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빈 국립오페라극장을 비롯해 여러 협찬사를 다녀왔던 탓일까.
어느덧 해가 기울어져 있었다.
독주회 때 입을 의상과 무대 디자인, 등 수많은 계획들이 오갔던 날.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은 단연 극장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독주회를 무료로 진행하겠다는 말에 레일라는 물론 큰아버지도 난색을 표했으니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레일라가 아무 말 하지 못하는 사이, 나는 그녀에게 대안을 내놓았다.
“다음 앨범도 하르모니아와 함께하고 싶은데, 곡을 몇 개 정도 만드는 게 적당할까요?”
내 제의에 시시각각 얼굴이 변하던 레일라가 선명하다.
나 또한 티켓값이 주관사의 영업 손실을 최소화시킨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상대가 원하는 바도 이뤄주는 것이 인지상정.
레일라는 오히려 다음 앨범 제작을 확정 짓는 것을 반가워했다.
지금과 같은 관심이라면 티켓값과 비교할 수 없는 수익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며.
특별전을 비롯해 내 앨범 발매와 독주회 소식까지.
나를 향한 관심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머니도 한몫하실 줄이야.’
좀처럼 대중 매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어머니였다.
카메라 앞에선 부끄럽다며 요조숙녀가 되던 분이셨는데.
유튜브 영상 속 플루트를 든 어머니는 프로의 기질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제껏 내 곡을 피아노로 커버한 영상은 많았지만, 플루트로 커버한 영상은 처음이기에 신선하다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덕분에 영상 조회수는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었다.
거기다…
ㄴ 마지막 곡들 뭐임? 처음 듣는데?
ㄴ 이번에 비엔나에서 음반 작업 하는 곡이래요.
ㄴ 독주회 때 첫공개 한다는데, 현지 기대감 폭발 중.
ㄴ 게다가 독주회를 라이브로 공개한다고 함! 집에 앉아서 감상하면 됨.
<영감>과 <죽음>, <조우>.
아직 세상에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곡에 대해 사람들은 기대감을 쏟아냈다.
플루트로도 이렇게 웅장한 선율이 피아노로 옮겨지면 어떻게 될지 기대된다며.
이렇게 빠른 속도로 곡을 완성하는 내가 믿기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몇몇 사람들은 라이브 방송으로 진행한다는 말에 놀랍다는 말을 덧붙였다.
‘조금 갈피를 잡으신 듯했지.’
비엔나에 오고 난 후 어머니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간단한 관광 차 즐기시는 것 같던 어머니는 어느덧 음반사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앨범 작업을 할 때마다 어깨너머로 보는가 하면, 레일라나 다른 직원들에게 궁금한 것을 서슴없이 묻곤 하셨으니까.
단순한 음반 제작 과정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실무적인 것까지.
대부분의 답변을 한 레일라는 어머니의 안목이 무척 좋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레일라의 말에 어머니의 눈빛이 열의로 가득 찼던 것이 생생했다.
영상 속 어머니의 연주가 끝날 무렵.
내 눈길이 추천 영상으로 향했다.
익숙한 배경의 썸네일과 이름.
박이안 피아니스트 자작곡 모음 커버 (미공개 곡 포함).
피아니스트 주은미
어머니의 커버 연주는 시작에 불과했다.
영상을 통해 미공개 곡들을 알게 된 사람들이 하나둘씩 커버 영상을 올리기 시작한 것.
주수석님 같은 익숙한 얼굴부터 모르는 사람들까지.
조회수를 얻기 위해 재빠르게 커버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의 팬이라며 영상을 제작한 사람도 있었다.
각자 다른 목표를 가지고 영상을 올렸건만.
영상 댓글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독주회가 기대된다는 댓글들이 달리고 있었다.
***
‘놀랄 노 자로구만.’
은퇴까지 하며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현철이었다.
하지만, 이안의 매니저를 담당한 이후로 현철의 인생은 매번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눈앞에 있는 피아노부터가 놀람 그 자체였다.
“조금 어지럽긴 하지만, 들어오십시오.”
피아노 제작 명가인 베르젠데르크 공방에서 온 연락.
독주회에서 사용할 피아노에 대해 고민하던 차에 온 소식이었다.
대한 오케스트라에서도 욕심을 부렸지만, 이미 순서가 가득 찬 탓에 구하지 못한 베르젠데르크표 피아노.
그 피아노를 만든 리온 베르젠데르크가 현철 앞에서 이안의 칭찬을 늘어놓고 있었다.
“연주를 듣고 깨달았습니다. 이 피아노의 주인은 젊은 거목이라는 것을요.”
기업의 대표이자 장인인 리온 베르젠데르크는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철 또한 베르젠데르크 피아노의 품격을 잘 알고 있었다.
수많은 공장제 피아노가 판치는 세상에서 수작업 피아노를 고수하는 장인 기업.
새카만 본체에 은으로 도금처리를 한 것은 베르젠데르크 피아노만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아직도 특별전에서 선보인 이안의 연주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리온은 날렵하게 생긴 피아노를 볼 때마다 이안이 생각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게다가 이어지는 말에 현철은 숨을 들이켰다.
“아마 제가 마지막으로 만드는 피아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지막 역작.
수십년간 베르젠데르크의 버팀목이었던 리온이 은퇴를 밝히는 순간이었다.
리온은 오랜 세월 쌓아뒀던 자신의 노하우를 모두 쏟아부은 피아노라고 소개했다.
“저는 여기서 은퇴하지만, 이안씨가 베르젠데르크의 소리를 펼쳐준다면 이보다 후련한 은퇴는 없을 겁니다. 고맙다고 꼭 좀 전해주십시오.”
리온은 깊은 숨에서 후련함이 묻어나왔다.
이안이 자신의 역작을 통해 오랫동안 연주를 이어가길 바란다며.
앞으로 나아갈 이안을 진심으로 응원한다고 덧붙였다.
숱한 거장의 피아노를 만든 리온을 잘 아는 현철에게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비엔나에서 열리는 독주회도 모자라, 피아노 제작 명문가의 피아노 협찬.
그야말로 어마무시한 시작이었다.
‘벌써 독주회에 대한 기대도 올라가고 있거늘.’
하르모니아 음반사의 공식 독주회 소식과 함께 은희가 올린 자작곡 커버 영상은 커다란 관심을 모았다.
이어서 유튜브에서 꽤 큰 입지를 가진 주은미 또한 커버 영상을 업로드하며 자작곡 독주회에 대한 관심이 더욱 쏟아졌다.
거기에 더해 일부 연주 유튜버들이 이안의 이름에 힘입어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커버 영상을 업로드할 정도.
하루에도 수십 개에 달하는 자작곡 커버 영상이 업로드되고 있었다.
개중에는 현철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영상도 있었다.
‘빈 필에서도?!’
수많은 커버 영상들을 익히 봐왔던 현철이었건만.
레오가 올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커버는 예상 밖이었다.
마에스트로 레오의 지휘 아래 관현악단의 선율이 자욱하게 깔리는 영상은 현철도 숨죽여 보게 만들 정도였다.
게다가 빈 필은 끝까지 정통 클래식을 고수하던 보수 집단 아니던가.
다른 관현악단들이 뉴에이지곡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펼치며 대중에게 더욱 가까이 가려는 시도를 하는 동안에도 꿈쩍하지 않고 클래식으로 승부를 봤던 빈 필이었다.
그들의 변화가 말해주는 것은 둘 중 하나리라.
이안을 통해 빈 필도 변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통감했거나.
빈 필이 이안의 음악적 정통성을 인정했다는 말이거나.
‘어느 쪽이든 빈 필을 변화시킨 것만으로도 대단하겠지.’
오케스트라의 시조인 만큼, 빈 필의 유명세에 이안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벌써부터 빈 필의 팬들이 꿋꿋하던 빈 필을 변화시킨 당사자가 누구냐는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안의 팬인 일부 네티즌들이 이안에 대한 설명을 댓글을 달자 삽시간에 사람들의 관심이 이안에게 쏠렸다.
빈 필의 마에스트로가 오랫동안 눈여겨본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그 천재의 독주회가 한 달 남짓 뒤에 오페라극장에서 이뤄질 예정이라고.
말도 안 된다며 사람들의 댓글 반응이 잇따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은 맞지.’
누구보다 클래식 판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현철이었다.
국내 소식은 물론, 해외 소식까지.
그러나 그런 현철에게도 이안의 성장세는 이제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지 오래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말이 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 이안이 펼친 일들이었다.
피아노를 잡은 지 몇 달 만에 콩쿨 우승을 따내고, 기업의 후원을 받아 독주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독주회 자리에서 자작곡을 발표했다.
어디 그뿐만이랴.
애니메이션 거장이 직접 찾아와 곡 작업을 의뢰하고, 국내 최고 기업의 광고 음악으로 대중을 휘어잡은 행보들.
이 모든 것이 1년 만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이 독주회는 해외 무대의 발돋움 판이 될 거다.’
현철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분명 은퇴를 할 땐 쉬고 싶다는 생각이 전부였는데.
이안과 함께 있으면 자꾸만 무언가를 이뤄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올라왔다.
특히 이번 독주회를 더욱 강력하게 하리라.
클래식 본고장에서 이안의 입지를 강렬하게 다지겠다는 마음에 현철의 눈썹이 마구 꿈틀거렸다.
***
“특별전에서 뵙고 다시 보내요. 클레어. 잘 지냈습니까?”
“편집장님도 잘 지내셨죠?”
루트비히 출판사.
베토벤의 이름을 딴 출판사 역시 베토벤 재단의 소유였다.
빈에서 클래식을 수학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루트비히 출판사의 책을 가지고 있을 정도.
베토벤의 자료를 독보적으로 취급할 수 있는 재단이 가진 저력이었다.
“오늘은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편집장은 클레어의 성미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베토벤 재단의 운영팀장, 클레어.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면 곧바로 실행으로 옮기는 여인.
특별전에서 신예 피아니스트에게 곡을 맡기는 파격적인 행보를 이뤄낸 사람 아니었던가.
“한국의 피아니스트, 박이안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클레어는 특별전을 떠올릴 때마다 다시금 전율이 일렁인다고 표현했다.
<조우>를 연주하는 이안의 모습은 베토벤의 현신을 보는 것 같았다고.
그날을 기점으로 이안의 열혈팬이 된 클레어는 이안의 유튜브도 모두 챙겨볼 정도였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잠도 아껴가며 영상 속 자작곡을 듣고, 그의 곡을 악보로 그려보았다.
끝내 8개의 악보를 모두 가지게 된 클레어는 악보를 다시금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쩜 하나같이 다른 거장이 만든 곡 같을까요.”
클레어는 자신이 그린 악보를 내밀며 말했다.
곡에는 사람마다의 색깔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자신이 자신 있는 방향으로 곡을 써 내려가고, 그것을 연주한다.
업계에서는 그것을 ‘특색’이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빠른 선율을 펼치는 테크닉을, 누군가는 느리지만 감성이 가득 담긴 연주를 펼친다.
연주를 보면 성격이 나온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안의 곡은 모두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곡마다 뚜렷한 색채를 자랑했다.
화려한 기교와 빠른 템포를 자랑하다가도, 어떤 곡에서는 극도의 우울감이 묻어나오는 어둡고 느린 선율을 만들어낸다.
무척이나 다채로운 음색들의 향연.
하지만, 그 뿌리는 모두 같았다.
“하나같이 기본에 충실한 곡들이군요.”
편집장의 안목에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보면 복잡한 선율이지만, 면밀히 관찰하면 클래식 형식의 정수를 지킨 선율.
소나타 형식과 협주곡 형식에 맞춰 작성된 <환생>과 <염라>의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이 완벽했다.
뉴에이지풍으로 작곡한 <환상>과 <추격>도 클래식의 형식미가 완성도를 높였다.
심지어 클래식과 동떨어진 광고 음악, <질주>도 클래식 악장의 형태를 차용하여 만든 곡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게다가 클레어가 맡긴 <조우>는 베토벤의 색채를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악보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클레어의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그게 오늘 출판사를 찾아온 이유였다.
“교재로 만들면 어떨까요?”
클레어의 눈이 번뜩였다.
이안의 곡들은 대부분 기본적인 화음에 어울리는 음색을 덧대어 만들어낸 곡이었다.
반대로 덧댄 음색을 거둬내면 초보 연주자도 쉽게 연주할 수 있는 곡이 만들어진 뜻.
기본적인 멜로디에 왼손 주법의 난이도를 낮춘다면 체르니처럼 피아노 기본 소양 수준의 곡으로 바꿀 수 있을 터였다.
인기 있는 음악가의 곡을 악보로 판매하는 것은 익숙한 일.
하지만, 그 곡을 교재로 활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이안의 자작곡은 교육적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곡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악보를 찬찬히 살피던 편집자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제성과 더불어 교육적으로 우수한 곡을 내세운 교재라면 새로운 피아노 꿈나무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될 것 같군요.”
실제로 화제성이 짙은 곡이 나온 해에 피아노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증가한다.
클래식을 완벽하게 숙지하지 않아도 곡 하나 정도는 치고 싶은 욕망 때문.
해적이 나오는 유명 영화에 나온 OST 덕에 피아노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던 때도 있지 않았던가.
클레어는 그 화제성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클래식으로 인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안으로 인해 클래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지금이 절호의 기회.
클레어의 이야기에 편집장도 마음에 쏙 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럼 연락을 넣어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