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호텔로 돌아오자 큰아버지는 나에게 종이 몇 장을 건넸다.
휘갈기듯 그린 오선지에 음표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음표들의 전개를 보자마자 나는 그 곡이 어떤 곡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쓰면서도 이게 맞나 싶더구나.”
어울리기 힘든 화음들의 향연.
범상치 않게 튀어가는 멜로디들이 잔뜩 퍼진 곡.
시사회 라이브 연주회에서 처음으로 펼쳤던 <영감>이었다.
즉흥적으로 쓴 곡은 휘발성이 높다고.
시작부터 독특한 선율이라 인상 깊었다고 전했다.
조금이라도 기록을 남겨두고자 빠르게 휘갈겼으니 빈자리는 알아서 채우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마에스트로였던 큰아버지의 저력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못해도 70% 이상 적으신 것 같은데요?”
내 질문에 큰아버지는 별일 아니라는 듯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도리어 악보를 만들면서 궁금한 게 많았다는 듯 질문을 연발했다.
“대체 어떻게 조합시킨 곡인 게냐.”
그동안 이런 조합의 곡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완전히 따로 놀 법한 화음들을 펼치길래 처음에는 잘못 연주하는 줄 알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연주를 이어갈수록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고.
큰아버지는 내가 중심 화음을 내세웠다는 것도 눈치챈 상태였다.
이리 튀고 저리 튀는 화음들을 한데 묶을 수 있었던 선율.
마치 전혀 다른 곡들을 매시업한 곡을 듣는 것 같다고 했다.
“이번 곡의 제목은 뭐냐.”
“<영감>이요.”
<영감>이라.
잠시 생각에 잠기던 큰아버지는 이내 내 의중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제목을 <영감>으로 지었는지 알겠다는 듯.
굉장히 독특해서 자신에게도 새로운 충동을 일게끔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영감>이 완성되면 앞으로 2개 남았구나.”
큰아버지는 자연스레 자작곡 독주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질주>를 완성하며 지금까지 만든 자작곡은 5개.
아직 조금 더 손을 봐야 하는 <영감>을 포함하면 앞으로 8개라는 목표치까지 2개가 남아 있었다.
그는 도움이 될 안건들을 살피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를 끝마친 큰아버지가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그는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 뒤돌아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공원에서 봤던 밴드가 지금 한국에서 난리더구나.”
“허니레인이요?”
큰아버지의 말에 나는 곧장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불과 몇 주 전에 내 영상을 업로드했을 때만 해도 구독자가 100명 남짓이었던 밴드의 유튜브 채널이 이젠 구독자 만 명을 훌쩍 넘길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 과정에는 TV 경연 프로그램이 하나 끼어있었다.
밴드 배틀.
최근 인기몰이를 하는 데 성공한 경연 프로그램이었다.
아마추어 밴드들을 대상으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
허니레인이 그곳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이다.
마지막 경연에서 펼쳤던 그들의 자작곡이 높은 점수를 얻은데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잘 만든 곡이네.”
곡을 들어보는 나도 그들만의 흥에 적응하여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들의 공식 유튜브에 올라온 뮤직비디오도 어느덧 백만 조회 수를 앞두고 있었다.
게다가 허니레인 채널의 한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 공연하다가 박이안 피아니스트 만난 썰?’
내 이름이 적혀있는 영상 제목에 나는 곧바로 영상을 재생시켰다.
브이로그 형태의 영상.
버스킹을 준비하는 그들의 일상이 담긴 영상이었다.
내가 연주를 이어가는 장면과 함께 각자의 소감을 조금씩 담아둔 영상.
그중 키보드를 담당했던 멤버가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갑작스레 부탁해서 당황할 법도 한데, 그런 거 1도 없이 도와주셨다니까? 어찌나 감사하던지…-
엄청 조심스레 다가갔는데.
너무나도 소탈한 내 태도에 친근함마저 느껴졌다고.
거리낌 없이 피드백을 건넨 나의 태도에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덕분에 더욱 조화로운 연주를 할 수 있었다고.
훨씬 매끄러워진 선율 덕에 연습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오죽했으면 헌정곡이라면서 거리 공연 때 들려줬던 <환상>을 락버전으로 편곡했을 정도니까.
지금껏 들었던 커버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선율이 영상에서 흘러나왔다.
강렬한 전자 기타 선율에 <환상>이 펼쳐지자 온화했던 곡이 날카롭게 변했다.
사이버네틱 세계관이라는 환상 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영상을 본 사람들의 댓글에도 나와 허니레인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ㄴ 진짜 박이안이 밴드 하나 살렸다.
ㄴ 우리 허니레인 이제 꽃길만 걷자 ㅠㅠ 앞으로 화이팅. 박이안도 화이팅!
ㄴ 언제 한 번 더 콜라보 안 해주시나요?
.
.
***
한국에 돌아올 즈음.
시사회 효과가 점차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카타리네 스튜디오 최신작, ‘반딧불숲 환상화’.
로튼 토마토, 메타크리틱에서 최고 평점을 받아 현재 화제 중.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평이 높게 나온 것을 시작으로 그 유명세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에 발맞춘 카타리네 스튜디오의 홍보도 빛을 발했다.
시사회를 방문한 내빈들의 인터뷰 영상은 물론, 나와 히마리의 연주 영상까지 공개했던 것.
기존에도 뉴에이지스러운 곡조에 전 세계 사람들이 편안하게 감상하던 카타리네 스튜디오 곡이었기에, 전 국가적으로 선율이 퍼져나갔다.
몽롱한 선율에 취침곡으로 급부상하면서 음원 발매가 성황리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기사가 줄을 이었다.
ㄴ 은은한 선율이 잠잘 때 틀어놓기 딱 좋음.
ㄴ 그냥 들어도 좋은데 명상하고 싶을 때 틀면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니까.
게다가 커버 영상도 인기몰이에 한몫했다.
이전에 내가 연주했던 영상을 다른 이들이 커버했던 것처럼.
카타리네 스튜디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팬들이 앞다퉈 커버 영상을 게재하며 2차 홍보 효과를 누리고 있었다.
나 또한 내가 만든 <환상>과 <추격>을 커버한 영상들을 들어보고 있었다.
‘여기서도 새로운 해석들이 등장하는구나.’
같은 <환상>이었건만.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 음색은 가지각색이었다.
허니레인이 펼쳤던 강렬한 <환상>을 시작으로 같은 피아노로 연주한 <환상>, 관현악을 섞어 오케스트라처럼 펼친 <환상>, 마림바나 아코디언처럼 색다른 악기로 연주한 <환상>까지.
<영감>을 만들 때 느꼈던 생각이 다시금 머릿속에서 꿈틀댄다.
유튜브에서 <환상>의 커버 영상들을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추천 영상에 음악과 어울리지 않는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박이안이 대단한 이유]
… 뭐지?
허니레인의 상황과는 조금 달랐다.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모를 영상에 의문이 가득한 나머지 나는 무심코 영상을 클릭했다.
제목과 똑같은 이름의 글자가 영상 앞에 등장하더니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지켜보시면 될 겁니다.-
큰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은퇴 전, 조카의 성장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인터뷰 영상이 재생되었다.
큰아버지의 성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인터뷰.
어딘가 기대된다, 잘할 수 있을 것이란 칭찬 대신 앞으로 쭉 지켜보기만 해도 성장을 알 수 있을 거란 담백한 답변이 들어있었다.
짧은 인터뷰가 끝나자 이번에는 한 방송사에서 진행한 유라의 인터뷰가 흘러나왔다.
-세레나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모습이 얼마나 멋지던지. 제 곡이 1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안 씨의 몫이 가장 큰 것 같아요.-
그녀가 공개한 세레나데가 1위를 했을 때 진행한 인터뷰였다.
영상은 더 이어졌다.
미국 진출을 앞둔 코스모의 제작자 피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 레오.
애니메이션 거장이자 카타리네 스튜디오의 수장, 나카무라 미우.
쇼팽 콩쿨 우승자이자 일본의 천재 피아니스트, 마쓰모토 사토라.
그밖에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 평한 인터뷰 내용들이 짜집기 된 영상들이었다.
-머지않아 피아니스트 박이안의 연주가 세상을 호령할 것입니다.-
-이안 씨의 연주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합니다.-
숱하게 쏟아지는 칭찬들과 평가.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며.
끝없이 성장하는 성장세에 감탄할 지경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한 음악가들은 내가 만든 곡에 영감을 얻어 새로운 숨통을 만들어주었다는 극찬까지 했다.
내가 만든 곡을 통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큰아버지가 건네준 <영감>의 악보가 더욱 눈에 들어왔다.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조건 중 하나가 아닐까?’
내 눈매에 미묘한 자신감이 어렸다.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
월등한 실력을 갖추고, 유명세를 널리 알리고, 음악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영감을 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사고에 녹아들어 울림을 전하고, 그 울림을 받아들인 사람이 새로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나아가게 만드는 힘.
그것이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갖춰야 할 덕목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사고들이 쌓여서 그럴까.
자연스레 머릿속에 담겨있던 <영감>의 악보가 더욱 다채로워진다.
머릿속의 악상들을 갈무리하며, 보다 완벽한 곡을 만들기 위해.
<영감>을 완성하려는 내 손길이 더욱 분주해졌다.
***
“오늘도 연습이네.”
광고 촬영에 일본 시사회 참여, 연주회까지 했음에도 밤중에 연주를 하는 끈기.
이안의 연주를 듣던 은희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애니메이션 개봉 이후 주변에서 연락이 쇄도했다.
이안에 대한 칭찬 일색을 내놓는 사람들에 은희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바이올린을 그만두고 피아노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걱정했던 것이 이제는 싹 사라질 정도로 이안의 행보는 대단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독주회는 물론 타사에서 제공하는 연주회까지 척척 해내고 있으니.
은희의 가슴 속에 묘한 감정이 피어난다.
‘이안이가 느꼈던 감정이 이런 것일까?’
회의감.
최근 들어 몰려오는 감정에 그녀는 플룻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오랜만에 플룻 독주회를 제안도 받았지만, 곧바로 수락하지 못했다.
플룻을 들 때마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
분명 지금껏 잘해온 연주이건만.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온 음악 인생이 옳은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안이는 이 감정을 스스로 해결했겠지?’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점.
이안이 피아노를 잡고 연주를 펼쳤던 것이 떠올랐다.
처음엔 잘 움직이지 않던 오른손을 유연하게 바꾸는 것부터 시작했거늘.
그러던 이안은 어느덧 그 손으로 새로운 곡을 창작하고 있었다.
처음 <환생>이라는 클래식 창작곡을 만드는 것은 물론, 이제는 애니메이션 수록곡과 광고 음악까지 만들고 있다.
매번 색다른 곡을 펼치는 모습에 은희는 아들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달려갈 수 있을까?’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은 길.
대학도, 전담 교수도, 레슨도 없었음에도 이안은 보기 좋게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콩쿨에서 보기 좋게 우승을 하고, 거대 오케스트라의 입단 제의까지 받으며.
게다가 남들은 침을 뚝뚝 흘리는 자리를 거침없이 거절하곤 자신이 하고 싶은 길로 나아간다.
마치 거장이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것처럼.
그런 이안이었기에, 은희는 더더욱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안이라면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지 않을까?’
어느덧 그녀도 이안을 아들이 아닌 예술가로 대하고 있었다.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영감을 떠올리게 만드는 존재.
이미 자신의 과오를 살피고 새로운 활로를 끊임없이 개척하는 예술가.
그런 예술가라면 자신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은희는 연주가 이어지는 음악실의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