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대체 이 인파는…’
빈 필의 마에스트로이자, 이번 독주회의 무대 총괄을 맡은 레오 앤더슨.
그는 극장에 도착하자마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했다.
마치 텐트촌을 연상케 하는 비주얼.
극장 입구를 시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줄을 서고 있었다.
온라인으로 티켓을 구할 수 없자, 티켓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극장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것.
패딩을 입고 떨고 있는 사람은 기본, 침낭과 텐트까지 치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감도 오지 않게 만들었다.
리허설 준비를 위해 공연 시작 3시간 전에 극장에 온 레오였건만.
극장 주변에 줄을 기다리는 사람은 얼핏 봐도 수백에 육박할 정도.
건물을 둘러선 모습은 줄지어 가는 개미 떼를 연상케 했다.
‘카라얀 광장에도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많군.’
빈 국립 오페라극장의 앞마당, 카라얀 광장.
유럽 음악계를 제패한 오스트리아의 유명 작곡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기리기 위한 곳이었다.
따뜻한 봄이 되면 극장 외벽에 스크린을 부착하여 연주를 감상하게끔 만들어두곤 했는데, 사람들이 그곳마저 가득 메운 것.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티켓팅을 포기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수백에 이르는 수.
극장에서 제공한 간이 의자도 부족하여 서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레오는 놀라움을 뒤로 한 채 인파를 뚫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운드팀은 마이크 확인 확실하게 해두세요. 라이브 도중에 소리가 튀면 안 되니까. 송출팀은 중계 테스트 끝났습니까?”
전례없는 독주회 라이브 공연.
레오도 몇 번 녹화 공연을 펼친 적은 있어도, 전체 연주회를 송출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또한 이안의 팬이자, 극장을 총괄하는 관계자였기에.
독주회 전반을 살피는 레오의 눈빛이 매서웠다.
‘이 관객석이 가득 차겠지.’
레오는 문득 텅 빈 관객석을 바라봤다.
빈 국립 오페라극장은 그리 작은 곳이 아니었다.
무려 6층 높이까지 관객석이 펼쳐진 국립 오페라극장.
무려 2,200석이라는 객석을 보유한 곳이었다.
레오도 빈 필하모닉 정기 연주회를 펼치며 좌석을 가득 채운 경험이 손에 꼽을 정도.
거장의 음악을 재현하는 특별 연주회 정도는 되어야 만석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확신이 섰다.
이번 독주회는 객석이 가득 찬 상태로 진행될 것이라고.
관객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를 기억하는 레오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
“이 안내판은 어디에 둘까요?”
“아, 저기 계단 앞에 놓아주시면 됩니다.”
레오의 지시에 인부는 안내판을 계단 앞에 두었다.
오랜 시간 극장에서 살다시피 한 레오에게도 생소한 안내판.
촬영 가능.
본래 연주회를 비롯한 공연은 촬영이 일체 금지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기도 했고, 연주는 직접 목도하는 것이 제일이었기에.
게다가 관람 중 방해 요소로 작용할 수 있어서 모든 극장에서 촬영 금지는 기본이었다.
‘자유로운 관람을 보장하는 것인가.’
보다 많은 사람이 관람할 수 있도록 라이브 송출을 하겠다고 선언한 이안이지 않았던가.
그러한 면을 고려해보면 이번 촬영 가능 안내도 이안의 의지가 가득 담긴 것일 터.
문득 레오의 머릿속에 이안의 말이 떠올랐다.
레오가 이안을 영입하려고 갖은 수를 썼을 때, 끝까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며 내뱉은 말.
“저는 피아노를 하고 싶거든요.”
이안은 자신이 원하는 길을 자유로운 영혼이지 않았던가.
촬영 가능이란 안내 문구는 그러한 자유로움으로 관객들을 초대하는 초석이리라.
여태껏 클래식은 어렵다고 하던 것을 모두 깨뜨리는 이안의 행보에 레오의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윽고 공연 시작 30분 전이 되자 선착순 티켓을 받아든 사람들이 극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토록 다양한 사람이 모인 것은 또 처음이군.’
백스테이지에서 객석을 둘러본 레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몇 번이고 무대에 서서 바라봤던 관객석.
하지만, 매번 관객석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해져 있었다.
포멀한 정장을 입은 어른들.
그러나 이번에는 남녀노소라는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된 듯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즐비했다.
게다가 한국인으로 보이는 동양인들도 꽤나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값비싼 클래식을 보러 온 것이 아닌 온전히 이안의 연주를 보러온 사람들.
레오 또한 그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미완성의 완성을 보러 온 사람들이겠지.’
이안의 첫 앨범을 받아든 레오는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었다.
‘미완성’.
앨범의 타이틀에 설마 그럴 리 있겠냐며 고개를 저었지.
타이틀에 대한 설명을 보고 나서야 레오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음원으로 들어도 충분히 빼어난 선율.
특히 <죽음>의 선율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낮은 선율을 자랑했다.
앨범의 연주만으로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했건만.
뒤표지에 적힌 이안의 멘트는 레오마저 기대감이 어리게끔 만들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음악은 듣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
연주하는 것을 직접 보는 것이 완성이라 생각하기에, 이번 앨범의 타이틀을 ‘미완성’이라고 지었습니다.
직접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완성이나 다름없다.
이안의 생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말에 레오는 글귀를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같은 생각을 하는 예술가 중 하나였다.
빈 필의 이름으로 낸 음원들은 수도 없이 많았으나, 가장 제대로 된 선율을 듣고 싶다면 극장을 찾아야 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환생>의 선율을 직접 들은 레오였기에.
음원에서 펼쳐진 선율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나올지.
레오의 눈망울에 기대감이 어렸다.
오전 11시.
이제 이안의 독주회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무대 뒤로 몸을 숨긴 레오는 사운드 디렉터에게 시작 사인을 보냈다.
댕.댕.댕.
레오의 사인으로 시작된 독주회 시작.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극장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채 머리가 희끗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독주회에 참석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전성기 때처럼 머리를 단정히 자르고, 잿빛 정장을 입은 박현철.
그는 환영 인사와 함께 독주회 순서를 소개했다.
이안이 그동안 만들어온 자작곡을 답습하는 식으로 독주회가 진행될 것이라고.
첫 자작곡인 <환생>을 시작으로 특별전에서 공개한 <조우>까지.
순서대로 진행될 예정이니 많은 기대를 부탁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럼 소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박이안 피아니스트입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오페라극장을 가득 메웠다.
검은 정장에 흰색 셔츠, 목에 나비넥타이를 맨 이안이 성큼성큼 무대로 올라왔다.
2천이 넘는 사람들이 일제히 자신을 보면 긴장이라도 할 법한데.
이안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객석을 바라보며 허리를 숙였다.
인사를 건넨 이안은 곧바로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마치 할 얘기는 연주로 대신하겠다는 듯.
레오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이안의 연주를 숨죽여 기다렸다.
두근.
떨리는 레오의 심장 소리를 시작으로 이안의 손가락이 <환생>의 1악장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
‘어떻게 이런 선율을 창조해낼 수 있을까.’
모니터 속 이안의 모습을 바라보는 남성의 표정에 흐뭇함이 번졌다.
박이안 피아니스트의 자작곡 독주회가 비엔나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좌절을 금치 못했다.
가뜩이나 일이 바빠 근처 극장에도 가기 힘든 상황이거늘.
8천 킬로미터 거리에서 독주회를 연다는 것은 이안의 오랜 팬인 그에게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중 이안의 독주회가 라이브 중계된다는 소식에 얼마나 기뻐했던가.
‘<염라>의 선율이 또 달라졌군.’
박현철 마에스트로의 은퇴식.
남자도 그 자리에 있었다.
클래식을 오랫동안 사랑했던 그에게 현철의 은퇴 연주회는 놓칠 수 없었다.
남자 또한 자라오면서 현철의 성장을 그대로 봐온 사람이었기에.
이제 누구의 연주를 들으며 클래식을 감상할까 하던 찰나, 이안이 등장했다.
‘그때는 고독함이 느껴진다면, 지금은 굳센 의지가 느껴지는군.’
남자는 <염라>의 무대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벌써 얼마 전인가, 박현철 마에스트로의 <세월> 3악장.
이안의 연주를 지휘하는 현철의 모습은 남자의 뇌리에 깊게 박혀있었다.
마치 두 사람이 대화하는 듯 펼쳐지는 연주는 오랜 클래식 팬이었던 그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본래 지휘자는 관현악단을 통솔하는 존재였으니까.
피아니스트에게 모든 열의를 불태우는 모습은 남자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염라>는 또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게 국위 선양이지.’
한동안 유럽의 유명 클래식 잡지에서 박이안이란 이름이 없는 날이 없었다.
베토벤 특별전에 이어 펼치는 독주회에 이안의 고국인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남자가 있는 자리는 그것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채는 자리였기에.
모니터 너머의 사람들이 그저 부러웠다.
‘나도 저 자리에 있었으면…’
간간이 비치는 관객석의 사람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안의 연주에 감탄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관객들의 모습에 직접 가지 못한 아쉬움이 다시 한번 더 밀려온다.
시계는 어느덧 오후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급히 마무리하여 보고해야 하는 중대 사안이기에.
공무원인 그도 여태껏 남아있었다.
이안의 연주를 들으며 업무를 이어가던 찰나, 바깥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대북협력팀 박성환입니다.”
“아, 들어오세요.”
성환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와 남자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결재 서류를 받아든 남자의 뒤에 태극기가 펄럭였다.
책상 위에 놓인 자개 명패에는 직급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국무총리 정태수.
이안의 연주를 쭉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정체였다.
“남북 정상회담 건 때문이죠?”
“그렇습니다. 국무총리님.”
그동안 계속해서 결렬됐던 남북 정상회담이 어느덧 3주가량 남기고 있었다.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자리인 만큼 사안이 막중한 상태.
게다가 회담 일정은 물론, 평화를 기원하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어 더욱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국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유명 연예인들.
유라 또한 이번 정상회담 축하 무대에 오르는 연예인 중 하나였다.
“우리 측 공연 예정자들 리스트 넘어갔나?”
“네. 별도의 거부 반응은 없는 상태입니다.”
통일부 입장에서 북한이란 존재는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설득이나 이유를 들어볼 시간도 없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곳이었으니까.
실컷 준비해둔 프로젝트가 거부권 행사로 엎어지기 다반사.
성환은 지금 공연 참가 리스트가 거부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 이 피아니스트가 정상회담 축하 공연에 함께하면 어떨 것 같습니까?”
“박이안 피아니스트 말씀이십니까?”
성환도 이안의 행보를 잘 알고 있었다.
뉴스에 도배되다시피 한 천재 피아니스트.
한국 클래식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는 평에 이번 정상회담 참여 후보에도 거론된 인물.
하지만, 최근 오스트리아에서 행보를 이어가고 있던 탓에 희망 사항에 그쳐야 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일정으로는 독주회를 끝으로 귀국한다고는 들었으나, 박이안 피아니스트가 수락할까요?”
“우선 참여 의사를 물어보는 것으로 하죠. 먼저 서신을 보내고, 수락 의사를 전한다면 이안씨의 입국 일자에 맞춰 미팅 일자를 논의해보죠.”
태수의 말에 성환도 긍정표를 던졌다.
이전 남북 정상회담 축하 공연에서도 출연 아이돌의 가사나 의상 문제로 시시비비가 많이 갈리지 않았던가.
하마터면 몇 달 동안 고생했던 공연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뻔도 했으니.
차라리 클래식이라면 그런 것이 훨씬 덜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안씨가 수락한다면 북측에서 허가할지 관건이겠군요.”
북한.
폐쇄적인 것은 물론 제대로 된 답변을 받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국가.
그러나 절대로 재촉할 수 없는 곳이지 않던가.
이번 공연 참가자 리스트에 대한 답변도 몇 주가 걸렸는지 모른다.
자그마한 문제라도 발생하면 대화선을 단절시켜버리는 곳이었기에.
어떤 태도를 보일지 모르니 끝까지 계산적이고 합리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통일부 입장에서는 추가 인원 편성이 다소 걱정스런 선택이었다.
하지만, 태수는 묘한 확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허가할 겁니다. 북측 정상의 클래식 사랑은 유명하지 않습니까.”
성환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북측 정상이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은 통일부 산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
미국 유학 시절 클래식을 배웠다는 사실은 외신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국무총리 또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북측 정상도 지금 자신과 같은 화면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남한의 정서가 담긴 아이돌 음악보다 국경 없는 클래식 음악을 더 좋아할 것이라고.
“우선 박이안 피아니스트게 섭외 연락을 보내도록 하죠. 수락과 동시에 보고서 작성해서 북측으로 보내면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