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82화 (82/250)

82화

큰아버지는 호텔 조식을 먹는 자리에서 여러 이야기를 꺼냈다.

특별전이 끝난 이후로 오스트리아 각지에서 여러 제안을 보내왔다고.

피아노 제작 명가, 베르젠데르크의 피아노 증여 소식과 비엔나 하르모니아 음반사의 홍보 안건, 여타 오케스트라에서 날아온 협업 제안까지.

그중 가장 새롭게 다가온 제안은 클레어의 제안이었다.

“제 곡을 교재에 활용한다고요?”

“그래. 베토벤 재단의 클레어 팀장이 강하게 지지하는 추세더구나.”

바로 내가 만든 자작곡들을 활용하여 교재를 내고 싶다는 것.

큰아버지가 말하길, 그녀는 다채로운 곡의 향연을 자세히 살펴보니 기본적인 뿌리는 하나라고 평가했다고.

그 뿌리 깊은 기본기 덕에 피아니스트 꿈나무들에게 좋은 자극이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기본기에 충실한 악보들이긴 하지.’

전생의 기억을 통해 알게 된 음악의 진리.

기본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가장 뛰어난 곡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베토벤을 비롯한 수많은 거장들의 음악도 모두 기본에 충실한 악보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속에서 어떤 화음을 사용하느냐, 어떤 기교로 멜로디를 채우느냐에 따라 곡의 분위기는 천차만별.

아마 클래식의 기본 정수를 배우려는 사람이라면 내 곡을 통해 새로운 것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안의 곡은 처음 피아노를 수학하는 사람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아마 처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난이도가 높겠지.’

시작은 기본적인 화음이지만, 풍성한 음색을 더하기 위해 갖가지 음표를 더한 곡들.

여러 개의 음표를 단시간에 쳐야 하는 부분도 있었고, 8개 이상의 건반을 한꺼번에 누르는 부분도 있었다.

개인의 기량이 높아도 연주를 소화해내기 힘든 부분이 많았기에.

만약 교재로 사용되려면 그 난이도를 조절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다행히 기본 화음에서 가지를 뻗듯 선율을 입혔기 때문에, 어려운 부분을 걷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총 3단계에 걸쳐 곡을 만들면 되겠네요.”

말을 꺼냄과 동시에 머릿속에 가상의 오선지가 그려진다.

아마 난이도 별로 만드는 것이 교재로 활용하기에 좋겠지.

초급, 중급, 고급.

각 곡을 수준별로 편집한다면 차례대로 연주를 이어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초급 단계에서는 최대한 간단한 왼손 주법으로 반주를 이어가고, 튀는 음으로 음색을 더했던 것을 제외한다면 비교적 부드러운 연주를 펼칠 수 있을 테지.

중급에서는 왼손 주법 중에서도 어렵지 않은 부분을 제시하고, 오른손 멜로디도 좀 더 다양화시켜 펼친다.

하나의 음표 대신 두 개의 음표로 화음을 쌓고, 차후에는 더 많은 음표들로 화음을 쌓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한다면 고급에서 나머지 튀는 음들과 다변화된 왼손 주법을 섞으면 내 자작곡을 연주하려는 사람들이 더욱 쉽게 곡을 익힐 수 있으리라.

내 계획을 듣던 큰아버지는 찬성표를 던지면서도 일부 우려를 표했다.

“독주회 준비에 편곡까지. 꽤 바쁠 텐데?”

독주회까지 몇 주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다.

녹음을 위해 몇 번씩 연주했던 곡이지만, 라이브 공연에서 펼치는 연주는 또 다르리라.

게다가 이번에는 내 피아노 대신 다른 피아노로 연주하는 만큼, 피아노의 울림에 따라 연주의 방식을 조금씩 바꿔야 했다.

그 모든 것을 동반하면서 교재를 위한 편곡도 할 수 있겠냐며.

큰아버지는 독주회를 끝내고 편곡 작업을 거치는 것이 어떻냐고 물었다.

그러나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난이도별로 어느 부분을 강조하고 축소할지 오선지에 정리된 상태였다.

이틀 정도만 집중해서 편곡한다면 교재에 넣을 수준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

게다가,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아이디어가 하나 더 있었다.

“교재 작업을 확정 지으면 독주회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유튜브에 접속하면 내 자작곡 커버 영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어머니를 시작으로 주수석님, 빈 필을 비롯해 수많은 유튜버들이 내 자작곡을 커버한 덕에 독주회는 물론 자작곡 자체에 대한 인지도도 무척 높아진 상태였다.

지금이 자작곡의 악보를 공개할 가장 좋은 타이밍이었다.

게다가 미리 교재로 악보를 공개한다면 독주회에서 펼칠 연주가 교재의 좋은 본보기로 작용할 터.

교재를 보고, 연주회를 보고 배우는 자의 입장에선 그만한 선순환이 없을 것이다.

그 뜻은 나의 연주가 세상에 깊게 각인될 수 있다는 것일 테고.

연습을 위해 독주회 영상을 다시금 보게끔 만든다면 여러 사람들에게 내 이름과 연주를 회자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큰아버지도 내 의견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어에게 답신을 넣어두겠다고.

식사를 마저 하던 큰아버지는 한 가지 더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바이에른 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 왔더구나.”

***

“이게 베르젠데르크 장인의 피아노…”

빈 국립 오페라극장 건물 한편에 마련된 연습실.

리온 베르젠데르크의 역작이라는 피아노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번뜩이는 검은빛에 더해 마감처리 된 은빛 조형들이 고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시험 삼아 건반을 누르는 것임에도 특유의 울림이 연습실을 가득 메운다.

마치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는 것처럼.

웅장한 기색이 거장의 기운을 물씬 풍긴다.

‘내가 원하는 조율을 미리 담아주었네.’

베르젠데르크 조율사를 통해 특별전 피아노를 조율하지 않았던가.

그 부분을 놓치지 않은 거장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나는 차분히 앉아 독주회에 펼칠 곡들을 차근히 내놓기 시작했다.

<환생>을 시작으로 <조우>까지.

보다 완성도를 더한 음색이 피아노 울림통에 더해져 연습실 사방으로 번져간다.

단단하면서도 웅장한 선율, 거장의 피아노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은으로 만든 가문의 문장과 텅 빈 연습실을 바라보자 세간의 관심이 사뭇 극명하게 다가왔다.

‘업계와 대중, 모두가 주목하고 있댔지.’

문득 <질주>를 선보였을 때를 떠올렸다.

획기적인 발상이라며 광고 업계는 물론 광고를 본 대중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제는 무대가 국내에서 국제로, 그것도 클래식의 본고장인 비엔나에서 열리는 독주회다.

내가 일전에 올려둔 자작곡 영상들의 조회수는 더욱 상승해 있었고, 커버 영상들의 조회수도 날이 갈수록 쌓여갈 정도.

하루가 멀다고 기사에서는 독주회가 얼마나 남았는지, 곡의 완성도가 어찌 펼쳐질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는 내용이 쏟아졌다.

큰아버지의 개인 연락은 물론, 이번 독주회를 주관한 하르모니아 측에서도 연락이 빗발친다고.

‘아마 방송사에서 온 연락도 같은 과정이겠지.’

큰아버지가 일러준 인터뷰.

방송사 인터뷰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내 입장에서는 방송사를 통해 독주회에 대한 소식을 널리 퍼뜨릴 수 있는 기회일 터.

하지만, 큰아버지가 말하길 방송사에서 먼저 인터뷰를 요청했다고 했다.

방송사가 먼저 접근한 것은 그들 또한 내 독주회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시청자의 니즈가 충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그에 힘입어 연주를 위한 손가락이 더욱 바빠진다.

연습을 이어가던 나는 이윽고 악보를 꺼내 들었다.

교재 수록을 위한 편곡 작업.

머릿속에 곡의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들이 떠오른다.

음표의 개수 자체를 줄이는 것부터 주법을 간소화시켜 난이도를 줄이는 방식까지.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손의 크기에 따른 난이도였다.

‘나이와 체구에 따라 칠 수 없는 사람이 없으니까.’

자작곡의 선율은 철저히 나에 맞춰져 있었다.

엄지와 약지를 최대로 뻗었을 때 칠 수 있는 한계치까지 활용하여 펼치는 선율.

신체 구조가 탁월하다면 가능하긴 하겠지만, 그 사이를 끝없이 왔다 갔다 하려면 오랜 노력이 필요했다.

피아노를 수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다가설 수 없는 영역.

그 부분을 수정하는 게 첫 단계였다.

‘넓은 음역대를 펼치는 대신 기존 화음을 반복해서 선율을 채워야겠다.’

나는 눈을 감고 가장 먼저 <환생>의 악보를 떠올렸다.

초기에 만든 만큼 다른 곡들에 비해 난이도는 높지 않지만, 다변화되는 감정적인 선율에 적응하는 것이 관건인 곡.

높고 낮은 옥타브를 오가는 왼손을 기본 옥타브에서 반주할 수 있도록.

왼손의 주법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초급이 느끼기에 간편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변경한다.

음표 개수를 줄여 빠르게 펼쳐지던 곡의 속도 또한 조절한다.

손이 작은 어린아이라도, 손이 굳어 연주에 빨리 적응하지 못하는 어른이더라도 연주를 익힐 수 있도록.

최소한의 선율을 남겨둔 채 음색이 펼쳐진다.

문득 전생의 경험이 물씬 흘러들어온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피아노를 건드렸던 전생의 기억.

그러한 전생도 처음부터 칠 수 있을 난이도로 만든다는 생각에 간결한 선율이 연습실을 메우기 시작한다.

***

바이에른 방송사.

독일의 공영 방송국, ARD의 송출사 중 하나인 방송사였다.

바이에른주를 중점으로 방송을 거치는 곳이자, 음악과 관련된 전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방송사인 만큼 독주회 소식을 대서특필하기에 알맞는 곳이었다.

호텔로 찾아온 제작진들이 카메라를 설치하는 동안 진행자가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연회색 정장을 입은 여성 진행자의 입에서 독일어가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이안씨. 저는 이번 인터뷰 진행을 맡은 스칼렛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스칼렛씨.”

내 입에서 유려한 독일어가 나오자 그녀는 사뭇 놀란 기색을 보였다.

스칼렛은 나를 향해 수준급 독일어 발음이라며 감탄을 자아냈다.

전생의 기억을 통해 익힌 독일어니까.

모국어 수준으로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무척 흥미롭다는 듯, 카메라 세팅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간략한 소개 멘트가 끝나자마자 나온 첫 질문은 단연 티켓값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안씨의 독주회가 무료로 열린다는 소식에 전 세계 클래식 팬들을 놀라게 했는데요. 그렇게 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큰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더 많은 사람들이 연주를 들었으면 했거든요.”

나는 담담히 생각을 내려놓았다.

내가 연주를 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에게 연주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라고.

그렇기에 독주회의 입장료는 필요 없다고.

원하는 사람 누구든 독주회를 방문하여 음악을 감상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스칼렛은 나를 향해 진정한 연주자의 생각이라며 내 생각을 높이 평가했다.

“색다른 이안씨의 정책 덕에 예매 사이트가 마비되었다죠?”

무료라고 밝힌 탓일까.

오페라극장의 공식 예매 사이트는 매번 접속 폭주로 고초를 겪고 있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예매를 위해 사이트 접속을 시도하고 있다고.

몇 번이고 서버 업체를 바꿨지만, 번번이 먹통이 되어 독주회 전까지는 도저히 온라인 예매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결국 하르모니아 측과 협의하여 예매 정책을 바꿨지.

“그래서 티켓 배부를 오프라인 선착순으로 돌렸다고 들었어요!”

마치 전산이 없던 과거처럼.

2천여 개의 티켓을 오프라인 선착순으로 배부하기로 했다.

직접 보고 싶다면 방문하여 볼 수 있도록 자유도를 부여한 것이다.

원한다면 직접,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온라인으로도 볼 수 있도록.

스칼렛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볼지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극장의 관람석에 온라인 중계를 기다리는 사람까지 합하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 또한 티켓을 받기 위해 줄을 설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어진 인터뷰에서는 곡들에 대한 설명과 관람 포인트 등을 이야기하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약 1시간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가 끝나자 스칼렛은 홀가분한 미소를 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안씨.”

인터뷰가 끝나자 스칼렛이 다시금 악수를 건넸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그녀에게서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인터뷰를 이어갈 때와는 사뭇 다른 톤에 날카로워진 눈길은 협상가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본인들이 원하는 것을 기필코 얻어내겠다는 굳은 의지.

이어지는 스칼렛의 말은 내 예상을 현실로 바꿔주었다.

“혹시 독주회 중계권을 저희 바이에른 방송사에 파실 생각은 없나요?”

스칼렛은 무척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건넸다.

세계적으로도 관심이 무척 쏠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독주회를 무료로 진행하는 것에 이어 온라인 중계를 하겠다고 밝혔는데, 과연 누구에게 중계권이 갈지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고.

이미 큰아버지는 물론 비엔나 하르모니아에도 숱한 요청이 들어온 상태였다.

억 소리 나는 거액의 사용료를 지불하겠다는 방송사부터 국빈 대접을 약속하겠다는 방송사까지.

여러 방송사에게서 러브콜이 쇄도했지.

그들을 포함하여 스칼렛에게도, 내가 해줄 말은 하나였다.

“판매할 예정 없습니다.”

단호한 내 목소리에 스칼렛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중계권.

올림픽이나 월드컵의 경우에서도 중계권을 따내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매출 상승을 자랑한다.

아마 바이에른 방송사도 같은 것을 노리는 것이겠지.

하지만, 특정 방송사에게 중계권이 넘어간다면 해당 방송사를 보는 사람만 볼 수 있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내 연주를 들을 수 있게 만드는 것.

이를 위해 하르모니아 측을 통해 송출팀을 꾸렸다.

모든 사람이 내 유튜브 채널로 들어와 자유롭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도록.

내가 원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이 내 연주를 듣고 내 이름을 기억하는 것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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