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오후 7시.
평소 같으면 이미 사람들이 퇴근을 하여 조용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비엔나 하르모니아 회의실은 그 어떤 때보다 엄중한 가운데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베토벤 재단의 클레어가 떠나가고 난 후.
급히 회의를 소집한 것은 총괄 디렉터인 레일라였다.
“무슨 안건인데 이 시간에 회의를 소집하셨습니까?”
“한국의 박이안 피아니스트와 관련된 것입니다.”
레일라의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누구던가.
슈트라우저 가문의 미완성곡을 완성하며 세간의 화제를 모으고 있는 천재 피아니스트.
벌써부터 앨범이 언제 나오냐는 연락이 쇄도하고 있었다.
비엔나 하르모니아 사측에게는 무척 좋은 소식이었다.
“혹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작곡가 질문에 장내의 사람들이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레일라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레일라의 반응에 사람들이 다행스럽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레일라의 말은 다른 의미로 장내 사람들의 얼굴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베토벤 재단 측에서 이번 특별전에서 공개할 베토벤의 미완성곡을 의뢰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이안과 클레어가 작업실에 있는 동안 함께 있던 레일라였다.
늦은 시간까지 <죽음> 작업을 하고 있던 중 클레어가 찾아온 것이라 레일라는 자연스레 이안의 연주는 물론, 클레어의 제안까지 모두 들은 장본인이었다.
“그의 연주는 대단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베토벤의 미완성곡을 아무렇지 않게 채우던 이안의 모습.
이미 이안의 실력을 알고 있던 레일라도 소름이 돋게 만든 모습이었다.
지금 이안이 펼친 슈트라우저의 미완성곡도 경이로울 정도인데.
베토벤의 연주까지 완벽하게 재현하는 이안의 모습에 레일라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런 모습에 건넨 클레어의 제안은 더욱 파격적이었다.
“특별전 라이브 무대는 물론, 이안을 전폭적으로 서포트하겠다는 의사를 전했습니다.”
하르모니아 측에서 건넨 제안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고전과 낭만의 과도기 예술가인 로만의 곡을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 그 소유권을 이안에게 위임한다는 것.
신예 피아니스트에게 주어질 수 있는 권한을 아득히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베토벤 재단에서 건넨 제안은 무려 베토벤의 곡이었다.
전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것이 힘든 거장, 베토벤.
급을 논하는 것에서부터 이미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거물이었다.
게다가…
“베토벤의 미완성곡에 대한 전권을 이안씨에게 위임하겠다더군요.”
그 정도라고?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 의문이 가득 맺혔다.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베토벤 재단의 힘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빈을 넘어서 오스트리아 전체의 예술 후원의 모체를 대자면 곧바로 베토벤 재단을 거론할 수 있을 정도.
그런 거대 재단이 이안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화제에 오를 수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재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안의 연주를 들은 몇몇 사람은 그럴만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 회의를 소집한 본 이유가 무엇인가요?”
프로듀서 중 하나가 레일라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녀는 무척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모두에게 생각을 전했다.
“베토벤의 미완성곡을 자작곡 앨범에 수록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싶어서입니다.”
레일라의 선언에 장내에 있던 사람들이 술렁였다.
반은 가능할까 하는 의문으로, 반은 가능하다면 놀라운 일이라는 경외감으로.
베토벤의 미완성곡이라면 세상에 공개된 적이 한 번도 없는 곡이리라.
그런 곡을 첫 공개 한다는 것.
이안의 명성과 함께 비엔나 하르모니아가 최정상들 사이에서 우뚝 솟을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을 정도로 큰 사안이었다.
지금껏 없던 중대한 제안에 사장 또한 열의 있는 태도를 보였다.
“이곳, 빈에서 독주회를 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어떤가.”
사장의 말에 많은 이들이 반색하며 밝은 표정을 내보였다.
이미 자작곡 독주회를 기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들은 모두 좋은 생각이라며 입을 모았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혼이 담긴 오스트리아 빈.
오스트리아 빈이 클래식의 성지라는 것은 누구 하나 반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곳에서 독주회를 연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큰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지는 음반사 식구들이 더욱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대한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가 매니저를 자처하고 있다 하더라도, 빈에서 독주회를 열기 위해선 단순 정보 이상의 것들이 필요한 터.
장소 섭외를 시작으로 홍보, 협찬, 등 비엔나 사정을 모두 꿰뚫지 않는 이상 단독으로 해외 독주회를 개최하는 것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 확신했다.
모든 수단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면 되지 않겠냐며.
이안을 설득하기 위한 갖가지 이야기들이 회의장을 뜨겁게 달궜다.
***
베토벤 재단의 제안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었다.
베토벤의 미완성곡의 부족한 악장을 채워준다면 곡에 대한 권한을 온전히 나에게 주겠다고.
거기다 재단에서는 내가 특별전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연주회를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덧붙였다.
수많은 클래식 팬들이 모인 특별전에서 연주를 펼치면 상상 이상의 관심이 나에게 쏠릴 것이다.
세상에 베토벤을 모르는 이는 몇 없을 테니까.
특별전에 온 손님에게 내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일 터.
게다가 클레어가 의뢰한 다음 날, 레일라는 곧바로 새로운 제안을 건넸다.
“이안씨, 이번에 의뢰받은 베토벤의 곡을 앨범에 수록하게 해주신다면 저희가 독주회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미 큰아버지와의 미팅을 통해 내 독주회 계획을 들은 그들이었다.
베토벤의 미완성곡까지 합치면 독주회를 위한 자작곡 8개가 완성되지 않느냐고.
클래식의 본고장인 빈에서 독주회를 여는 것은 어떻냐고 제안한 것이다.
장소 섭외와 홍보, 협찬, 등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고.
<영감>과 <죽음>, 거기다 베토벤의 미완성곡을 더해 3곡의 수록곡을 담은 앨범을 만들도록 허락해준다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오스트리아에서의 독주회라.’
무척 좋은 기회인 것은 사실.
단순히 전생의 기억이 머문 곳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다.
이곳은 유명한 거장들이 나고 자란 터전이자 클래식의 본고장이니까.
그러한 곳에서 독주회를 연다면 누구보다 클래식에 열성적인 사람들이 몰릴 것이다.
게다가 앨범과 더불어 하르모니아 음반사와 더욱 두터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르모니아와 손을 잡는다면 비엔나에서의 인프라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리라.
좋은 기회를 수렴하는 것과 더불어 나는 레일라에게 하나 더 제안을 건넸다.
“저희가 보관하고 있는 미완성 악보들의 열람권이요?”
“네. 이번 곡처럼 새로운 영감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죽음>은 물론 베토벤의 미완성곡도 모두 완성되지 않은 채 방치된 곡들.
하지만, 완성하지 않았다고 해서 좋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연주하고 듣는 것만으로도 영감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치는 것만으로도 화제성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베토벤의 미완성곡을 연주한다는 소식에 곧바로 하르모니아 측에서 접근해왔던 것처럼.
내 제안에 도리어 레일라가 반기는 기색이었지.
“미완성곡을 검토해준다면야 저희야 고맙죠.”
사실상 사용할 수 없는 곡일 테니까.
로만이 발표한 신곡 시리즈에서 <죽음>이 빠진 이유도 그것일 테지.
곡을 만드는 과정이 아름답다고 해도, 미완성곡이 작품성이 없는 것이 아닐지라도.
미완성은 결국 미완성.
완성된 것을 펼쳐야 하는 입장에서 미완성곡들은 고물이나 다름없을 테지.
미완성곡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당대 사조를 이해하고, 작곡가의 특색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만으로도 사측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올 터.
내가 미완성곡을 열람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달콤한 제안일 것이다.
그들에게 내 실력으로 만들어낸 기회를 제공하고, 나는 비엔나에서의 인프라와 수많은 미완성곡을 얻는다.
성공적인 투자라는 생각에 손가락이 더욱 빨라진다.
***
“제수씨. 얼굴이 확 폈습니다.”
“이안이 덕분이죠 뭐.”
이안과 일행들이 비엔나에 온 지도 벌써 나흘 정도가 지났다.
사토라의 인솔로 빈에 존재하는 예술가의 흔적을 둘러보는 것은 물론, 이안이 앨범 작업을 준비하면서 하르모니아 음반사의 전반을 둘러볼 수 있었다.
어깨 너머로 앨범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실무적인 정보와 하르모니아 음반사가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이안의 손님이라는 말에 은희가 묻는 질문에도 음반사 관계자들은 친절히 설명을 곁들였다.
관심 있던 것들을 하나씩 습득하는 재미에 돌아다니느라 은희의 발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따끔한 발을 쓰다듬으면서도 은희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있었다.
“아주버님도 매니저 일은 할 만하세요?”
“저야 뭐. 별 하는 게 있나요.”
은희는 아니라며 현철을 나무랐다.
이번 하르모니아와의 협상을 이끌어낸 장본인 아니냐며.
은희는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었다며 일부 공을 현철에게 돌렸다.
“모두 이안이 잘해서 아니겠습니까.”
현철의 말에 은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와서 느낀 것을 나열하라면 대부분 놀라움밖에 없었다.
하르모니아에서 공개하지 않은 곡을 척척 연주하는 이안의 모습은 은희마저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니까.
신곡에서 제시된 심연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는 설명에 현철 또한 동의했다.
어디 그뿐만이랴.
“베토벤 재단과도 협의를 끝마쳤죠?”
은희의 물음에 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모니아 음반사와의 협업에 이어 이번에는 베토벤 재단까지.
클래식을 수학했던 은희 또한 베토벤 재단이 가진 힘을 잘 알고 있었다.
내로라하는 거대 연주회가 있다면 후원사에 재단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특별전의 라이브 무대까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동등한 자격으로 무대를 오른다는 소식에 은희는 그 자리에서 놀랐던 기억이 선명했다.
불과 몇 달 전에는 입단 제의를 건넸던 오케스트라였건만.
이제는 같은 무대에서 각자의 연주를 이어간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게다가 이번에 하르모니아 측에서 새로운 제안을 주었습니다.”
“베토벤 미완성곡과 관련된 사안이죠?”
베토벤 미완성곡을 이번에 준비하고 있는 자작곡 앨범에 넣으면서 비엔나에서 독주회를 전격 지원하겠다는 말.
현철도 하르모니아에서 먼저 연락을 할 줄은 몰랐었다.
독주회와 관련된 사안들을 검토하고 있던 현철마저 좋은 기회라며 인정할 정도였으니까.
무엇보다 비엔나에서 깊게 뿌리를 내린 하르모니아 음반사였으니까.
그들이 가져올 인프라는 상당할 터.
엄청난 인프라에 클래식의 본고장이라는 지휘.
그것만 고려해도 성공적인 독주회는 따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빈에는 조금 더 머물러야겠네요.”
“그렇죠. 추가된 경비에 대해 베토벤 재단에서 전부 지원하겠다더군요.”
은희가 몰랐던 소식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카타리네 시사회를 위해 갔던 호텔이 모든 경비를 지원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베토벤 재단이 앞선 경우처럼 특별전까지 남은 2주를 모두 지원하겠다고 나선 것.
은희는 얕게 탄성을 질렀다.
자신과 남편은 지금과 같은 경험을 누린 적이 있었던가.
동서양에 통틀어 꽤나 이름을 날렸던 부부도 이 정도의 대우는 받은 적이 몇 없었다.
특급 예술가를 대하는 것처럼.
그 대우를 이안은 피아노를 잡은 지 1년 만에 받고 있었다.
“앞으로 더욱 성장하겠죠?”
현철은 응당 그렇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끄덕임에는 당연함과 동시에 앞으로의 기대감도 맺혀있었다.
세계를 아우르는 음반사는 물론, 클래식 본고장의 거대 재단까지.
이제는 어떤 존재를 아군으로 만들지.
현철은 이안의 예술가적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