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방금 전만 해도 눈을 감고 있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일제히 기립박수를 쳤다.
일부는 환호성까지 터뜨리며.
저마다의 방식대로 열렬한 성원을 보내왔다.
누군가는 손에 힘을 주어 박수를 치고, 누군가는 손을 동그랗게 모아 함성을 지른다.
그들의 얼굴 속에서 감정들이 속속 튀어나온다.
기쁨, 기대, 행복감.
마치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했다는 만족감이 드러나는 얼굴.
그들의 밝은 미소에서는 고양감마저 느껴졌다.
“앵콜! 앵콜! 앵콜!”
사람들의 앵콜 세례는 끝날 줄 몰랐다.
새로운 연주를 보여달라는 요청처럼.
내 머릿속에 관객들을 바라보며 느꼈던 심상들이 떠올랐다.
영감을 얻어 각자가 느끼는 바를 고스란히 드러내던 표정들.
관객 하나하나의 표정이 다시금 나에게 새로운 영감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평소와는 묘하게 그 감각이 달랐다.
머릿속에 가상의 오선지가 그려지고, 그 음표가 떠오르는 것은 평소와 비슷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 색채가 추가됐다.
사람들의 얼굴 색깔이 미묘하게 다르듯, 같은 동양인의 눈이더라도 누군가는 조금 검고, 누군가는 갈색이 더욱 두드러진다.
마치 <질주>를 작곡할 때까지만 해도 흑백으로 곡을 표현한 것이 전부라면, 이젠 그림에 색채가 입혀진 듯 음색이 더해져 다채로워진다.
이전과 달라진 악상들.
더욱 다채롭고 풍부해진 선율을 고스란히 펼치고 싶다는 욕망이 떠오른다.
수차례 터지는 앵콜 세례에 카타리네 식구들도 묘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미우가 직접 마이크를 가져올 정도였으니까.
툭툭.
마이크를 테스트하는 소리에 순식간에 극장이 조용해졌다.
내 말을 귀 기울이려는 듯.
모두의 시선이 한 군데로 꽂혔다.
“열렬한 성원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한 번 더 연주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담백하게 내 의사를 전달하고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자꾸만 움찔거리던 오른손이 건반에 닿자 선율을 내뱉는다.
한 손에서 피어나는 음색에서 사람들이 옅은 환호성을 질렀다.
건반을 누른 손이 더욱 다채롭게 펼쳐나가자 목소리들이 차츰 줄어들기 시작한다.
어서 그 곡을 들려주길 간절히 원한다는 듯.
누구 하나 알려주지 않았는데 함성 소리가 조금씩 멎어 들었다.
‘나는 분명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줬지.’
마치 음표를 하나씩 쌓아가듯.
건반의 이곳저곳을 누르던 손가락이 어느덧 두 개, 세 개, 그 이상의 화음을 펼치기 시작한다.
왼손까지 가세하여 연주를 펼치자 소리는 더욱 웅장해진다.
연주를 이어가던 나는 관객석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듯한 표정은 비슷했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조금씩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군가는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이 무척 기쁘다는 얼굴로, 누군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분명 내가 펼친 연주는 하나이고, 내가 예고한 곡은 하나이건만.
그것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가지각색이다.
‘같은 곡을 듣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이야기들.’
악상을 떠올림과 동시에 가상의 오선지에 음표가 맺힌다.
마치 시사회 현장의 사람들을 그리려는 듯 세세하게.
여기까지는 이전에 <환상>과 <추격>을 만들 때와 같았다.
‘상황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이젠 특색이 추가되는 느낌.’
이전에 곡을 만들 때는 흑백으로 된 음표들이 떠올랐다면, 이번에는 마치 한 사람의 뜻을 대변하듯 음표에 색깔이 더해진다.
마치 내 연주를 들은 사람들의 표정을 형상화하듯.
각양각색의 표정을 지은 사람들이 곡조로 변해 악보에 녹아든다.
같은 사람이어도 살아온 환경, 하는 일, 얼굴, 심지어 생각까지 모두 다를 테니까.
내 연주를 듣고 나처럼 음악을 떠올린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림을 떠올린 사람이 있을 것이고, 글을 떠올린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떠오른 수많은 영감들.
내 연주를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낸 사람들의 표정이 자연스레 오선지에 녹아든다.
각자의 생각이 담긴 것처럼.
한두 개의 음표에서 시작한 선율이 이젠 다양한 화음으로 바뀌어 내 손에서 피어나기 시작한다.
‘음색(音色)이 녹아드는 것이 이런 걸까?’
연주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
나 또한 연주를 하면 내 특색이 묻어나겠지.
하지만, 지금 내가 펼치는 연주는 그 이상의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마치 타인의 특색을 물감 삼아 내 그림에 색을 입히듯.
각 화음을 표현할 때 내 표정과 손가락 움직임이 미묘하게 바뀐다.
그러한 차별성이 깃들자 곡에 다채로움이 추가되고, 다채로움은 곧 연주의 풍성함으로 이어진다.
더욱 세세하고 완성된 연주를 펼쳐낼 수 있다는 자신감.
자신감에 힘입어 가상의 오선지를 현실로 재현하려는 손가락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피아니스트, 요한나 켈러.
숱한 천재를 만나왔던 그녀였지만, 이안은 그중에서도 범상치 않은 존재였다.
자신보다 오랫동안 피아노를 수학한 사람들에게도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요한나마저 그 뜻에 절로 고개가 끄덕일 정도로 강직한 생각들.
빈 필의 마에스트로인 레오도 인정한 존재이지 않았던가.
천재 중의 천재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요한나는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안의 연주를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떤 곡이지?’
오랜 세월 동안 피아노를 수학한 요한나 머릿속은 데이터 저장소나 다름없었다.
피아노가 탄생한 바로크 시대부터 현대에 이어져 오는 모든 클래식 곡을 알고 있는 그녀였건만.
지금 요한나의 귀에 흘러들어오는 곡은 그녀의 기억 속에 없는 곡이었다.
그 말인즉슨.
‘또 다른 자작곡이야?’
요한나는 이번 <환상>과 <추격>에 이어 이안이 참여한 광고 영상까지 본 상태였다.
이미 이안의 연주를 모두 들어본 그녀였기에.
새로운 자작곡이라는 소식은 크게 놀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연주를 자세히 지켜보던 그녀의 머릿속에는 기묘한 의심이 떠올랐다.
처음 건반 몇 개를 시험하듯 누르는 모습.
그동안 암보를 기본으로 했던 이안에게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요한나의 머릿속에 하나의 확신이 자리 잡자 그녀의 입이 자연스레 벌어졌다.
‘즉흥으로 연주하고 있는 거야?!’
요한나의 머릿속에서 수백 개의 물음표가 떠올랐다.
즉흥곡.
그 자리에서 곡을 떠올리고 연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요한나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단순히 화음들을 나열하면 곡을 만들 수야 있겠지.
화성학에서 정리된 코드들만 펼쳐도 자작곡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코드에 맞는 화음을 찾고, 그에 맞는 멜로디를 덧입히고, 단순해 보이지 않게끔 얼마나 변주를 가하느냐에 따라 곡의 풍성함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일련의 작업들은 잠깐 떠올린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요한나는 입을 떡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치 테스트하듯 전개되는 음표들.
연주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악보의 한 장면으로 담기게끔 연주를 펼쳐나가는 이안의 모습에 경탄을 감추지 못했다.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선율.
시작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 화음으로 시작한다.
자칫 잘못하면 괴기한 선율이 나올 법한 조합을 이안은 아슬아슬하게 펼쳐나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어찌 위화감 없이 저런 선율을 이어가는 것인가.’
오랜 시간 피아노를 수학하면서 독특한 선율은 모두 만나봤다고 자부하던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화음의 세례는 그 자부심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분명 들리는 코드는 달라지지 않았다.
본래라면 전혀 섞이지 못할 선율들.
하지만 이안의 손이 건반을 훑자 어울리지 않던 음색들이 퍼즐 조각처럼 모여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본래의 음색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독자적인 음색을 내뿜으면서도 전체적인 선율이 틀어지지 않도록 교묘하게.
본래 하나의 선율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우면서도 화음들은 각자의 음색을 여지없이 뽐낸다.
가만히 연주를 듣던 요한나는 한참 뒤에야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닫는다.
‘핵심 선율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어!’
요한나는 놀라움에 입을 떡 벌렸다.
계속해서 펼쳐지는 독자적인 화음은 자칫 잘못 조합하면 어색한 소리가 튀어나올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심지와 같은 무언가가 단단히 선율을 잡아두고 있었다.
완벽히 분리된 선율임에도 모든 화음에 어울리는 음색 하나가 밸런스를 잡아주고 있었다.
마치 나무에서 가지가 돋아 넓게 퍼지듯.
중심 화음에서 펼쳐진 선율들이 다채롭게 퍼져나간다.
‘독자적인 화음이 마치 견습 단원들을 보는 것 같아.’
요한나의 표현은 말 그대로였다.
각양각색의 특징을 살린 화음들은 그녀 아래에서 피아노를 수학하고 있는 견습 단원들이 떠오르게 했다.
천재들이 모인 빈 필하모닉 아카데미.
견습 피아니스트라 할지라도 모두 빼어난 실력으로 들어온 엘리트들이었다.
하지만, 견습 피아니스트가 처음 오케스트라와 합을 맞추는 날엔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협주는 자신의 곡을 연주하되, 함께 연주를 이어나가는 선율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했기에.
도리어 자신의 강점을 너무 드러내면 협주가 틀어지기 십상이다.
‘마치 내게도 가르침을 주는 것 같네.’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고.
해석과 선율을 만들어내는 깊이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독자적인 화음이 퍼져나간다.
처음에는 다소 어긋난 것처럼.
자칫 잘못하면 선율이 틀어질 것 같았지만, 서로의 속도를 조금씩 조절하고 맞춰 나가자 완성도 높은 선율이 이어진다.
평소처럼 살던 사람이 어떠한 것에서 영감을 얻고, 그 영감에 자신의 생각을 덧대어 전혀 새로운 창작품을 만들어내듯.
이안의 연주를 듣고 있으니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스쳐 지나갔다.
‘오길 잘했다.’
이안의 연주를 듣던 요한나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자신감 있는 표정이다.
앞으로 견습 단원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배움을 전파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영감이 요한나의 마음속에서 태동하기 시작했다.
***
“어떻게 만든 곡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연주를 끝마치고 내려온 나에게 미우가 건넨 말이었다.
분명 즉석이라고 했는데도 완성도가 무척 높았다고.
누가 보면 미리 준비한 줄 알겠다며 너털웃음을 지었지.
미묘하게 웃는 그의 표정에서 호기심 가득한 아이의 면모가 보였다.
그런 미우를 향해 나는 내 심상을 조금 털어놓았다.
“저를 바라보던 관객들을 떠올리며 연주했습니다.”
나를 향해 바라보던 수많은 시선들.
그리고 얼굴에서 떠오른 가지각색의 생각들.
그러한 독자적인 사람들의 생각들이 가상의 악보에서 화음으로 펼쳐졌다.
단순히 붙이는 것만으로는 섞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음색의 화음들.
그 소리들을 하나의 선율로 어울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마치 다른 사람에게 다양한 영감을 준 내 연주처럼.
심지 같은 중심 화음을 따라 화음을 파생시켜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 보았다고 덧붙였다.
차근히 내 설명을 듣던 미우의 표정이 경외감으로 차올랐다.
“허허. 이안 씨는 매번 나를 놀라게 하는군요.”
쉽게 잊히지 않을 정도로 독특한 선율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는다고.
오랫동안 애니메이션을 만들며 숱한 음악을 들어왔건만, 내가 하는 연주는 독특하다 못해 완전히 새로운 사조 같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색다른 경험이었다고.
내 연주는 환상보다 더욱 환상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참으로 기묘한 선율이었습니다. 다양한 소리가 섞이는데도 어찌 그리 조화롭게 나아갈 수 있는지.”
미우는 연주를 듣는 내내 신기한 감정을 떠나보낼 수 없었다고 전했다.
어색한 기류가 흐를까 봐 손에 땀을 쥐게 만들면서도, 앞으로 이어질 선율을 기대하게끔 만드는 연주라고.
그는 듣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애니메이션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저는 각자도생으로 나아가던 사람들이 어떠한 계기로 한데 뭉치는 장면이 떠오르더군요.”
완전히 다른 색깔을 가진 화음처럼.
서로 보기만 해도 으르렁거리는 원수 같은 사람들이 떠오르는 선율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공통된 소재나 목적으로 하나가 되어 화합하는 장면을 떠올렸다고.
말도 안 되는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극적 반전을 떠올리게 하는 곡이라고 덧붙였다.
‘여기서도 새로운 영감이 탄생하는구나.’
미우를 바라보는 눈길에 묘한 감성이 차올랐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녹여낸 곡을 만들고 싶었다.
다른 생각들이 하나의 소재로 영감을 얻어 또 다른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선율.
그 의도를 미우는 정확히 파악한 듯했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 섞인 듯한 분위기를 느꼈다고 했으니까.
“차후에 이 곡으로 다시 함께할 수 있을까요?”
미우는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영감을 받은 사람들을 표현한 곡에서 또 다른 영감을 떠올린 미우.
그라면 이 곡을 더욱 생동감 있게 펼칠 수 있게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떠올랐다.
내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자 미우는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듯 환한 미소를 내비쳤다.
“그런데 곡의 제목이 뭔가요?”
제목을 묻는 미우에게 나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영감(靈感)>. 제 여섯 번째 자작곡 제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