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79화 (79/250)

79화

‘시간이 벌써…’

작업실에 창문이 없던 터라 시간이 흐르는 줄 모르고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분명 레일라와 함께 작업실에 들어왔던 것은 저녁 즈음이었는데.

지금은 새벽녘을 넘어 아침에 다다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났음을 깨닫자 그제야 몸에서 항의하는 아우성을 보내왔다.

하지만, 정신은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죽음>을 완성했으니까.’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던 7번째 자작곡, <죽음>.

지금껏 썼던 곡들 중 가장 낮고 장엄한 선율이 또렷하게 각인된다.

장송곡처럼 흐르는 우울한 음색은 마치 세상에 이별을 고하는 장송곡 같다.

연이어 연주될 <지옥>과도 연결성이 부여되고 나서야 <죽음>의 악보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제는 베토벤의 곡을 시작할 차례겠지.’

클레어가 건네고 간 베토벤의 미완성곡.

베토벤이 죽기 직전까지 작업했던 곡의 오선지가 전생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나는 전생이 기억하는 베토벤을 차근히 떠올렸다.

거장의 외모와 성격, 건반을 누르던 습관과 그에 맞춰 피어오르는 선율까지.

세세한 것들까지 전생의 기억 속에 담겨 있다.

‘환경을 사랑한 베토벤이라…’

기억을 떠올리며, 내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천천히 움직인다.

전생의 기억 속 베토벤은 자연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혼자 산책을 가는가 하면, 자연과 대화한다는 표현까지 사용했던 거장.

그의 6번 교향곡, <전원>에서는 그러한 면이 가장 잘 드러났다.

자연 그대로를 그리기보다는, 자연을 목도한 자신의 감정을 나타낸 곡.

내 눈앞에 있는 미완성곡도 비슷한 주제로 만들어진 곡이었다.

‘다만, 이건 외출도 제대로 못 하는 시기에 쓴 곡이지.’

배 속에 차오르는 복수(腹水) 때문에 바깥출입도 어려웠던 베토벤이었기에.

전생의 기억에 남아있는 베토벤의 목소리는 다소 처량함이 느껴졌다.

“내 몸이 이리되고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자연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일세.”

로만을 향해 이야기하던 베토벤.

자연을 사랑하던 그였건만, 베토벤이 볼 수 있는 자연은 창문 너머로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자연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만이라도 다행이라고.

자연을 바라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제1악장에서 피어오른다.

베토벤의 발걸음을 상징하듯 느린 베이스와 함께 바깥의 풍경이 펼쳐지듯 빠른 멜로디가 흐른다.

당대에 획기적이었던 6/8박자를 자유자재로 다룬 음표들.

빠른 선율임에도 다소 느린 왼손 화음이 베토벤의 답답함을 대면하는 듯하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그것을 직접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

1악장과 2악장의 주제.

베토벤의 성심을 그대로 내비치듯 답답하면서도 서글픈 선율이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베토벤은 2악장 말미에 또다른 변주를 제시하고, 3악장을 통해 주제의 반전을 모색했다.

그러한 반전의 묘미를 가진 3악장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은 것.

베토벤이 채우지 못한 그 빈자리를 전생의 기억은 가지고 있었다.

‘베토벤은 안타까워도 그것을 받아들였어.’

변주라는 베토벤의 특색이 가장 빛을 발하는 제3악장.

전생의 기억에 힘입어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인다.

자연에서 꽃이 피고, 지고, 이듬해에 새로운 꽃을 피우듯이.

베토벤은 죽음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쿨럭. 참으로 신기하지 않나. 내가 그리 경외하던 자연에 나 또한 속해있다는 것이. 그 섭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수많은 곡들을 완성하지 못했다면 아쉬움이라도 들 법한데.

전생이 마지막으로 목도한 베토벤은 나직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미완성곡을 완성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처럼 보였다.

곡을 완성해줄 것이라는 바람.

거장의 바람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이뤄지고 있었다.

전생이 목도한 베토벤을 떠올리며 연주를 이어가서일까.

내 손가락은 어느덧 3악장을 넘어 4악장까지 연주하고 멈춰있었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오선지의 향연.

나는 펜을 잡고 그것을 현실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악보를 모두 채운 나는 첫 장으로 돌아와 가장 윗부분, 제목을 채워넣기 시작했다.

<조우(遭遇)>

과거와 현재의 만남이라는 특별전에 가장 어울리는 제목이자, 베토벤과 전생의 만남을 기념하는 제목이었다.

***

전시회를 하루 앞둔 시일이었지만, 전시회장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시품들을 점검하고, 불편한 것이 없는지 확인하는 작업.

나 또한 연주의 리허설을 위해 참석한 상태였다.

“어서 와요 이안씨. 미리 보내준 악보 무척 잘 받았어요.”

클레어의 입에서 여러 평들이 흘러나왔다.

이 정도로 완성도 높은 복원 악보는 처음이라고.

그동안 복원했던 악보들은 조금이라도 사료가 남아있어 맞추는 것이 가능했는데, 이번 미완성곡은 그런 것이 없어서 애를 먹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녀는 리허설 시간을 조금 앞뒀으니 전시회를 먼저 구경해보는 것은 어떻냐고 제안했다.

“이번 특별전에서 재단이 가진 대부분의 유산을 선보일 계획입니다.”

클레어의 말대로 유리 격벽에는 베토벤의 유산들로 가득했다.

당대에 그린 초상화는 기본.

그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악기들과 옷, 등 박물관에서 볼 법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중 내 눈을 가장 끌어당긴 것은 악보들이었다.

“베토벤이 생전에 남긴 악보들인가요?”

“네.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곡들의 원본 악보들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악보들을 감상했다.

내가 청악 콩쿨에서 연주했던 <합창> 교향곡을 비롯하여 수많은 베토벤 표 소나타들.

게다가 베토벤의 곡 중 단연 탑인 <월광>의 악보도 전시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곡들의 원본들.

날렵한 그의 필체가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강렬하게 보였다.

감상을 이어가던 와중, 악보 하나가 내 눈썹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저게 왜 여기 있죠?”

“네?”

나는 악보 하나를 가리켰다.

겉보기엔 주변에 있는 다른 악보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악보.

당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듯 누렇게 바랜 종이와 유려하게 적힌 독일어.

하지만, 나는 그 악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한국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명곡, <엘리제를 위하여>였다.

“무척 유명한 작품이죠. 특히 한국에서 성행했다고 들었는데…”

“네. 그런 명곡의 악보가 원본이 아닌 필사본으로 나와 있어서 조금 아쉽네요.”

내 말에 놀란 클레어가 헛기침을 쏟아냈다.

이내 그녀는 평정을 되찾으려는 듯 심호흡을 하곤 차근히 질문을 던졌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물어도 될까요?”

“우선 베토벤의 필체와 달라요.”

베토벤은 당대에도 정평이 난 악필가였다.

자신만 알아보는 것이냐며 푸념을 하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휘갈겨 쓴 악보는 의도적으로 남긴 부분인지, 아니면 지우기 위해 삭선을 그은 것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

베토벤의 미완성곡이 연구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엘리제를 위하여>는 최대한 따라 한 것으로 보이지만, 비교적 구분이 쉽도록 일부분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게다가.

“저 부분은 데크레센도가 아니라 악센트가 더욱 어울리는 부분인데, 필사 과정에서 데크레센도로 변경된 것으로 보이네요.”

전생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엘리제를 위하여>는 현재 사람들이 아는 것과 음색이 조금 달랐다.

반복되는 멜로디의 반복에 변화를 주기 위해 베토벤은 후반부에 동일한 멜로디에 악센트를 부여하여 선율의 강세를 더했다.

현대에는 그저 잔잔한 선율로 알려져 있지만.

당대의 <엘리제를 위하여>는 꽤나 격정적이고 변주를 좋아하던 베토벤의 성정이 고스란히 담긴 곡이었다.

내 말을 듣던 클레어가 어안이 벙벙한 듯 눈을 끔뻑이다 말을 이었다.

“대단하네요 이안씨. <엘리제를 위하여>는 모든 사람이 알 정도로 유명한 곡이지만, 지금껏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클레어는 결국 진실을 털어놓았다.

최악의 악필가라고 소문난 베토벤으로 인해 현대는 물론, 이전에도 복원가들이 애를 먹었다고.

특히 내가 지적한 악센트와 데크레센도는 길이의 차이를 제외하면 다른 부분을 찾을 수 없었기에 더욱 구분이 힘들었다.

베토벤의 곡들은 대부분 완성도가 무척 높아서 두 기호 중 어느 것이 들어와도 멜로디에 손색이 없었기에.

복원가들이 베토벤의 필체 때문에 애를 먹곤 했다고.

최근 <엘리제를 위하여>가 학계에서 재조명되면서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아마 몇달만 더 지나면 내가 말한 것이 진실이 되어 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라고.

클레어는 전문가도 오랜 시간 연구하여 알아낸 사실을 단박에 맞췄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안씨의 연주가 더욱 기대되네요.”

클레어가 기대감을 내비침과 동시에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리허설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연주회장으로 이끄는 클레어의 발걸음이 이전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

전시회장 한쪽에 마련되어있던 강당.

관객 1,000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나를 비롯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펼쳐질 것이라고.

‘비엔나 사람들에게 내 존재를 각인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

내게는 목표가 있었다.

<조우>를 연주하는 것뿐만 아니라 특별전에 찾아온 손님을 독주회 관객으로 만드는 것.

베토벤 미완성곡을 연주할 것이라는 기사에 벌써부터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으니까.

이 기회를 통해서 비엔나에서 눈도장을 찍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리라.

하르모니아 음반사에서 비엔나에서 독주회를 치를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으니.

특별전에서 선보이는 연주 자체가 홍보가 되어 자작곡 독주회를 더욱 빛낼 수 있을 것이다.

독주회를 떠올리던 내 시선이 자연스레 무대로 향했다.

리허설 준비로 공간은 다소 어수선했지만, 무대 중간에 있는 피아노는 굳건함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연주해주길 기다린다는 듯.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피아노의 외형이 반짝였다.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지네요.”

클레어는 악보를 꺼내며 감상할 준비를 했다.

악보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지금껏 본 복원작 중에 가장 베토벤스럽다고 표현했다.

그 베토벤스러움을 내 손으로 어떻게 피워낼지 궁금하다며.

클레어는 빨리 연주를 보여주라는 듯 무대에서 내려와서 리허설 준비를 진두지휘했다.

그녀의 요청에 따라 삽시간에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스포트라이트가 나에게 떨어졌다.

장내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향했다.

‘아마 다들 전문가들이겠지.’

관객석에 앉아있는 몇몇 사람들.

그들의 눈망울에는 단순한 기대감 이상의 것들이 담겨 있었다.

베토벤 재단에서 나온 사람들인 만큼, 클래식에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들이리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피아노를 수학하며 여타 예술가보다 베토벤의 특색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리허설은 더욱 특별했다.

연주 실력에 더불어 고전의 사조를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 선보일 수 있는 자리.

사람들의 기대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할 일은 단 하나.

‘내가 완성한 베토벤의 미완성곡을 펼친다.’

나는 곧장 건반에 손가락을 얹은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머릿속에 담긴 <조우>의 악보와 함께 전생의 기억 속에 남은 베토벤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그러한 베토벤의 감성을 그대로 녹여낼 수 있도록.

기억을 고스란히 담은 손길이 건반에 뻗어나간다.

창문 너머로 자연을 탐닉했던 베토벤의 아쉬움.

베토벤의 낭만을 담은 제1악장이 강당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다.

연주에 따라 내 머릿속에는 전생의 기억들이 물씬 올라온다.

방 안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영위하며 로만이 방문할 때마다 창밖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네던 베토벤.

전생은 로만을 맞이하는 베토벤의 눈망울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거장은 자신의 삶을 비루하다며 탓하거나 평가절하하지 않았다.

‘순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던 거장.’

베토벤의 특색은 제3악장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창문으로 바라본 환경으로 깨달음을 얻었던 것을 펼치는 악장.

전생의 기억 속 베토벤이 로만에게 건넸던 말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자연은 참으로 신기한 존재일세. 겨울이 되면 모든 것이 죽음을 맞이하더니, 봄이 되면 다시금 모든 생명이 움트지 않는가.”

자연이 가지는 순환성.

베토벤은 그것이 음악의 형식과 닮아있다고 했다.

1악장의 선율이 4악장에서 유사하게 펼쳐지는 고전 특유의 형식이 자연과 닮았다고.

그래서 음악은 무척이나 자연적인 것이라고 평했다.

음악이 서장을 시작으로 종장을 맞이하듯, 사람과 자연도 시작과 끝이 존재한다고.

그러니 자신은 두렵지 않다고.

육신은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자신이 내놓은 음악들과 사조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희망이 3악장과 4악장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베토벤, 당신의 말이 맞네요.’

그가 예견했듯, 베토벤의 곡은 현재까지도 유지되었다.

수많은 명곡에 더불어 미완성곡까지 현대에 와서 새롭게 펼쳐지고 있으니까.

베토벤의 성향을 그대로 반영한 변주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그에 맞춰 손이 바삐 움직이면 다양한 화음들이 퍼져나간다.

슬쩍 바라본 사람들의 표정은 경외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정말 이것이 며칠 만에 완성한 곡이냐며.

클레어를 시작으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베토벤이 전하지 못한 이야기가 현대에 이어지고 있는 현실.

현대에서 재창조된 <조우>가 점차 강당을 베토벤 특유의 사조로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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