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슈트라우저 가(家)의 앨범을 보고 계셨군요.”
뒤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짙은 다크서클이 인상적인 여인은 자신을 ‘레일라’라고 소개했다.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비엔나 하르모니아의 사운드 디렉터, 레일라 베버.
이곳에서 만든 모든 음반은 그녀의 손에서 피어난 결과물이었다.
뛰어난 디렉터이자 프로듀서인 레일라의 입에서 전생이 몸담은 가문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로만 폰 슈트라우저가 만들어낸 곡은 고전 시대에 만들어진 곡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앞서 나간 느낌을 줍니다.”
<지옥>, <연옥>, <천국>.
앨범에 담긴 곡은 총 3개였다.
괴테의 신곡을 모티브로 만든 것이라고 추정된다며.
각 곡은 신곡에 나오는 지옥의 모습을 악보에 고스란히 담은 듯 생동감 넘치는 선율을 자랑한다고 덧붙였다.
고전 특유의 형식미를 갖추되, 신곡의 이야기를 낭만적이게 표현했다고.
특히 <천국>의 멜로디는 은은하면서도 아름다워 태교 음악으로도 많이 알려있다고 덧붙였다.
선율을 가만히 듣던 어머니도 알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악보가 하나 더 있네요.”
내가 앨범에 첨부된 악보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이름이 제대로 지어지지 않은 악보 하나.
곡도 전체 4악장 중 2악장에 그쳐 미완성에 그친 곡이었다.
“그건 함께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완성곡의 악보입니다. 학계에서는 천국에 이어 인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로만의 사상이…”
아마 4번째 곡일 것이라고.
사정이 생겨 마지막 곡 작업을 하지 못한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레일라의 말이 잘못된 정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전생의 기억에 담긴 진실은 레일라의 추측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으니까.
‘전생이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곡이자 신곡의 첫 번째 곡.’
전생의 기억이 물 밀려오듯 흘러들어온다.
로만을 통해 괴테의 ‘신곡’을 알게 된 이안 로크실트는 3개의 곡을 썼다.
신곡에서 등장하는 세계를 담은 <지옥>, <연옥>, <천국>.
곡을 완성한 전생에게 로만은 생동감 넘친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전생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당시의 4악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졌기에.
하나의 곡을 추가하여 곡 전체가 4악장이 되도록 만들고 싶어 했던 전생의 기억이 피어오른다.
‘하지만, 완성을 하지 못하고 암살당했지.’
<환생>이 연주하지 못한 곡이라면, 이 곡은 완성조차 하지 못한 곡이었다.
그 곡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단테의 신곡 속 첫 번째 세계, 지옥으로 들어가기 위한 절차.
‘죽음.’
신곡에서 펼쳐지는 사후세계.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이야기 속 지옥으로 향하는 강, 아케론.
그곳에서 지옥의 뱃사공, 카론을 만나 깊은 사후세계로 빠져들어가는 곡.
하지만 제2악장까지 완료하고 전생이 죽음을 맞이하여 완성하지 못한 곡.
그것이 완성되지 못한 곡의 진실이었다.
“과거 그 곡을 채워보려는 사람들의 시도가 있었으나, 기존의 2악장을 어떤 생각으로 채웠는지 아무도 유추하지 못했죠.”
레일라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연할 테지.
첫 곡으로 만든 곡을 마지막 곡이라 오인하여 복원하려 했을 테니까.
죽음처럼 낮은 선율으로 인세를 표현하려고 했을 테니 유추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
아마 억지로 인세의 밝음을 나타내려고 했다면 억지로 장조를 펼쳐 곡이 무너졌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곡을 잘 알고 있기에.
그 이야기를 펼치고 싶다는 마음에 손가락이 움직인다.
“제가 한번 쳐봐도 될까요?”
“이 미완성 곡을요?”
레일라는 무척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앞서 잘 만들어진 세 개의 곡이 있는데 굳이 왜.
그녀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나는 악보들을 차례대로 악보대에 올렸다.
때 묻은 악보를 바라보자 전생의 기억들이 몰려들어온다.
어쭙잖게 채워진 오선지들을 채우려는 듯, 머릿속에서 선율이 일렁인다.
Lent et Grave.
느리고 엄숙하게.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고전의 악보가 현대의 피아노로 피어오른다.
제 주인을 되찾은 선율.
하지만, 전생의 기억에도 3악장 이후의 정보는 존재하지 않았다.
본래라면 2악장에서 연주가 끊기겠지만, 나는 2악장이 끝나도, 3악장이 시작되어도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가상의 악보에 음표들이 하나둘씩 채워지고 있었으니까.
***
이안의 곡을 앨범에 담자는 사토라의 계획은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여태껏 비엔나 하르모니아에서 이안과 같은 신예 피아니스트의 곡을 음반으로 만든 적은 없었으니까.
사토라도 세계 최대의 콩쿨, 쇼팽 콩쿨에서 우승하고 나서야 발을 내디딜 수 있던 곳이다.
게다가 그런 음반사를 상대로 획기적인 제안을 던지는 여유까지.
미완성이라는 타이틀을 앞세우자는 계획이 모두 이안의 생각이라는 현철의 말에 사토라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사토라의 확신에 더욱 힘이 들어간 것처럼.
‘그는 누구보다 비범하다.’
사토라의 눈으로 직접 목도한 이안의 연주.
동양의 제일이라는 키워드를 달고 있었음에도, 이안을 볼 때마다 기시감이 감돌았다.
연주를 볼 때마다 놀라게 만드는 실력.
콩쿨과 시사회에서 바라본 이안의 연주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라고 평가를 몇 번이고 번복하게 만들었으니까.
특히 시사회에서 펼친 즉석 연주는 사토라마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어떻게 저 화음의 조화로 저런 곡을 만들어냈지?’
그 또한 7화음의 무서움을 잘 아는 사내였다.
일반적인 3개의 소리로 만들어진 화음이 아닌, 4개의 소리로 만들어진 화음.
4개의 음색이 만들어내는 화음이라 화려한 선율을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 추가된 하나의 음색 때문에 다른 화음과 합쳐지기 어려운 소리였다.
그런데 이안은 개의치 않다는 듯 말끔하게 음색을 소화해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이번에 또.
이제는 끝이겠거니 했던 이안의 천재성이 다시금 발화하고 있었다.
‘녹음본보다 훨씬 낫네.’
느리게 퍼지는 선율이 작업실에 퍼지기 시작한다.
낮은음이 천천히.
마치 안개가 깔리는 모습을 연상케하는 기묘한 선율이 차근히 뻗어나간다.
턴테이블에서 나오던 선율을 그대로 따라 하다 못해 웅장함을 추가한 느낌.
사토라는 팔짱을 낀 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들었던 것을 곧바로 연주로 펼치는 대단함을 높이 샀다.
하지만, 연주가 더욱 진행되자 사토라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잠깐, 이건 악보에 없는 부분일 텐데?’
이름 없는 곡의 제 3악장.
본래라면 2악장밖에 없는 선율이라 연주가 멈춰야 정상이다.
하지만 이안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확신에 찬 걸음을 내딛듯 이안의 손에서 선율이 피어나고 있었다.
차근히 듣던 사토라는 팔에 힘이 풀린 듯, 어안이 벙벙한 채로 팔짱을 풀었다.
‘설마 지금 채워가는 중이야?!’
순간, 사토라의 머릿속에 빠르게 회전했다.
수많은 가능성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혹시 미리 곡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럴 리 없었다.
슈트라우저의 앨범은 처음부터 3개의 곡으로 발매된 앨범.
이안이 미공개된 4번째 곡을 들어봤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도출해낼 수 있는 답안은 하나.
즉석에서 이안이 곡을 완성해나가는 것밖에 없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사토라는 옆을 돌아봤다.
옆에 서 있던 레일라가 자신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토라의 의중을 알아본 것일까, 레일라는 사토라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 또한 사토라와 같이 경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안의 실력에 감탄하면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쭙잖은 장조의 멜로디는 사라지고, 본래 있었던 단조의 멜로디가 끝까지 나아간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공포심을 자극하듯.
자욱하게 깔린 낮은음들 때문에 사토라의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간다.
‘원래 주인이 완성시키는 것 같아.’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스러운 선율.
그럴 리 없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토라의 머릿속에서는 환상이 떠나가지 않았다.
피아노에 앉아 악보를 아련하게 바라보는 눈빛은 정말 원곡자의 모습을 상상하게 했으니까.
***
연주를 끝마친 후.
사토라와 레일라가 반응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연주의 후폭풍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겨우 말문을 튼 것은 사토라였다.
“이안 씨? 설마 지금 즉석에서 연주를 이어간 것인가요?”
“네.”
“어떻게요?!”
담담한 내 대답에 레일라는 말도 안 된다며 머리를 쥐어뜯으며 물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묘한 흥분감이 맺혀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부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제대로 된 연주를 들었다는 확신에 가득 찬 얼굴.
직접 내가 연주하는 것을 처음 보는 레일라는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지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기대한 보람이 있었네요.”
함께 일하게 되어 무척 기대된다는 말까지 덧붙이며.
레일라는 사토라에게 들어서 꽤나 실력자인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영감>이 완성됐다는 말에 사토라는 물론, 레일라도 기대 어린 시선을 던졌다.
완벽에 가까운 앨범을 내겠다고.
열망에 가득 찬 레일라의 눈빛이 강렬하게 일렁였다.
“자자. 이곳에 오신 것도 힘들었을 텐데, 오늘은 둘러보면서 적응부터 하시죠.”
사토라는 직접 운전대를 잡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처음부터 일만 하면 인간미가 없지 않냐며.
클래식의 본고장, 비엔나의 풍경을 보면 더욱 클래식스러운 연주를 펼칠 수 있지 않겠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반 정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생의 기억이 잔뜩 담긴 곳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이곳에 어떠한 기억들이 남아있는지 묘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는 클래식을 수학하는 사람이면 가장 먼저 가봐야 하는 곳이라며 액셀을 밟았다.
“이곳은 오스트리아의 네크로폴리스, 죽은 자들의 도시입니다.”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
음악계의 별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겉보기엔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수없이 많은 비석들이 사람을 반기는 곳.
입구에서부터 제각기 다른 형태의 비석들이 서 있었다.
“여기가 베토벤, 모차르트와 같은 오스트리아 거장들의 묻힌 곳이군요.”
어머니의 말에 끄덕인 사토라는 곧장 그들의 묘소로 향했다.
네크로폴리스의 중심.
모차르트의 가묘(假墓)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베토벤의, 오른쪽에는 슈베르트의 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제각기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듯, 그들의 묘소는 제각기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다.
나는 문득 전생의 기억 속에 있던 가문이 떠올랐다.
“혹시 아까 그 곡을 만든 슈트라우저 가문도 이곳에 있나요?”
“물론입니다. 대대로 음악가를 양성한 것은 물론, 당시에 뼈대 굵은 음악 자선가 가문이었으니까요.”
사토라의 설명과 함께 내 머릿속에서는 전생의 기억이 흐른다.
전생의 주인이었던 어른부터 피아노를 수학한 스트라우저 가문 사람들.
하지만, 완전히 빼어난 예술가를 배출하진 않았다.
그들에게 음악이란 자신들의 우월함을 채우기 위한 도구에 가까웠으니까.
그렇기에 음악을 직접 하는 것보다는 기본적인 음악적 소양을 갖추고, 투자로 명성이 높은 귀족 가문이었다.
전생의 도련님이 수많은 인맥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여기가 바로 스트라우저 가문의 영역입니다.”
울타리로 둘러싸인 크고 작은 비석들.
가장 큰 비석에는 예상한 대로 전생의 주인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중심으로 전생의 기억 속에 담겨 있던 귀족 가문의 이름들이 차례대로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 아래에는 작은 글귀가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
“비석 아래에 적힌 글귀는 뭔가요?”
“생전에 지은 곡의 제목입니다. 슈트라우저 가문은 각자의 개인곡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죠.”
<아일츠 폰 스트라우저 - 햇빛이 내리쬐는 가을>
<헬렌 폰 스트라우저 - 깃발 교향곡>
.
.
살아생전의 곡을 기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전생의 기억 속 사실은 사토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과 달랐다.
하인이었던 전생이 가지고 있는 기억 속, 그들은 도레미도 겨우 치는 정도의 초보자였으니까.
본인의 이름으로 곡을 썼노라고 내세우곤, 베일 너머에 하데스를 세운 사람들이었다.
‘모두 전생이 쓴 곡들이구나.’
비석들을 살필수록 전생의 기억이 강렬하게 들어온다.
낙엽이 떨어지는 오후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햇빛이 내리쬐는 가을>, 가문의 상징이 새겨진 깃발을 보며 쓴 <깃발 교향곡>.
창작 의도부터 모두 전생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차근히 묘비들을 살피던 중 높은 첨탑 형태의 비석이 나타났다.
“여기가 바로 아까 이안 씨가 연주한 곡의 주인, 로만 슈트라우저의 묘비입니다.”
전생의 도련님, 로만 폰 슈트라우저의 묘비.
그의 비석에는 이전에 봤던 신곡을 모티브로 한 곡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로만의 묘 옆에는 여타 비석과는 다른 무언가가 설치되어 있었다.
다른 귀족들의 묘비와 달리 턱없이 작고 비루한 비석.
하지만, 비석 중간에 새겨진 조각은 섬세한 누군가의 성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이 비석은 누구의 것인가요?”
비석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사토라에게 물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 것 같던 사토라도 이번에는 잘 모르는 듯 말을 흐렸다.
“흠…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당시 기록을 찾아보면, 가문의 여인을 올리는 것일 수 있다고.
하지만, 이름이 너무 남성적이고, 비석의 크기도 반려의 것으로 추정하기엔 작다고 덧붙였다.
어머니는 무척 흥미로운 듯 비석을 빤히 쳐다봤다.
궁금증과 흥미가 뒤섞인 시선들 사이.
내 눈길은 아련함과 동시에 안타까움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비석에 적힌 글씨는 나만 알 수 있는 것들이었으니까.
이안 로크실트.
베일 속의 하데스이자 친우를 잊지 않으리라.
-R.S.
당대 사람들은 하인의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하인 정도의 사람들은 외딴 산자락에 파묻히는 것만 해도 호상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까마귀 고기로 버려지는 것이 관례였으니까.
그러나 이안 로크실트의 묘는 비록 작지만, 비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게다가 비석 중심에 베일로 반쯤 가려진 피아노 조각은 누군가 그의 죽음을 무척 기리고 싶어 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그리워했구나.’
전생의 기억 속 도련님은 그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고.
누구보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이라는 것을 비석이 온몸으로 밝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