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환영합니다, 이안 씨. 저는 팰리스 호텔의 CEO, 모리 사유라고 합니다. 편하게 모리라고 부르십쇼.”
다시 찾은 일본.
팰리스 호텔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CEO가 직접 나를 반겼다.
멀끔한 하얀 정장 차림에 기품이 느껴지는 여인.
그녀는 귀빈을 맞이하기 위해 직접 왔다고 덧붙였다.
“이안 씨의 연주를 저희 팰리스에서 담을 수 있었던 것은 큰 영광이었습니다.”
모리의 눈길이 살리에리의 피아노로 향했다.
지난번에는 로비 한구석에 있었는데.
이제는 호텔 로비 중앙에 비치되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피아노를 보러 호텔에 오는 손님도 있을 정도라고.
내 덕에 VIP들의 신임은 물론 호텔 매출도 큰 폭으로 뛰었다고 전했다.
“지난번에 다소 무례할 수 있는 요청에도 넓은 아량을 베풀어주어서 감사했습니다. 이번에는 그럴 일 없도록 전체 층을 비워두었습니다.”
전체 층을?
부모님을 비롯해 이번에는 큰아버지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팰리스 호텔 34층.
가장 전망이 좋은 층 전체를 우리에게 제공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번에는 연주를 들려달라는 요청이 없을 것이라고, 나와 부모님, 큰아버지의 방을 각각 준비해뒀으니 그저 편안하게 호텔 라이프를 즐겨 달라고 덧붙였다.
“완전 프라이빗 서비스네요.”
내가 빙긋 웃으면서 말하자 모리 또한 지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요청만 하라고.
내가 그들의 요청을 들어준 것처럼, 어떤 서비스가 되었든 이뤄줄 수 있다고 자신했다.
에스코트를 자처한 모리가 부모님과 큰아버지를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마지막.
모리가 내가 묵을 방문을 열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콩쿨 때 묵었던 방과 같은 방.
스카이트리와 도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방이었다.
게다가 그때처럼 고급 그랜드피아노가 방 안에 비치되어 있었다.
“시사회 때 연주회를 겸한다고 들었습니다.”
마음껏 연주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모리는 원한다면 살리에리의 피아노도 올릴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편안하게 쉬십시오.”
모리가 우아하게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갔다.
나는 침대 곁에 캐리어를 밀어내고 넓은 창 너머 도쿄를 바라보았다.
콩쿨을 앞두고 똑같이 바라본 풍경이었건만.
지금은 미묘한 감정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환상>과 <추격>으로 관객과 마주하기는 처음이니까.
기대감에 어린 손가락이 자연스레 피아노로 향했다.
***
시사회는 일반 영화 상영관이 아닌 극장에서 치러졌다.
상영이 끝난 후 있을 라이브 무대를 위해 카타리네 측에서 특별히 대관한 곳이었다.
일반 상영관의 두 배나 되는 인원이 들어올 수 있는 극장.
그럼에도 시사회 현장은 인파로 넘쳐났다.
전석이 모두 매진됐다고.
“인기가 엄청나네요.”
“허허. 모두 이안 씨의 효과 아니겠습니까.”
미우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내 덕이라고 치켜세웠다.
내가 시사회에 등장한다는 기사가 뜨자마자 티켓 판매 속도가 배로 뛰었다고.
게다가 내 출연으로 인해 한국에서 온 손님이 많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그럴까.
관객석에 앉은 사람들 중 군데군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게다가.
‘강 감독님, 유라, 요한나까지.’
신묘한 조합의 사람.
익숙한 사람들이 관객석에 앉아 있었다.
나와 함께 온 부모님과 큰아버지는 당연할 테고.
강 감독님도 미우의 초대로 왔다며 아는 체를 했다.
유라도 카타리네 스튜디오 작품의 팬이라며 문자를 보냈었지.
빈 필의 피아니스트, 요한나의 등장은 정말로 예상외였다.
그녀 또한 자라오면서 일본 거장의 애니메이션을 즐겨보았다고.
카타리네 특유의 분위기를 내 연주로 어떻게 녹여냈을지 기대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거물들의 출연으로 인해 카타리네 스튜디오 소식을 취재하려고 왔던 일부 기자들이 카메라를 관객석으로 돌렸다.
미우의 초대로 온 일본 내빈을 비추던 카메라마저 내 손님들을 향할 정도.
하지만 미우는 그런 모습에 도리어 웃음을 터뜨렸다.
“이안 씨 덕에 우리 애니메이션이 더욱 흥하겠습니다.”
미우가 특별히 심혈을 기울인 애니메이션.
그 때문에 그의 눈망울엔 평소와 다른 기운이 어려 있었다.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 같은 눈.
많은 이들의 기대를 한가득 담은 애니메이션 시사회가 시작됐다.
미우를 시작으로 카타리네 스튜디오 식구들이 인사를 건넸고, 나에게 마이크가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이번 애니메이션에서 일부 OST를 맡은 박이안이라고 합니다.”
간단한 소개만으로도 터져 나오는 박수.
객석 한 켠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길들이 여지없이 느껴졌다.
흐뭇하게 바라보는 부모님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큰아버지는 여전히 강직한 채 입술을 다문 채 박수를 이어갔고, 유라와 요한나도 밝은 미소를 머금은 채 박수를 보냈다.
시사회가 진행되는 동안 통역을 담당한 와타나베가 쉴 새 없이 MC와 식구들의 이야기를 통역했다.
“이번 작품, 미우 선생님께서 무척이나 심혈을 기울이셨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제 어릴 적 공상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 상상해왔던 것을 이제야 펼치게 되었군요.”
재치있는 이야기를 꺼내는 미우의 모습은 거장의 면모와 함께 동심을 가득 품은 아이와 같았다.
요즘 들어 볼 수 없는 반딧불이를 떠올리며 작품을 만들었다고.
그리고 줄어드는 숲과 파괴되는 자연환경 속에서 경쟁만으로 나아가는 현시대 사람들이 안타까웠다고 덧붙였다.
조금 더 낭만 있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자신에게 부족한 낭만을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채워줬다며 나와 히마리에게 공을 돌렸다.
다른 카타리네 식구들 또한 음악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빠르게 진행된 질의응답에 따라 어느덧 내 차례가 왔다.
“이안 씨의 참여도 무척 화제가 되었는데요. 미우 선생님이 직접 초빙하러 한국행을 택하셨다고요.”
“네. 무척 열의가 넘치셨습니다.”
실제로도 그러지 않았던가.
직접 찾아와서 곡을 제안한 것은 물론, 이번 시사회 프로젝트도 직접 와서 제안할 정도였으니.
게다가 내가 곡을 만드는 중간중간에도 곡 제작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콘티를 제공한 사람.
나와 같은 예술가의 면모에 곡을 만드는 것이 즐거웠지.
내 언변에 미우가 감사한 듯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MC의 질문이 몇 차례 반복됐다.
그중 내가 참여한 OST에 대한 질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2번째 예고편에 나온 <환상>이 벌써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고.
어떤 마음으로 곡을 썼는지 간략한 설명을 부탁했다.
“미우 선생님의 콘티를 음악으로 바꿨을 뿐입니다.”
특별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환상>이라는 제목처럼 미우가 만들어낸 환상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니까.
그 방법을 내가 만들었을 뿐.
콘티를 보는 것만으로도 환상적이었다는 말을 덧붙이자 MC가 무척 기대된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이안 씨의 말만 들어도 무척 기대가 되는군요.”
MC의 미소에 나도 똑같이 밝은 표정으로 화답했다.
질의응답이 모두 종료되자 나를 비롯한 식구들도 관객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극장이 점차 어두워지는 가운데 MC가 애니메이션에 대한 소개를 올렸다.
“그럼 카타리네 스튜디오의 신작, ‘반딧불숲의 환상화’ 관람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영사기가 스크린을 향해 빛을 쏘자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반딧불숲의 환상화.
죽어가는 목숨도 살릴 수 있는 환상화를 찾기 위해 미지의 숲인 ‘반딧불숲’에 들어서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애니메이션.
친구를 살리기 위해 주인공이 반딧불숲으로 들어서면서 미우가 만들어낸 환상 세계가 펼쳐진다.
‘진짜 콘티가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기분이야.’
미우가 그린 그림들이 그대로 스크린에서 튀어나온다.
반딧불숲은 낮에는 그저 평범한 숲이지만, 밤만 되면 잎사귀에서 푸른 빛이 발현되는 신비한 숲이다.
말도 안 되는 현상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환상>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의심 가득한 눈길처럼 조심스러운 선율.
주인공의 발걸음이 나아갈수록 <환상>의 선율에 더욱 힘이 실리기 시작한다.
숲으로 들어갈수록 형형색색의 나무들이 등장하고, 그에 따라 선율에 화음이 더해져 웅장하게 퍼져나간다.
‘시너지가 엄청난데?’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웅장한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마치 내가 반딧불숲에 들어선 것처럼.
장엄한 기운과 더불어 <환상> 속에 숨겨둔 바람 소리와 풀벌레 소리들이 더해진다.
OST를 제외한 모든 소리가 사라지자 선율이 더욱 강조되어 극장에 울려 퍼진다.
<추격>도 마찬가지.
가까스로 환상화를 찾은 주인공을 따라잡는 빌런들이 나타나자 강렬한 선율이 퍼져나간다.
게다가 빠른 템포의 선율과 느린 템포의 선율을 나눠둔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내 의도를 파악한 음악감독이 소리를 적재적소로 편집해 넣자 영상을 보는 내 손에도 절로 힘이 들어갔다.
빠르게 전개되던 <추격>이 주인공이 몸을 숨길 때마다 거침없이 끊긴다.
그럴 때마다 관객석에서 ‘헙’ 하며 숨 참는 소리를 낸다.
‘다들 눈을 떼지 못하네.’
음악에 더불어 빼어난 영상미에 사람들은 시시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다.
추격 장면에서 숨을 참거나, 환상적인 화면에 조그맣게 감탄사를 내뱉거나.
미우의 그림에 더불어 환상으로 초대하는 선율에 힘입어 사람들이 뭔가에 푹 빠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영상이 끝나자 사람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내왔다.
감동한 듯 웃는 사람들과 더불어 아쉬운 듯 옅은 울상을 짓고 있는 사람들.
사람들이 박수 치는 틈을 타 스태프가 조심스레 다가와 나를 인솔했다.
“이안 씨, 무대 준비하시죠.”
스태프를 따라 무대 뒤로 돌아가자 그곳에는 미리 준비해둔 그랜드피아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크린 뒤에 비치된 피아노.
스크린 너머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전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베일을 두른 무대에서만 연주를 했던 전생의 기억.
피아노 앞에 앉으니 독주회를 앞둔 것처럼 심장에서 기대 어린 박동을 보내온다.
스크린 너머에서 MC의 진행과 함께 연주회 소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사회를 찾아주신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 바로 ‘반딧불숲의 환상화’ OST들을 라이브로 들어보실 텐데요! 먼저 이안 씨의 연주를 감상해보시죠!”
MC의 소개가 끝남과 동시에 기계음이 들리더니 스크린이 말려 올라가기 시작한다.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관객들.
스크린이 완전히 올라가자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가 터져나온다.
온전히 관객들이 보이자 내 심장 한 켠에서 열의가 불타올랐다.
자연스레 피아노 건반에 올라간 손이 빠르게 움직인다.
편집되지 않은 날것의 연주.
두 곡이 내 손에 의해 극장에 퍼져나간다.
연주를 이어가며 내 시선이 자연스레 관객석으로 향했다.
‘다들 눈을 감고 있어.’
애니메이션을 볼 때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사람들.
이번에는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감은 채 연주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조금씩 달랐다.
마치 저마다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무언가 좋은 상상을 하는 듯 입가에 옅은 웃음기를 머금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상을 찌푸린 채 강한 무언가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각자가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
미우가 애니메이션에 상상의 나래를 펼쳤듯.
나는 음악에 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리고 이제는 영상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다른 사람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미우의 콘티를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든 <환상>과 <추격>.
이제는 두 곡이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박자를 맞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처럼 보였다.
연주를 끝내자 사람들은 제각기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린 사람처럼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향해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