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77화 (77/250)

77화

이른 아침부터 하르모니아 음반사의 작업실로 손님이 찾아왔다.

전날 레일라가 일러둔 손님.

미완성곡을 완성하고 싶어 한다는 사람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안씨. 베토벤 재단의 운영팀장, 클레어 와이즈라고 합니다.”

베토벤 재단.

굳이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그 규모를 알 수 있는 이름이었다.

거장의 이름으로 수많은 음악 천재들을 후원하는 곳이자, 현존하는 모든 베토벤의 역사적 자료들을 가지고 있는 거대 재단.

베토벤의 이름을 단 모든 행사를 주관하는 것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빈의 음악 박물관과 거대 극장도 그들의 소유였다.

클레어는 자신이 이번 베토벤 특별전의 총책임자라고 소개를 덧붙였다.

그녀는 주수석님을 떠올리게 하는 인자한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저야말로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이안이라고 합니다.”

클레어는 담담한 내 모습이 흡족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작업실에 놓인 악보들을 바라보며 옅은 탄성을 내뱉었다.

정말 내가 쓴 곡이냐며.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더욱 밝은 눈길을 내게 보냈다.

“악보를 보니 제대로 찾아온 것 같군요.”

손님용 소파에 앉은 클레어는 가방에서 여러 제안서를 꺼내 들었다.

이번에 특별전시가 예정되어 있다고.

이번 전시는 과거와 현대의 만남이라는 타이틀을 앞세워 베토벤 재단에서 보유하고 있는 유산들을 대거 전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과거에 만들어진 베토벤의 음악을 비롯해 고전 시대를 풍미했던 곡들이 현대에는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현대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클래식의 유지가 이어지고 있음을 선보이는 행사라고 말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까지 연주회에 참석하여 공연을 펼칠 것이라고.

예상을 필적하는 규모의 행사였다.

그 가운데 클레어가 내민 프로젝트는 무척 뜻밖의 제안이었다.

“이안씨. 지금 로만 슈트라우저의 신곡 시리즈의 미완성곡을 완성하고 계시다고요?”

클레어는 클래식 음반계의 거물인 레일라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곡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번 특별전 기획이 고전과 현대의 만남인 만큼, 현대를 풍미하는 예술가를 초빙하고 싶었다고.

빈 필의 마에스트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물론, 전 세계의 클래식 화제를 몰고 다니는 내가 참여한다면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그녀가 맡기고 싶어 하는 프로젝트는 무려…

“베토벤이 죽기 직전 완성하지 못한 악보. 그것을 완성하여 연주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완성도에 따라 맡기고 싶다고.

하르모니아에서 인정한 사람이 얼마나 고전의 분위기를 잘 살렸는지 궁금할 지경이라고 덧붙였다.

만약 가능하다면 미완성곡 복원은 물론, 연주까지 의뢰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함께할 수 있다면 특별전의 백미가 될 것이라며 자신만만한 기세를 보였다.

“혹시 악보를 볼 수 있을까요?”

내 질문에 클레어는 가방에서 파일 뭉치를 하나 더 꺼내 건넸다.

전시를 앞두고 보안을 신경 쓸 법도 하건만.

도리어 클레어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베토벤의 미완성곡이라.

악보를 차근히 남기던 나는 무언가 익숙한 기분을 느꼈다.

‘이 곡은…’

“베토벤이 죽기 직전, 슈트라우저 가문과 협업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곡이랍니다.”

청력을 잃었음에도 베토벤이 작곡을 위해 슈트라우저 가문과 협업한 곡.

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이 그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으니까.

콩쿨 때 연주했던 합창 교향곡 때처럼.

다른 이를 통해 곡을 완성하고 싶어 했던 베토벤에 대한 기억이 흘러들어온다.

‘전생이 대부분 관여한 곡.’

베토벤은 잃어버린 청력을 보강하기 위해 로만을 초청했다.

유명 음악가였던 로만 슈트라우저의 귀를 빌려 곡을 완성하려고 했던 것.

하지만, 실상 곡을 만들어간 것은 로만이 아닌 나의 전생이었다.

로만의 하인 자격으로 베토벤의 저택에 입성한 전생은 어깨너머로 그들의 연주를 듣고, 곡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하루 작업을 마치고 로만의 집으로 돌아가면, 전생은 자신이 들었던 것과 앞으로의 곡이 어떻게 전개되면 좋을지 로만에게 일러주었다.

베토벤 특유의 사조를 그대로 재현해낸 악보를 보며 베토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부는 제 것보다 좋다며 전생이 작성한 오선지를 대신 올려두고 작업을 할 정도.

그러나 베토벤의 병세가 악화되며 곡은 3악장 중간에서 멈춰버렸다.

“어때요 이안씨? 3악장부터 알맞은 선율을 넣을 수 있을 것 같나요?”

클레어가 비즈니스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도전을 받아들이겠냐고 묻는 것처럼.

그녀의 눈동자에 옅은 기대감이 어려있었다.

나는 악보들을 다시 둘러보며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미 전생의 머릿속엔 완성본이 담겨 있어.’

전생의 기억에는 완성된 곡을 선보이지 못한 아쉬움까지 들어 있었다.

나는 잠깐 눈을 감은 채 머릿속에 떠오르는 악보를 느끼기 시작했다.

베토벤 특유의 변주곡 성향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선율.

변환되는 선율을 매끄럽게 바꾸는 것이 전생의 기억 속에 선명히 들어가 있었다.

나는 기존의 곡에서 현대의 테크닉을 조금씩 더하며 곡에 풍미를 더한다.

악보에 드러나지 않은 3악장을 넘어선 선율에 손가락이 절로 움직였다.

“한 번 연주해봐도 되겠습니까?”

“상관은 없다만, 지금은 완성본이 아닌걸요?”

“3악장 이후는 제가 채워보도록 하겠습니다.”

담담히 내뱉은 말에 레일라는 이번에는 놀라움 대신 기대 어린 시선으로 쳐다봤다.

도리어 놀란 쪽은 클레어였다.

그게 가능해?

그녀의 이마에 의구심 가득 쌓여있는 듯 보였다.

클레어는 조심스럽게 긍정적인 의사를 보냈고, 나는 곧장 악보를 들고 피아노로 향했다.

전생의 기억이 미묘하게 밀려오기 시작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악보를 내려놓기 위해.

손가락이 주행을 시작했다.

***

‘슈트라우저 가문의 음악은 과도기에서 낭만에 조금 더 치우친 사조로 유명하지.’

빈 국립음악예술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마친 클레어 와이즈.

평생을 음악사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였다.

베토벤의 사조는 물론, 슈트라우저 가문의 사조 또한 그녀의 머릿속에 각인되다시피 남아있었다.

두 존재 모두 고전과 낭만의 과도기에 머물던 존재.

베토벤의 죽음이 고전의 끝을 장식했다면, 슈트라우저 가문은 다음 세대인 낭만파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감성적인 음악의 시작.

그런 과거의 감상이 지금 클레어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놀라운 바리에이션이야.’

베토벤의 곡이 가진 가장 큰 특징.

변주(變奏).

고전의 형식 속에서 정론처럼 자리 잡은 화음 이외에 다양한 화음을 사용한 베토벤이었다.

베토벤의 성정이 가득 담긴 곡처럼 미완성곡의 1악장이 차례대로 펼쳐진다.

변주를 빠른 속도로 전환하는 기교.

그것이 베토벤 곡을 연주하는 핵심 해석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클레어는 지금 이안의 연주가 경이롭기만 했다.

‘이 정도로 완벽하게 베토벤을 해석한 이가 있었던가?’

베토벤 재단에서 10년 이상 일해오며 숱한 음악가를 만나 온 그녀였다.

현재는 이름을 날리고 있는 유명 인사들은 물론, 베토벤 재단에서 후원한 주니어 피아니스트들까지.

모두 내로라하는 천재들이자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들을 모두 데려오더라도 이안의 연주를 따라잡을 순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악보를 모두 숙지하고 감성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놓은 것처럼.

감정선처럼 흔들리는 변주를 단 한 번의 끊김 없이 펼쳐내고 있었다.

이미 완성된 1악장과 2악장, 3악장의 중간까지 스쳐 지나가자 클레어를 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잠깐 이상한 것을 깨닫던 클레어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 선율은 설마… 비어있던 3악장의 후반?’

감상을 이어가던 클레어는 악보가 끝난 부분이 어딘지 눈치채지 못했다.

자연스레 다른 악기들과 화음을 맞추는 협주곡을 듣는 것처럼.

이안의 연주는 자연스럽다 못해 이미 있던 곡을 연주하듯 편안하게 흘러간다.

클레어의 머릿속에서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 번도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는 미공개 곡.

수많은 복원 전문 음악가가 함께했지만, 정보가 없다시피 한 곡이라 매번 복원에 실패한 곡이었다.

그런데 그런 곡을 이안은 평소에 연주해온 체르니, 하농 치듯이 펼쳐내고 있었다.

놀라워함도 잠시 어느덧 이안은 사료조차 남아있지 않던 4악장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고전의 연주가 규칙의 시대라곤 하지만…’

제4악장은 제1악장을 이어받되 변주를 통해 차별점을 둔다.

곡의 완성도를 채우기 위해 고전 시기에 주로 행해졌던 소나타 형식.

마치 과거를 답습하듯 1악장의 화음이 4악장에서도 반복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반복되는 것이지, 같은 것이 아니다.

같은 코드라도 주법에 따라 선율의 차이는 수만 가지.

그중에서 기존의 선율에 어울리는 주법을 찾고, 그에 맞는 오른손 멜로디를 펼치는 것은 높은 난이도를 자랑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아무런 메모도, 사전 연습도 없이 곧바로 해낸다고?’

클레어는 도무지 이성적인 생각으로 이안의 연주를 바라볼 수 없었다.

이미 하르모니아의 일을 들었고, 바다 건너 카타리네 스튜디오 연주회에서 펼쳤던 활약상도 익히 들은 그녀였건만.

그것을 직접 목도하는 클레어의 입은 뻐끔거릴 뿐이었다.

말도 안 돼.

그 말 밖에 머릿속에서 맴돌지 않았다.

연주를 이어가는 이안의 모습은 머릿속에 모든 악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열성적인 연주를 이어가는 이안의 모습은 신예 예술가를 너머 한 명의 거장을 보는 느낌이었다.

‘거장이 현신을 한 것 같아.’

고전의 인물을 그대로 옮겨오는 것과 같은 착각.

그러면서도 클레어는 작은 의문이 떠올랐다.

과연 누가 현신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베토벤? 아니면 로만 슈트라우저?

그러나 연주가 이어질수록 클레어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안이 두 사조를 모두 펼치고 있었으니까.

형식 속에서 꽃피는 베토벤의 변주와 감성이 가득 담긴 로만의 기교.

서로 다른 색채의 특성이 한 명의 손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마치 고전과 낭만의 과도기를 직접 겪은 사람처럼.

이안의 연주에는 형식에 담긴 굳센 의지와 함께 낭만이 가진 유려함이 동시에 들어가 있었다.

확신에 가득 찬 선율에 클레어도 동조하듯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거다!’

수도 없이 많은 미완성곡을 마주하고, 의뢰를 통해 완성했던 클레어였다.

하지만 수많은 전문가들을 만났던 그녀의 소견이 가리키는 것은 단 하나.

이안의 연주는 가능성을 뛰어넘다 못해 당대를 가장 가깝게 재현하고 있었다.

하르모니아 음반사와 함께 만든 <죽음>을 보고 나서야 결정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느덧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복원에만 며칠씩 걸릴 것이라 예상했던 것을 이안은 즉석에서 선율을 창작하고 연주를 펼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특별전 무대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깔끔한 선율과 연주.

이안이라면 할 수 있다.

곡의 권한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이 곡, 이 연주는 보존되어야 한다.

그것이 클레어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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