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이런 자리도 나쁘지 않네.”
“세상 많이 좋아졌지. 높은 퀄리티의 연주를 집에서 들을 수 있게 될 정도이니.”
초고층 주상복합 단지, 캐슬스카이의 꼭대기.
대한민국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두 그룹의 총수가 와인 잔을 돌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제온 그룹의 대표인 배태진과 화정 그룹의 회장, 정재혁.
그리고 둘의 사이에 여유롭게 와인 잔을 기울이는 사내.
서천 그룹의 회장인 서필무는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사적으로 모이는 건 참 오랜만이네.”
매번 비즈니스 관련된 연락은 자주 하나, 이번과 같은 경우는 오랜만이었다.
서로 지장이 찍힌 서류로 안부를 묻곤 했는데.
세 소꿉친구는 오랜만에 만난 것을 반가워하며 와인 잔을 부딪쳤다.
셋은 비슷한 또래에 입학료만 수억에 이르는 재벌 학교에서 함께 자란 사람이었다.
경영학과 경제학과 같은 기업을 물려받을 이들에게 필요한 학문은 물론, 승마와 미술, 음악과 같은 예술도 깊이 수학한 이들이기에.
그들은 하나같이 클래식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박이안 피아니스트. 정말 대단한 수준이야.”
세 재벌 총수의 눈은 모두 스크린을 향해 있었다.
필무가 음악 감상을 위해 인테리어에 총력을 가했던 감상실.
콘서트홀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강력한 음향시스템에서 유려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크린 속에 담긴 영상에서 보이는 것은 박이안 피아니스트.
한국에서 8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오스트리아에서 생중계되는 연주가 감상실에 퍼지고 있었다.
“저게 다 자작곡이란 말이지?”
재혁은 곡을 들으면서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지금껏 수많은 연주회에 방문했건만.
이안의 선율은 숱한 거장들과 차별화된 묘한 기색이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신예 피아니스트에 어울리는 신선한 선율이면서도, 거장에 비견할 정도로 농익은 연주라고.
자신의 아들도 피아노를 수학하지만, 저 정도까지 가려면 한참 멀었다고 평했다.
‘하긴. 지난번보다 음색이 풍부해졌어.’
필무는 현철의 은퇴 연주회에서 들었던 <염라>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동안 대한 오케스트라에 후원하며 들었던 현철의 기운을 고스란히 담았던 연주.
게다가 연주를 이어가는 조카와 이를 지휘하는 백부의 면모는 지금껏 숱한 클래식 연주회를 보았던 필무에게도 처음 보는 광경이 아니었던가.
마치 서로를 보는 듯하면서도 과거를 쏘아붙이듯 맹렬하게 이어가던 선율.
하지만, 이번에 이안이 펼치는 <염라>는 결이 다소 다른 느낌이었다.
“어째 서글픈 기색이 느껴지는 곡인데.”
필무와 함께 현철의 은퇴 연주회에 참석했던 태진도 필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앞만 보고 달려가던 경주마가 경주를 끝내고 쓰러져서 쉬는 것 같다고.
강렬한 선율인데도 왜 이리 슬픈 기색이 엿보이는지 모르겠다고 표현했다.
잠자코 연주를 듣던 필무는 그 원인을 음색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지난번에 이안이가 연주했던 <질주>가 떠오르는군.’
광고 음악으로 사용했던 이안의 <질주>.
살리에리의 피아노 특유의 중후한 선율로 광고는 엄청난 호황을 겪지 않았던가.
무척이나 강렬한 자동차 배기음도 관통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던 낮은 음색이 아직도 필무의 귓가에 생생했다.
마치 그때의 선율을 보는 것처럼.
일반적인 피아노에서 느낄 수 없었던 낮고 단단한 음색이 <염라>를 표현하고 있었다.
같은 곡을 듣고 있는데도 전혀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듯.
이안의 거침없는 연주가 영상을 통해서 고스란히 전해졌다.
“저 친구가 피아노를 전공한 지 1년이 막 지났댔나?”
“설마? 정말로?”
태진의 말에 재혁이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필무까지 고개를 끄덕이자 재혁은 놀랍다는 듯 입을 벌렸다.
자신들도 비슷한 시기 정도 음악을 수학하지 않았냐고.
전문 레슨 선생까지 구하여 교양을 쌓는 데 총력을 가했던 것이 1년이 넘는 시간이었을 텐데.
재혁은 같은 시간에 저러한 성과를 내는 것이 대단하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제 1년 차 피아니스트가 독주회에,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 연주회를 펼칠 정도라니. 필무 너 대어를 제대로 잡았는데?”
태진의 칭찬을 시작으로 재혁 또한 이안을 정식 후원하는 필무에 대한 부러움을 내비쳤다.
하지만, 도리어 필무는 도리질을 하며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대단한 예술가와 함께할 수 있으니 내가 더 영광이지.”
싱긋 웃는 필무의 미소는 진심일 때만 나오는 표정이었다.
필무는 단 한 번도 이안을 광고의 수단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광고가 잘된 이유는 이안의 연주가 무척 수준급이고, 대체 불가능할 정도로 천재적이기 때문일 뿐.
결코 그의 안목이 좋아서 선택했다는 생각은 없었다.
매번 이안의 행보는 필무의 예상을 필적했기 때문.
이번 비엔나 독주회도 필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그동안 숱한 음악가를 후원했지만, 이안처럼 국내에서 국제로 무대를 옮겨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에.
그래서 이안의 행보에 더욱 눈길이 갔다.
‘그래서 이번 협찬에 대한 것도 모두 비밀에 부쳤지.’
보통 협찬이나 광고, 등에는 어떤 기업이 참여했는지 제시되는 법이다.
그래야 사회 공헌적 활동을 했다고 광고할 수 있고, 이는 기업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에 이안을 위해 한 모든 협찬에 대해 필무는 최대한 기업의 이름을 감췄다.
카메라와 방송 장비도 서천의 것, 비엔나 하르모니아에서 꾸린 중계팀을 지원한 엔지니어도 서천 그룹의 출신이었다.
만약 사실을 알렸다면 국내외 기자들이 앞다퉈 이안의 후원체는 서천이라는 기사를 뽑아내리라.
그리하지 않은 것은 필무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안은 애써 포장하지 않아도 역사에 남을 테니까.’
필무는 스크린에서 연주를 펼치는 이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느 기업의 후원 하나 없이 곡을 만들어내고, 그 곡이 인정받아 해외 음반사의 최고라고 불리는 비엔나 하르모니아의 제의를 받은 이안이었으니까.
필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이안이 장성하기를 바랄 뿐.
필무는 도리어 자신이 잘 닦아놓은 길 대신, 이안이 스스로 걸어가는 길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것 자체가 예술가의 길일 테니까.
곡에 대한 후원을 일절 하지 않았음에도 재벌 총수들의 귀를 만족시키는 연주를 펼치는 이안이었기에.
‘앞으로 어떤 무대에 설지 기대가 되는군.’
스크린 속에서 자신의 자작곡을 마음껏 펼치는 이안의 모습에.
필무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아침에 시작했던 독주회는 어느덧 점심을 앞두고 있었다.
총 8가지 곡 중 7개의 연주를 여지없이 펼쳤기에.
내 이마에는 어느덧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일곱 번째 곡, <죽음>을 끝내기 무섭게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가 이어졌다.
무려 일곱 번이나 일어났다가 박수를 치면 힘들기도 할 터.
하지만, 사람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연주가 끝나면 박수를 이었고, 다시 연주가 시작되면 곧바로 정적을 되찾았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했을 텐데. 이제 마지막 곡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내가 내뱉은 멘트에 사람들이 아쉬운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홀로 아쉬움을 토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막까지 힘내라고 응원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한 명이 응원하자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또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이 차례로 응원을 보내자 어느덧 6층에 이르는 객석이 뜨거운 응원 세례를 보냈다.
“그럼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이번 독주회의 마지막. <조우>를 끝으로 여러분들께 인사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긴 시간 감상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마지막 응원에 힘입어 나는 건반 위에 차례로 손가락을 올렸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
나는 잠깐 동안 객석을 쳐다봤다.
2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지칠 만도 하건만.
연주를 듣는 사람들의 시선은 더욱 또렷해져 있었다.
매 곡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듯 활기참에 젖은 것처럼.
그들의 눈빛에서 엄청난 집중력이 엿보였다.
‘다들 연주에 집중하고 있어.’
공연 매너의 불문율을 깨고 ‘촬영 가능’이라고 안내판까지 붙여놨기에.
첫 곡을 연주할 때까지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대다수 사람들이 카메라를 내려두고 손깍지를 낀 채 내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마치 오롯이 연주에 집중하려는 사람들처럼.
그들의 시선이 내 얼굴, 표정, 팔, 손가락, 페달에 올린 발까지, 온갖 곳에 꽂혀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나는 마지막 <조우>의 이야기를 꺼내두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조우>의 악보가 떠올랐다.
전생이 베토벤의 곡을 완성하기 위해 썼던 종이들.
베토벤의 악필마저 귀신처럼 알아보고 연주를 펼쳤던 기억이 고스란히 흘러들어왔다.
특별전에서 펼쳤던 <조우>가 과거의 베토벤 음악이 현대와 만나 펼쳐지는 선율이었다면, 이번 <조우>는 나와 전생의 만남을 담고 싶었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머릿속에 수많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전생이 아닌, 나의 기억들.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피아노를 시작했던 순간.
잘 움직이지 않는 오른손으로 고군분투했던 순간.
콩쿨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던 순간, 등.
그동안 피아니스트로 향하는 길을 나아갔던 나의 행보가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동안 내가 피아니스트임을 자각하는 과정이었지.’
그동안 내가 펼쳤던 연주.
단순히 전생의 재능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닌, 나의 생각을 더해 새롭게 펼쳐낸다.
전생의 기억 속에 배울 만한 점을 받아들이고, 현대와 맞지 않는 것들은 좀 더 부드럽게 바꿔낸다.
그리고 그렇게 쌓아간 지식을 바탕으로 나만의 곡을 창작한다.
그것이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어가는 과정.
이제 내가 펼치는 연주는 단순히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닌, 그것을 습득하여 내 것을 만들어낸 연주리라.
‘<조우>는 그것을 총집합하는 음악.’
전생의 기억 담겨 있던 <조우>의 악상들.
눈을 감은 채 가상의 오선지를 떠올리면 그에 맞는 악보들이 현현한다.
모 SF 히어로 영화에서 홀로그램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기계의 도면을 형상화했던 것처럼.
나 또한 의지를 전달하자, 가상의 악보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실제 소리에 맞는 부분을 부각시키고, 과도하게 고전적인 선율은 덜어낸다.
온전히 내가 만든 곡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
그와 동시에 앞으로 더 많은 창작곡을 세상에 선보이겠다는 다짐.
‘피아니스트 박이안이라는 이름이 더 멀리 퍼질 수 있도록.’
손가락에 들어간 힘이 더욱 강해진다.
가상의 오선지가 길처럼 펼쳐지고, 음표가 발판이라도 되는 것처럼.
앞으로의 활로를 마주한 나의 다짐이 연주와 함께 선율로써 나아간다.
이것으로 내가 피아니스트임을 증명해내겠다고.
이번 독주회를 통해 생길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겠지.
그 자리에서도 나는 내가 생각한 선율을 펼쳐내고, 내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에 영감을 부여한다.
연주를 통해 새로운 영감을, 감동을,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위대한 피아니스트.
그 활로를 여는 독주회.
이젠 독주회의 막을 내릴 차례였다.
‘forzando.’
콰앙.
<조우>의 4악장. 그 시작을 알리는 손가락이 매섭게 움직인다.
매번 맞이하는 자연이 새롭다고 느꼈던 베토벤의 감상처럼.
앞으로 나에게 다가올 새로운 도전들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듯 맹렬한 선율이 펼쳐나간다.
온전히 내 연주 소리만 오페라극장을 가득 메운다.
사람들의 긴장 어린 시선들이 느껴지던 그때.
8개의 음표가 한꺼번에 내리치며 곡의 끝을 알린다.
서스테인 페달에 힘입어 8개의 음색이 여운을 남기듯 펼쳐지는 동안 사람들은 숨죽여 마지막을 기다린다.
비로소 건반에서 손을 떼고, 페달에서 발까지 떼고 나서야.
“우와아아아아!!!”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를 함성 소리가 극장을 채우는 것을 넘어 바깥으로 퍼져나간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소리.
내가 연주를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하기까지.
박수갈채는 끊이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허리를 숙여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내 앞날을 기대하고, 응원하겠다는 뜻이 전달되듯.
사람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하모니가 되어 귓가에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