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69화 (69/250)

69화

“... 정말 기대 이상이로군요.”

녹음 파일을 건네받은 편집자가 이안의 연주를 듣고는 신기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그 또한 서천 그룹에서 오는 모든 영상의 디렉팅을 맡은 인물.

오랜 시간 숱한 음악을 들어본 사람이었다.

게다가 필무가 원하는 예술성이 담긴 음악을 잔뜩 들은 터.

“회장님께서도 영상이 무척 기대된다고 하셨습니다.”

치열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갈 줄 몰랐다.

지금까지 서천 그룹의 마케팅을 총괄하면서 이보다 매끄러운 진행은 없었다.

일주일 만에 곡을 완성해서 보내준 것은 물론, 녹음도 일사천리.

보통 녹음이라 함은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짧아도 2~3일, 길면 일주일도 넘게 걸리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안은 단 하루 만에 녹음을 완수한 존재.

치열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이안의 연주를 듣고 있는 편집 엔지니어의 표정은 무척 심각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녹음 엔지니어가 각오하라는 말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요.”

각오?

치열도 녹음 현장에 있었기에.

녹음 엔지니어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분명 연주는 무척이나 매끄럽게 흘러갔고, 녹음 담당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지 않았던가.

살리에리의 피아노를 가져온 것도 녹음 담당자의 큰 호응을 얻었었지.

자신이 녹음한 소리 중에 이런 소리는 없었다며.

가장 적합한 소리를 찾아온 이안이 신기할 지경이라고 덧붙이지 않았던가.

모든 것이 말끔하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왜 편집 엔지니어가 세상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이안 씨가 즉석에서 제시한 두 곡 때문입니까?”

광고 시안은 단 하나로 이뤄지지 않는다.

예비 후보 시안이 존재하는 것은 물론, 같은 광고를 과도하게 반복하면 고객들이 질려 할 수 있었기에.

최소 3개의 영상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안이 맡은 광고도 그 규칙에 자유로울 순 없었다.

게다가 이미 이안도 알고 있던 부분.

하지만, 곡은 하나만 만들었기에.

이안은 다른 대체 방안을 제시했었다.

“키를 달리해서 영상에 맞춰 연주하도록 하죠.”

영상 속 자동차는 같은 배기음을 베이스로 만들었지만, 배경은 달랐다.

건물이 빽빽한 도시 한가운데, 바로 옆이 해변인 해안가 도로, 회전초가 날릴 법한 서부의 아우토반까지.

배경에 맞춰 음색을 조금 달리하겠다고.

같은 곡이지만, 음정만 바꾼다고 했다.

곧장 연주를 펼치는 면모에 한 가지 곡이 아닌 세 가지 곡을 준비했다는 착각이 일 정도니까.

하지만, 편집 엔지니어는 그게 가장 무서운 부분이라고 했다.

“이걸 보시죠.”

엔지니어는 편집실 한 켠에 있던 기타를 꺼내 들었다.

두루룽.

차례대로 줄을 튕기자 자연스레 선율이 나아갔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기타와 다를 바 없었다.

이윽고 엔지니어는 카포라는 집게를 가져오더니 기타 현이 펼쳐진 수많은 칸들 중 하나에 꽂았다.

다시금 기타 줄을 튕기자 이번에는 한층 더 소리가 밝아졌다.

치열은 차이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이 올라갔군요.”

치열의 반응에 편집 엔지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악기는 이렇게 줄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음이 올라간다고.

그래서 현악기는 음의 높낮이를 바꾸는 것이 비교적 쉬운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건반을 보시면 알 겁니다.”

편집 엔지니어가 컴퓨터 화면에 피아노 건반을 띄웠다.

하얀 건반과 검은 건반이 어우러진 피아노 본연의 모습.

처음 치열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편집 엔지니어가 설명을 덧붙이자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얼어붙었다.

“피아노로 키를 올리려면 정해진 간격만큼 음을 올려야 합니다. 하지만, 보십쇼. 검은 건반이 군데군데 끼어 있는데다가 두 군데는 검은 건반이 없습니다.”

엔지니어의 말대로 피아노 건반은 미와 파, 시와 도가 있는 부분에는 검은 건반이 없었다.

즉, 피아노에서 키를 올리고 낮추는 것은 간단히 손가락 위치만 바꾼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변경되는 높낮이에 따라 본래 검은 건반을 눌러야 하는 부분이 하얀 건반을 눌러야 하게끔 변하고, 반대로 하얀 건반을 누르는 부분이 검은 건반을 누르는 부분으로 바뀐다.

그야말로 전체 곡을 수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작업.

그런데 이안은…

“그 청년은 이 작업을 즉석에서 해낸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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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를 유튜브에 업로드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치열이 흥분감을 내리지 못하고 소식을 전했었지.

현존하는 서천 그룹의 광고 중 가장 빠른 증가세라고.

기대 이상의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ㄴ 소리 미쳤다.

ㄴ 박이안 진짜 천재 맞는 듯… 어떻게 소음을 조합할 생각을 했지?

ㄴ 도로에서 배기음 들을 때마다 짜증 냈었는데, 이건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듦.

ㄴ 장인은 도구 탓하지 않는다는 게 진짜였어.

.

.

쏟아지는 댓글들.

대부분 배기음을 선율로 활용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소음에 불과하던 소리에 피아노를 입히니 전혀 다른 소리인 것 같다고.

그렇다고 피아노가 배기음을 완전히 압살하지 않고 동등한 기세로 나아가는 것이 신기하다고 덧붙였다.

의도한 바가 정확히 전달되었구나.

‘영상 편집도 적절하게 됐네.’

독일의 아우토반을 연상케하는 도로.

조용하던 초원에서 은은하게 펼쳐지는 배기음이 순식간에 다가온다.

그와 합세하여 피아노 선율이 들어오면 이를 듣는 운전자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차를 클로즈업하다가 반대로 멀리서 조명하면서.

역동적인 차의 움직임에 따라 <질주>의 선율이 더욱 선명해진다.

마지막에 작렬하는 화음은 급브레이크 소리마저 하나의 음색으로 들리게 만들었다.

“독창적인 소리라는 반응이 대다수입니다.”

지금껏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선율이라고.

치열은 독창적인 선율에 업계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고 덧붙였다.

업계에선 벌써부터 광고를 벤치마킹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고.

내가 한 것처럼, 기존의 제품과 어울릴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데 기를 쓴다고 했다.

다만, 도저히 선율을 따라 할 수 없어 나와 만남을 주선해달라는 부탁이 연이어 오고 있다고 했다.

더 많은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는 말에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성공적인 투자였네.’

기업이 내게 투자를 하듯.

나도 기업을 향해 내 능력을 투자한다.

앞으로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더 넓은 세상에 내 이름을 알리고 곡을 펼치려면 더 높고 큰 무대가 필요할 테니까.

기업을 등에 업고 나아갈 활로를 개척하려고 했던 일들이 성공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업계를 비롯해 대중들에게서도 좋은 반응이 나오고 있으니.

광고가 흥행한 것만으로도 투자 성과는 증명된 셈이다.

이번 일로 내 이름은 물론, 내가 만들어낸 곡에 대한 이야기도 빠르게 퍼져 나갈 테지.

이미 치열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광고 제작자들이 줄을 이었다고 전하지 않았던가.

결국 기업에 대한 광고이기도 하면서 나에 대한 광고.

차후에 독주회를 연다는 소식을 전하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쉬우리라.

게다가 내 의도를 짐작한 듯, 큰아버지는 한술 더 떴다.

“독주회에 어울리는 쪽으로 선별해두마.”

처음엔 단순히 자작곡을 위한 영감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질주>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으니까.

거기에 더해 큰아버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 콜라보가 가능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번에 한 것처럼 자작곡에 대한 영감은 물론, 독주회에 필요한 협찬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러한 점을 잘 활용하면 독주회가 더욱 풍성해질 것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 독주회는 물론 다른 무대의 기회도 주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말까지.

예정된 수순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 한 켠이 웅장해진다.

“아, 그리고. 카타리네 스튜디오 측에서 연락이 왔다.”

큰아버지는 미우가 보낸 메일을 읊어주었다.

애니메이션 시사회 일정이 잡혔다고.

완성된 영상을 선보일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는 미우의 기대감이 잔뜩 들어간 메일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시사회 초대장을 직접 주고 싶다고.

한국행을 택했다는 미우의 소식이 들어있었다.

***

“しつれいします(실례하겠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가 조심스레 집으로 들어왔다.

그의 곁에는 빨간 안경테를 치켜세운 와타나베도 있었다.

나카무라 미우.

일본의 애니메이션 거장이자, 이번에 내가 만든 곡을 OST로 활용한 애니메이션의 제작자.

그는 나를 보자마자 손을 꼬옥 잡으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만든 곡 덕분에 작업을 하는 내내 너무 행복했다고.

자신이 원했던 환상이 그대로 펼쳐지는 것 같은 선율에 작업할 때마다 항상 OST를 틀어놓고 작업했노라고 덧붙였다.

“시사회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먼길을 오셨습니다.”

시사회까지 2주 남짓.

시사회 기한이 조금 남았는데도 미우는 기어코 한국행을 택했다.

나와 직접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노라고.

내게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와타나베는 가방에서 서류를 하나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시사회 때 진행할 프로그램을 제안드리고자 먼저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미우는 직접 제안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단순히 서면으로 합의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진심을 다해 요청하고 싶었다고.

그것이 흔쾌히 OST를 만들어주고, 일본에서 녹음까지 해준 나에 대한 예우라고 덧붙였다.

나는 와타나베가 건넨 서류를 차근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대부분 일정은 일반적인 시사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간단한 소개 멘트를 한 뒤,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문답.

그리고 완성된 영상을 보는 것까지.

지난번 강예진 감독님의 영화 시사회처럼 일반적인 시사회였다.

뒤에 있는 추가적인 내용만 제외하면.

“애니메이션 상영 후 라이브 공연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미우가 설명을 이었다.

1차, 2차 예고편에 나온 나와 히마리의 연주에 대해서 사람들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반응이 뜨거운 만큼 이를 활용한 컨텐츠를 기획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처음 애니메이션을 보여준 후, 애니메이션 속 주요 곡들을 라이브로 들려준다.

영상에서 나온 곡을 직접 들으면 관객들이 느낄 감정도 배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더 나아가 큰 홍보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히마리는 이미 참여 의사를 밝혔다고.

내 의사를 물어보기 위해 한국행을 택한 것이었다.

“애니메이션을 보러 온 사람들일 텐데, 연주회가 도움이 될까요?”

“물론입니다.”

애니메이션 명가(名家)임과 동시에 음악 명가라고 불리는 카타리네 스튜디오.

영화를 보지 않아도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수록곡 앨범이 매진이 되는가 하면, 카타리네 애니메이션 수록곡 메들리가 인터넷에 올라온 정도라고.

나도 들은 기억이 있다.

게다가 카타리네 스튜디오에서 일본 유명 관현악단과 콜라보한 곡은 큰 인기를 끌었지.

카타리네 특별 연주회라는 이름으로 연주회 전체를 카타리네 스튜디오의 곡으로 꾸민 것도 한국에서 큰 화제였다.

“연주회로 음악을 좋아하는 관객들을 더욱 사로잡을 수 있겠군요.”

미우가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본래 음악으로 유명한 카타리네 스튜디오니까.

게다가 이번 곡이 한국과 일본의 신예 피아니스트가 만들었다는 사실에 이목이 집중된다고 했다.

나와 히마리가 함께 무대로 나서서 직접 연주를 하고, 그것을 홍보한다면 시너지는 엄청날 것이라고.

미우는 그래서 더욱 기대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들의 제안은 내게도 무척 좋은 제안이었다.

‘내 존재감을 각인시킬 수 있는 무대가 생기는 거니까.’

단순히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실로는 충분한 화제성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참여 사실은 물론, 그것을 직접 보여줄 수 있는 무대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리라.

지금은 콩쿨 우승과 천재 피아니스트라는 호칭으로 떠올랐지만, 이와 비슷한 존재가 나타나면 흐려질 테니까.

그러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눈도장을 찍어놓는다면 일본에 내 연주를 더욱 각인시킬 수 있겠지.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명가, 카타리네 스튜디오의 무대라면 더더욱 강할 것이다.

다시금 일본으로 갈 생각에 내 눈에 총기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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