”
“박이안 대단하다!”
“노래 하나 더 해주세요!!”
난데없이 들린 내 이름에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고 있는 듯.
내 이름이 자꾸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콩쿨장에서 사인을 부탁받은 것 이후로 처음 아닌가.
최근 신경 쓰지 않았던 유명세를 그대로 느끼는 것은 무척이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키보더도 한 명의 관객으로서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훌륭한 공연이 되었어요.”
“아닙니다. 다른 팀원들도 대단하던데요?”
진심이었다.
나 또한 연주를 이어가면서 감탄할 정도.
다른 사람이 연주를 이으면 당황할 법도 한데 그들은 전혀 그런 내색 없이 자연스레 연주를 이어갔다.
음악만 있으면 충분히 소통이 가능하다는 듯.
금세 내가 펼친 선율에 적응한 듯 미묘하게 힘 조절을 한 채 서로의 소리를 존중하며 음색을 펼쳤다.
다음에 이런 무대도 가져보면 좋겠다.
새로운 방식의 무대에 가슴 한 켠이 꿈틀댔다.
리더로 보이는 보컬 담당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혹시 영상을 촬영했는데, 유튜브에 업로드해도 될까요?”
그는 한 켠에 있던 카메라를 가리켰다.
아마 버스킹을 하면서도 홍보 목적으로, 기록을 남기기 위해 활용한 것일 테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업로드되면 보겠다는 말을 덧붙이자 그들은 허리를 숙여가며 감사 인사를 더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중에 성공하면 꼭 갚을게요!”
패기 어린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단순히 다짐하는 것이 아닌.
그들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키보더는 이보다 좋은 인연이 없다며 키보드에 조심스레 사인을 요청했다.
박이안.
여전히 이름 석 자로 된 담백한 사인이 키보드 본체 한 켠에 담겼다.
“이안님! 저도 사인해주세요!”
키보드에 사인을 하는 모습에 내 이름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자신도 사인을 해달라며 소리쳤다.
밴드 리더는 답례라도 하고 싶은 듯 펜과 종이 몇 장을 가져왔다.
다소 투박하게 보일 수 있는 사인들을 연신 건네자 몇몇 팬들이 연주를 더 해줄 수 없냐고 물었다.
실물로 보니 정말 신기하다고.
영상으로만 보던 연주를 직접 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아직 미팅까지는 여유가 조금 있는 시간.
연주를 아껴봤자 좋은 것은 없으니까.
내게도 직접 사람의 반응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터.
“키보드 한 번만 더 빌릴 수 있을까요?”
“아휴 영광이죠!”
사인을 어루만지던 키보더는 곧바로 자리를 양보했다.
리더는 자신이 쓰던 마이크까지 건네며 무대를 마련해주었다.
툭툭.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한 나는 간단한 인사를 전했다.
“안녕하세요.”
와아아아.
순식간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어떤 곡을 연주할지 기대된다는 듯.
나를 향한 시선들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서도 같은 질문이 오갔다.
어떤 연주를 할 것인지.
잠깐 생각을 하던 나는 좋은 생각인 난 듯 빙긋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공개하네요. 이번에 애니메이션 영화 OST를 맡았거든요. 거기에 나오는 제 자작곡을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더 큰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밴드 멤버들 몇몇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린 채 나를 바라봤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유명 애니메이션 영화 수록곡.
첫 무대가 자신의 밴드 무대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짧게 설명을 덧붙인 나는 곧바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환상>
미지의 숲에 대한 선율에 사람들이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었다.
자작곡을 쓰면서, 연습을 하면서, 카타리네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할 때까지.
수십 번은 더했던 연주였음에도 이번에는 묘한 감성이 떠오른다.
연주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길이 전달돼서일까.
덩달아 내 심장도 박동을 더해가며 손에 힘을 전달한다.
***
“편하게 앉으시죠.”
필무는 나와 큰아버지가 들어서자 곧장 밝은 미소를 머금었다.
깔끔하면서도 중후한 회색빛으로 꾸며진 회장실.
필무의 책상에는 결재서류들과 여러 시안들이 있었다.
수많은 시안들을 모두 직접 확인할 정도라니.
그의 세세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처음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청악 후원도 거절했다고 들었으니까.”
그의 말에 청악 악기사에서 정식 후원을 권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후원의 개념은 나를 구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하고 싶은 연주를 펼치는 일.
이미 든든한 후원자인 아버지가 있으니 그 이상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후원은 단순히 돈의 영역이 아니었다.
“아저씨가 많이 배려해주신 덕분이죠.”
큰아버지가 내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원 제안서를 읽어보면서 이보다 좋은 제안은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서천 그룹과 협업하며 만들어낸 창작곡에 대한 권한은 모두 나에게 준다고.
내가 일부 조건을 수용해야 한다는 항목도 없었다.
마치 모험을 떠나는 나에게 거대한 배 한 척을 지원해주는 것처럼.
그것도 글로벌 역량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난 서천 그룹의 지원이다.
클래식계는 물론 관련 업계까지.
서천의 지지가 있다면 어떤 무대라도 충분히 이뤄낼 수 있었다.
오로지 내 예술 활동에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겠다는 내용에 큰아버지마저 신기하게 봤을 정도니까.
“회장님이 정말로 너를 아끼나 보구나.”
큰아버지의 확신은 지금 필무와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온기 어린 필무의 눈길.
단순히 어릴 적부터 본 이웃을 대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한 명의 예술가를 대하는 눈빛.
“더 이상 예술성 없는 컨텐츠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서천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필무의 눈길이 날카로웠다.
방금까지 온화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냉정한 이야기가 오간다.
서천의 간판.
모든 마케팅은 이제부터 예술로서 승화되어야 한다고.
광고 또한 창작물임과 동시에 이제는 눈이 높아진 고객을 위해선 단순 정보 전달로 고객을 유치하기엔 어렵다고 덧붙였다.
그 시작을 나로 끊고 싶다는 뜻을 강력하게 전해왔다.
서천 그룹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자동차 사업에 나를 넣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이안이 너도 예술을 중요시하니 잘 알겠지? 아니면 광고 제안에도 응하지 않았을 테니까.”
냉정하게 얘기하던 필무가 이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에 맞춰 나 또한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홍보 목적으로 나를 활용하려는 기색이 보였다면 이 광고에도 응하지 않았으리라.
자동차의 배기음을 어떻게 하면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을까.
시안에서 드러나는 고민을 보고 이번 광고를 채택했던 나였다.
그 고민에 화답하듯 배기음에 덧댄 선율을 상상했고, 그 결과 <질주>를 만들어냈다.
내 유명세를 활용하려는 것이 아닌 예술성으로 광고를 어떻게 탈바꿈시킬지 기대된다는 듯.
필무의 눈길에 묵직하게 다가왔다.
“아, 그리고 늦었지만 아시아 월드 피아노 콩쿨 우승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딸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지현이 내 얘기를 많이 한다고 덧붙였다.
덕분에 카타리네 스튜디오에서 활약했다는 것과 콩쿨 우승, 호텔에서 펼쳤던 연주에 대한 것까지 들었다고.
연주를 듣는 순간, 내가 살리에리의 피아노를 원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했다.
“거의 유물에 가까운 귀중품인데 곧잘 연주를 해내더구나.”
필무의 입에서 살리에리에 대한 정보가 술술 흘러나왔다.
무려 200년 전의 피아노라고.
슈베르트, 베토벤 등 오스트리아의 거장들을 만들어낸 살리에리를 모를 수 없었다고.
그의 피아노로 연주하고 싶다는 의견에 소름이 돋았다고 전했다.
오랫동안 예술을 탐닉해왔던 그 또한 처음 듣는 선율이었다고.
미리 보내준 샘플에서 흘러나오던 곡이 살리에리의 피아노와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하다는 눈치였다.
“네 이름을 대니 지배인이 일사천리로 진행해주더구나. 미리 언질을 해놓은 거니?”
팰리스 호텔에 먼저 이야기를 꺼내자고 한 것은 나였다.
악상을 떠올리는 순간부터 살리에리의 피아노를 떠올렸으니까.
내 연락을 받은 지배인은 언젠가 있을 줄 알고 미리 준비를 해뒀다고 표현했다.
어디로 전달하면 될지 묻는 질문에 나는 곧바로 서천 그룹의 이야기를 꺼냈다.
서천 그룹에서 사람이 올 것이라고.
-서천 그룹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지배인의 목소리는 경외감이 어려 있었지.
세계에도 손을 뻗은 서천이었으니까.
그 자리에서 거대기업의 존재가 나타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대단한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지는 몰랐다며.
뛰어난 예술가를 알아본 안목을 본받아야겠다는 칭찬을 덧붙였다.
서천의 저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모든 준비가 다 끝났으니 옮길 준비만 하면 된다고.
“일주일 안에 올 수 있을까요?”
어서 살리에리의 피아노로 연주를 펼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질주>는 완성본이었지만, 거장의 피아노가 더해지면 어떤 시너지를 일으킬지.
그 미묘한 음색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차이점을 몸소 느끼고 싶었다.
더 큰 예술을 원하는 내 모습을 본 필무는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푸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루면 충분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