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80화 (80/250)

80화

리온 베르젠데르크.

피아노계에서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비엔나 정신을 계승한 오스트리아의 명문 피아노 제작 명가(名家), 베르젠데르크 가문의 후손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피아노 장인.

전통 수작업을 고집하여 만든 피아노는 가히 ‘명품’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로 인해 대대로 거장들의 피아노를 만들며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것도 옛날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그 때문에 가문의 마지막 장인인 리온에게도 고민이 많았다.

‘어찌하면 침체된 가세를 부흥시킬 수 있을꼬.’

클래식 수학하는 사람들은 보통 높은 가격의 악기를 보유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아마티, 스트라디바리우스, 등 바이올린 명가의 악기는 수백은 물론, 수천을 호가하는 것이 다반사.

피아노도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현악기와 달리 피아노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었다.

‘한 번 사면 이동시키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니…’

첼로나 더블베이스와 같은 악기들도 무겁긴 하나, 사람이 혼자 들 수 있는 규모.

그래서 클래식 거장은 물론, 수학하는 학생들도 제대로 된 악기를 구매하여 들고 다니곤 했다.

하지만, 피아노는 옮길 수 없으니 거장들을 제외하면 판매처가 마땅치 않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공장제 피아노가 더욱 우세를 보였고, 최근에는 전자 피아노가 업계를 장악하고 있는 상태.

장인 가문으로서 피아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리온이 만난 것이 바로 이안이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청년일세.’

피아노 협찬 건으로 특별전 리허설에 참석한 리온이었다.

하얗게 센 수염을 쓰다듬던 리온은 이안의 연주를 지켜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소식을 전해 들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유려한 손가락의 움직임과 거침없이 강세를 주는 모습은 리온이 자주 마주하는 거장들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게다가 첫 연주를 끝내고 이안은 곧바로 조율사를 불렀다.

“음색을 조율하고 싶은데요.”

이미 이안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던 리온이었다.

살리에리의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다뤘다는 소식은 이미 비엔나에 퍼진 지 오래였으니까.

다만, 이안의 요청이 이리도 상세할 줄은 리온도 예상하지 못했다.

리온과 동행한 베르젠데르크 측 조율사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이안이 원하는 조율은 고전 시기에 가까운 선율이었다.

아무리 거장이라 하더라도 고전의 음색을 원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현대의 선율과 차이가 있어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 어려움을 줄 수 있기 때문.

하지만, 이안은 전혀 개의치 않고 베토벤이 살았던 시기와 가장 근접한 스타일의 조율을 주문했다.

직원이 조율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리온의 머릿속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이걸 잘 살릴 수 있을까?’

그간 이안이 펼친 행보와 뚝심은 이해하지만,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베토벤 특별전에 오는 손님들은 단순한 관객들이 아니었다.

대부분 클래식에 대한 조예가 깊은 사람들.

빈에 거주하는 모든 예술가가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나 다름없었다.

그런 이들이라면 단박에 조율의 차이를 눈치채고 이상하다고 느낄 것이라고.

이안의 행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특별전 당일.

본 무대가 펼쳐지자 리온의 예상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허. 이것 참.’

감탄 말고는 더 이상의 평이 떠오르지 않았다.

리온도 가문의 유지를 잇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던가.

미세한 해머의 조정, 핀을 돌리는 미세한 차이로 소리가 바뀌는지 이해하는 데 몇 년을 소비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

하지만, 리온이 알기에 이안은 피아노를 수학한 지 이제 갓 1년이 지난 청년이었다.

그런 청년이 조율의 차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에 맞는 선율을 펼친다.

빈 필하모닉의 마에스트로인 레오 앤더슨마저 입을 벌리고 구경하게끔 만드는 연주.

장인인 그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안의 모습에 리온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 청년에게 피아노를 제작해준다면 큰 홍보 효과를 노릴 수 있지 않을까?’

그 누구보다 피아노의 선율을 잘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아는 청년이니까.

전통 수작업에 독특한 음색을 지닌 베르젠데르크 피아노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존재가 이안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앞으로 거목이 될 잠재력이 충분한 피아니스트에게 피아노를 제공하고, 이를 침체된 사업의 부흥책으로 활용한다.

리온의 확신에 힘을 불어넣듯.

이안의 <조우>를 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

한국의 박이안, 베토벤 특별전에서 베토벤의 미완성곡을 처음 발표하여…

베토벤 제단, 곡의 전권을 박이안 피아니스트에게 준다고 발표하여 현재 화제 중.

<조우>라는 이름으로 재탄생된 베토벤의 유산. 박이안 독주회에서 다시금 선보일 것이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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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이 끝나기 무섭게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나왔다.

클래식의 본고장인 빈에서도 이안의 행보를 주목하고 있다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시선들이 이안에게 꽂히는 순간이었다.

클레어는 성공적인 특별전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이안의 연주를 특히 대서특필하여 소개했다.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연주였습니다. 아마 평온의 뜰에 계신 거장께서도 감동하셨을 겁니다.”

베토벤을 직접 거론하면서까지 찬사를 보낼 정도.

클레어는 시작에 불과했다.

자리에 함께했던 쇼팽 콩쿨의 우승자, 사토라.

이안과 같은 자리에서 관현악단을 이끌었던 빈 필하모닉의 마에스트로, 레오까지.

특별전을 방문한 세계의 음악 거장들이 이안들의 연주에 대한 호평을 늘어놓았다.

그들 중 독주회 소식을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이 기대한다는 말을 덧붙이자, 이안의 자작곡 독주회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에 맞춰 하르모니아 음반사에서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레일라는 이안이 만족할 만한 무대를 찾았다며 들뜬 기색을 내비쳤다.

“아마 독주회를 이곳에서 하는 사람은 이안씨가 처음일 겁니다.”

운전대를 잡은 레일라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대단한 곳에서 먼저 연락이 온 것은 처음이었다고.

‘그곳’에서 독주회를 펼칠 이안의 모습이 기대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대체 어디길래 하르모니아의 괴짜라고 불리는 레일라가 이리도 흥분한 것일까.

작은 의문을 품던 현철은 목적지에 도착하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긴 빈 국립 오페라극장 아닙니까?”

음악의 도시, 비엔나를 대표하는 3대 건축물 중 하나.

빈에서 최고의 무대를 꼽자면 단번에 빈 국립 오페라극장을 꼽을 수 있으리라.

총 2,200여 개라는 어마어마한 관객석을 자랑하는 초대형 극장.

숱한 거장들의 오페라와 관현악단들의 무대가 펼쳐진 곳.

현철의 가슴 한편마저도 뜨겁게 만드는 무대였다.

오스트리아 빈이라는 클래식의 고장이라는 특색과 더불어, 독주회를 오페라극장에서 열었다는 전례 없는 커리어.

그런 거대 무대를 빌렸다는 것에서 비엔나 하르모니아의 저력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레일라는 자신들보다 이안의 덕이 컸다며 공을 돌렸다.

“빈 필의 마에스트로께서도 한몫하셨습니다. 이미 이안씨와 인연이 깊다고 하더군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빈 국립 오페라극장의 전속 관현악단.

레일라는 기존의 이안의 명성에 힘입어, 마에스트로 레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그 이외에 모든 인프라를 지원하겠다고.

필요한 것이 있냐는 말에 현철은 곧바로 피아노를 떠올렸다.

“피아노는 네 걸로 할 거냐.”

현철의 물음에 이안은 그럴 수 있다면 그리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가장 익숙하고 선율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개인 피아노.

그동안 숱한 곡을 만들어온 피아노인 만큼, 자작곡들의 색깔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피아노이리라.

그러나 피아노와 같은 초대형 화물을 가져오는 것은 많은 과정과 절차가 필요한 작업.

게다가 피아노를 가져온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음색을 조율하거나 리허설까지, 최상의 상태로 점검하는 데 또 며칠이 걸리리라.

한 달 남짓 남은 자작곡 독주회 일정에 맞출 수 있을지 관건이었다.

피아노와 관련된 얘기에 레일라가 조심스레 말문을 이었다.

“현지에서 많은 피아노 제작사가 러브콜을 보내왔는데, 그쪽을 고려해보는 게 어떤가요?”

레일라의 말에 현철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에게 날아온 피아노 제작 제의도 수십 개.

모두 내로라하는 피아노 제작 전문 업체들의 연락이었다.

개중에는 거장들의 피아노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장인들의 연락도 있었기에.

현철은 한국에 있는 수철에게 피아노 이동 여부를 확인함과 동시에 현지 업체가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검토하겠다고 덧붙였다.

무대와 피아노, 기타 협찬 물품까지 모두 상의를 마친 후.

중요한 것이 하나 남아있었다.

“입장료는 오페라극장의 기존 금액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레일라의 말에 현철은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료는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아무리 비엔나 하르모니아가 모든 지원을 제공한다고 해도 자선사업가는 아니기에.

입장료는 이안에게 투자한 금액에 대해 최소한의 금전 회수를 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한화로 최소 1~2만 원, 최고 가격은 20만 원을 필적하는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좌석.

현철 또한 합리적인 계산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안의 생각은 레일라와 달랐다.

“티켓값을 받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안의 말에 레일라는 물론, 현철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티켓값을 받지 않겠다니.

게다가 이어진 이안의 뜻은 두 사람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독주회를 유튜브로 생중계할까 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듣길 원한다고.

연주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에 대한 한계를 정하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본래 앨범에서도 곡을 미완성이란 타이틀로 공개하자고 하지 않았냐며.

독주회는 그 미완성을 완성으로 탈바꿈하는 무대인 만큼 모두가 연주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이안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차마 말을 건네지 못하는 레일라를 대신해 현철이 나섰다.

티켓값은 단순히 금전적인 것으로 얽힌 사안이 아니라고.

높은 금액의 입장료는 그 자체만으로 이안의 연주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연주를 느끼고 싶은 사람은 고가의 자리를 원할 터.

게다가 기본적으로 이러한 연주회는 티켓의 매진 속도, 판매량으로 그 성과를 집계하지 않던가.

하지만 티켓값을 아예 받지 않는다면 그러한 것들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진다.

이는 자칫 독주회 퀄리티나 가치가 떨어질 수 있는 중대 사안.

그러나 이안의 태도는 강경했다.

“상관없어요.”

담담한 이안의 표정에 여유로움이 맺혀있었다.

독주회의 퀄리티는 자신이 채우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

무대와 관객석 사이를 쳐다보는 이안의 눈길에 현철은 남몰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독주회를 무료로 연다고요?”

이안의 소식에 은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 또한 숱한 연주회와 독주회를 다녀본 사람으로서 입장료에 대한 현실적인 측면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상 연주회에 사용된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

그럼에도 이안의 태도는 완강했다고.

“더 많은 사람이 듣길 원한다더군요.”

현철이 전한 이야기에 은희는 더욱 동공이 커졌다.

독주회를 무료로 진행하는 것에 이어 유튜브로 라이브 송출까지 하겠다는 의사까지.

지금껏 음악 인생을 살아오던 은희도 본 적이 없는 행보였다.

‘도리어 잘된 것일지도 몰라.’

티켓값은 당사자의 연주를 사람들이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려주는 지표로 활용되곤 한다.

하지만, 유명 예술가의 티켓은 때로 암표로 변질되어 퍼지곤 한다.

마이너 좌석도 본래 티켓값보다 2~3배 가격으로 뛰거나, 무대와 가까운 자리는 5배를 호가하는 암표가 팔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것은 이안이 원하는 바에 저촉되는 행위일 터.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예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은희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럼 나도 보탬이 되어야겠지.’

이안이 원하는 것은 여러 사람에게 자신의 음악을 알리는 것.

은희는 이안을 응원하는 한 명의 예술가로서 그 의견에 동참하고 싶었다.

보다 많은 사람이 독주회를 볼 수 있도록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이안이처럼 유튜브를 만들어볼까?’

은희는 이안이 유튜브 영상을 올렸던 것을 떠올렸다.

이안의 곡을 직접 소개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아들의 음악을 커버하고 전파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커버 영상을 올린다면 독주회에 대한 관심이 더욱 집중될 것이라는 생각.

예술가에게 보탬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 은희는 오랜만에 플루트를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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