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74화 (74/250)

74화

‘하르모니아에서 먼저 연락을 할 줄이야.’

비엔나 하르모니아.

클래식계에서 모른다면 간첩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거대 음반사.

대한 오케스트라를 맡았던 시절에도 몇 번 마주한 적이 있는 곳이었다.

하르모니아에서 만든 음반으로 대한 오케스트라 세계 투어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만나는 결이 달랐다.

이안에게 제안을 하고 싶다는 연락.

제안에 대한 이안의 뜻을 전하고자 현철은 거침없이 비엔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먼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마에스트로.”

“초청해줘서 고맙습니다. 이안이 곡 완성 때문에 제가 대신 혼자 온 점 양해 바랍니다.”

미팅룸에 들어온 현철의 목소리엔 무게감이 가득했다.

본래 이러한 자리에는 당사자가 참가하는 것이 예의이리라.

그럼에도 사토라는 현철의 말에 도리어 기대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제 말이 맞죠?’라고 하는 듯, 사토라의 눈길이 레일라에게 향했다.

하르모니아 음반사의 사운드 디렉터, 레일라 또한 소식을 듣고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보냈다.

“곡 완성이라 하면, 이번 시사회 때 공개한 곡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영감>이라는 곡을 마무리하고 있죠.”

Inspiration!

사토라가 옅은 목소리로 아는 체를 했다.

마치 이안의 의중을 짐작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

이안의 근황을 묻는 사토라의 질문이 끝나자 그들의 대화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안이의 곡을 앨범화하고 싶다고요.”

현철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들은 이안이 그동안 만든 자작곡에 대한 프로필을 읊었다.

클래식 형식에 완벽하게 맞춰 제작한 첫 자작곡, <환생>을 시작으로 현철의 은퇴 무대에서 펼쳤던 <염라>, 애니메이션 곡으로 만든 <환상>과 <추격>, 광고 영상에 사용된 <질주>까지.

게다가 레일라는 이안이 손댄 대중가요도 알고 있었다.

클래식과 뉴에이지, 더 나아가 방송 음악까지 만들어낸 이안의 가능성을 무척 높이 평가했다.

미디어 프렌차이즈.

이안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음악이 무궁무진하다고.

특히 사토라가 듣고 온 음원이 무척 좋았다고 들었으니, 그 곡을 시작으로 앨범을 만들어보자고 덧붙였다.

차근히 내용을 듣던 현철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좋은 제안이군요. 저희도 한 가지 조건만 수렴해준다면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토라가 무척 궁금하다는 듯 눈빛을 반짝였다.

어떤 의견을 내세울까.

음반을 한국에서 만들고 싶다? 아니면 오케스트라를 섭외해달라?

그동안 범상치 않은 행보를 이어간 이안이기에.

사토라는 그 조건이 무엇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현철이 내세운 조건을 듣자 순식간에 미팅룸은 한기가 돌았다.

“... 지금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타이틀에 ‘미완성’이라고 붙이는 것이 저희가 원하는 조건입니다.”

당당한 현철의 말에 레일라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미완성 곡을 발매하겠다니.

그것은 음반사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말도 안 된다고.

숱한 거장들의 곡도 미완성본을 그대로 올린 적은 없었다.

다른 이름난 예술가의 힘으로 완성하여 올린 적은 있어도.

완성되지 않은 곡을 앨범에 넣는 것은 음반사로서 할 수 없는 일임과 동시에 앨범을 들을 고객들에게도 할 짓이 아니다.

미완성된 곡을 앨범에 수록할 수 없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현철은 당연하다는 듯 응수했다.

“당연히 곡은 완성된 곡으로 발매해야지요. 다만, 제목을 미완성이라고 해달라는 것이지요.”

“... 연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생각에 레일라가 반문하자 현철은 예상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모든 곡은 직접 들었을 때 비로소 진정 이뤄지는 것이라고.

연주하는 것을 직접 보고, 진한 나무 향과 극장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고, 외벽에 반사된 선율을 듣는 모든 행위.

공연장에서 그러한 일련의 행위와 감각을 모두 느끼는 것이 진정한 음악 감상법이라고 덧붙였다.

그렇기에 음반에서 듣는 소리는 완성된 곡이긴 하나, 미완성된 무대라고 표현했다.

“다소 시대착오적인 생각이십니다. 마에스트로께서도 오랜 시간 겪어봐서 아시지 않습니까.”

더 이상 음악가의 무대는 공연장만이 아니다.

온라인으로도 얼마든지 연주를 펼칠 수 있고, 녹음된 음원 발매 수익이 음악가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랫동안 클래식의 잔재가 남은 오케스트라에서 있던 현철이 생각한 것이리라.

하지만, 현철은 그에 대해서도 담담한 답을 내놓았다.

“이안의 뜻입니다.”

미완성이라는 타이틀을 앞세우자고 한 것은 도리어 이안이었다.

현철은 그 뜻에 동조했을 뿐.

현철 또한 이안과 같은 생각이라는 뜻을 전했다.

지휘자로 살아오면서 현장에서 이뤄지는 연주의 백미를 가장 잘 알고 있는 현철이었다.

그 또한 음악이란 직접 연주한 것을 직접 듣고 보았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먼저 깨달은 이안이기에.

이안을 옳은 길로 나아가는 하나의 예술가로서 인정하여 도출된 결과라고 덧붙였다.

굳은 심지를 보이는 현철의 모습에 사토라도 인정하는 의사 표현을 전했다.

대한의 마에스트로로 지냈던 현철이 인정한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레일라도 설명을 듣고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안의 뜻을 전적으로 믿으시는군요.”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매니저라면 응당 그래야지요.”

매니저?

현철의 대답에 사토라와 레일라는 어안이 벙벙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한때 세계를 종횡하던 마에스트로가 매니저라고…?

***

한국 시각 밤 10시.

오스트리아에서 약속 시간이 오후 2시라고 했으니 지금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리라.

나 또한 여러 번 들어본 거대 음반사가 먼저 제의를 건넬 줄이야.

비엔나 하르모니아.

19세기부터 명맥을 이어온 유서 깊은 음반 제작사.

클래식 음반의 시초이자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와 같은 클래식 거장들의 앨범을 처음으로 만든 곳이었다.

그뿐만이랴, 현대에도 빈 필하모닉의 앨범과 대한 오케스트라의 앨범, 쇼팽 콩쿨 우승자인 사토라의 앨범까지 만들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는 곳이었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려면 꼭 거쳐야 하는 관문 같은 곳이리라.

<영감>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내 의견에 곧바로 동조한 큰아버지는 곧바로 자신이 비엔나로 가겠다고 자처했다.

마에스트로 경력으로 다져진 달변가라면 내가 원하는 바를 충분히 이루고 오실 테니 내가 원하는 바를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

‘전략적으로도 좋은 수단이 되겠지.’

미완성.

아마 타이틀을 보면 왜 미완성인지 궁금해할 테지.

그것만으로도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으리라.

지금껏 이러한 생각으로 곡을 낸 사람은 없었으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내비치듯, 미완성으로 낸 이유에 대해 토의하면서 자연스레 앨범은 화두에 오를 것이다.

궁금증을 유발시켜 사람들이 듣게끔 만든다.

그것이 내가 생각한 1차 이유였다.

‘게다가 그 자체만으로 자작곡 독주회 홍보가 될 거야.’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앨범에 수록된 곡을 미완성으로 제출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미완성이라는 타이틀로 제시하는 것.

음원을 듣는 것만으로는 완성된 음악을 들을 수 없다는 내 철학이 담긴 타이틀이었다.

직접 연주를 들으면 더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전제.

차후 자작곡으로 독주회를 연다면 그곳에서 진정한 완성을 목도할 수 있다고 홍보한다면?

앨범을 듣고 실제 연주를 기대하는 사람은 독주회를 찾을 것이다.

세계를 무대로 하는 비엔나 하르모니아가 만든 음반이니 홍보대상은 전 세계 클래식 팬이 될 테지.

더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리라.

다양한 것들 속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고, 각자의 영감을 얻어갈 수 있게끔.

내가 원하는 음악은 그런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지금 하나.’

나는 자연스레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렸다.

<영감>의 완성을 위해 오스트리아행도 거절한 나였으니까.

그들을 다시 만나는 날에는 <영감>을 완성하는 것이 예의일 터.

그리고 완성된 곡이 어떠한 파급력을 가질지 나 또한 기대되기에.

곡을 완성하는 손가락이 더욱 빨라진다.

***

오스트리아 빈.

전생의 기억의 주 무대가 된 곳.

이제는 그곳에 내가 서 있었다.

큰아버지는 계약이 성립됨과 동시에 나에게 연락을 보내왔다.

하르모니아의 사운드 디렉터가 나를 찾는다고.

오스트리아로 향할 준비를 하던 중 나는 어머니에게 넌지시 물었다.

“바람 쐬러 다녀오실래요?”

음반사에 관심을 가지던 어머니였기에.

어머니가 좋은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상관없다는 의사를 밝힌 하르모니아 음반사 덕에 나와 어머니는 곧장 오스트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음반 제작은 처음이네.’

자작곡으로 이뤄진 음반.

그것도 무려 비엔나 하르모니아에서 제작하는 음반이다.

전 세계에서 제일가는 클래식 음반사인 하르모니아 음반사인 만큼 활로를 개척했다는 것에서 무척 큰 의미가 있는 일이리라.

게다가 하르모니아 측에서는 내 의견을 듣고 모두 수렴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고.

내 뜻을 전한 큰아버지에게 담당자는 놀랍다는 말을 덧붙였다고 전했다.

자신 같아도 구미가 당길 것 같다고.

음악을 조금이라도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미완성’이라는 타이틀에 나의 의중을 짐작할 것이라며 칭찬을 더했다지.

타이틀을 보고, 음악을 듣고 영감을 떠올리고, 나의 생각을 유추하는 것.

내가 원하는 연주와 감상은 그런 것이었다.

빈 국제 공항에 도착하자 나와 어머니를 반기는 큰아버지.

배웅을 나온 큰아버지의 인솔하에 나와 어머니는 곧바로 하르모니아 음반사로 향했다.

‘처음 와봤지만, 굉장히 익숙하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건물들을 지나칠 때마다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만 같은 기대감처럼.

묘한 기분이 자꾸만 꿈틀거린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이안 씨.”

음반사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사토라였다.

악수를 청하는 사토라의 손길에 나도 곧바로 응수했다.

“좋은 제안 감사합니다. 사토라 씨께서 적극적으로 추천해주셨다고 들었어요.”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죠. 이안 씨의 우수한 곡을 앨범으로 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줬으니까요.”

사토라는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그는 곧장 우리를 작업실로 안내했다.

작업실에는 그동안의 세월이 묻어나오는 거장들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벽 한 면을 차지하는 선반에는 그동안 하르모니아에서 만든 앨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빈 필하모닉의 앨범은 물론, 세계에서 이름을 날린 오케스트라와 음악가들.

그 이전의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까지…’

여러 음악가들이 커버한 거장들의 곡들.

몇몇 곡들은 전생의 기억 속에서 직접 들은 기억이 있는 곡들이었다.

묘한 향수가 감돌던 그때.

한 앨범 표지가 내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오래된 티가 잔뜩 묻어나는 앨범 표지.

앨범 속 악보를 바라보자 익숙한 기억들이 흘러들어온다.

전생의 기억 속, 흑연이 가득 묻은 손으로 오선지를 채워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전생이 만들었던 곡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앨범 표지에 적힌 이름은 전생의 이름이 아니었다.

작곡 : 로만 폰 슈트라우저

전생의 기억 속 도련님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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