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86화 (86/250)

86화

‘클래식을 수학하면서 루트비히 출판사의 책으로 공부하지 않았다면 헛수고 한 것이다.’

오죽하면 이런 말이 있을 정도일까.

루트비히 출판사의 저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문장이었다.

베토벤 재단의 모태로 만들어진 출판사이자, 피아노, 플루트, 바이올린 등 모든 악기의 교육용 서적을 만드는 출판사.

쉬운 것을 시작으로 작품성이 높은 곡을 난이도별로 편찬하여 초보자부터 숙련자까지 클래식을 배우는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되곤 했다.

루퍼트 크레이머는 그러한 루트비히 출판사의 편집장이자, 베토벤 재단의 이사 중 하나였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였군.”

빈 국립 오페라극장을 사랑한 나머지, 창밖으로 보면 극장이 보이는 곳으로 이사 온 그였다.

수년간 오페라극장의 전경을 봐왔던 그였건만.

이번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새벽부터 텐트를 가지고 와 줄을 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공연이 시작된 이후에는 광장에 펼쳐진 스크린으로 이안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연주가 시작되면 일제히 잡음을 멈추고, 연주가 끝나면 일제히 박수를 친다.

잘 훈련된 군대를 보는 것처럼 사람들은 각 잡힌 모습으로 연주를 감상했다.

‘듣기 좋은 것은 사실이니.’

함성 소리는 바깥에서만 들리는 게 아니었다.

이안의 실시간 영상을 틀어놓은 루퍼트의 노트북에서도 함성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월드컵 경기에서 골을 넣으면 도시 전체에 환호성이 울리는 것처럼.

이안이 연주를 끝낼 때마다 안과 밖에서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함성 소리가 멎자 들려오는 이안의 연주.

오랫동안 악보와 연주를 연구했던 루퍼트에게도 이안의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곡을 만든 것부터가 대단하지.’

루퍼트의 책상에는 이안이 보내온 악보들이 잔뜩 깔려 있었다.

교재 제작을 위한 편곡 버전 악보들이었다.

이안의 첫 번째 곡, <환생>을 시작으로 가장 최근에 공개된 <조우>까지.

클래식 이론에 누구보다 해박했던 루퍼트는 이안의 악보를 넘길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전 형식에서 자주 사용되는 화음을 펼치면서도, 무척이나 독보적인 선율을 펼치기도 하는 천재성.

심지어 <죽음>과 <조우>는 오스트리아 현지에서 완성한 곡들 아니었던가.

얼핏 듣기에 두 곡을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2주.

그러나 이안이 건넨 악보는 2주가 아닌 2년의 시간을 주어도 만들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게다가 알맞게 편곡을 한 수준까지…’

악보 출판사에서 가장 오래 걸리는 작업을 꼽으라면 단언컨대 편곡 작업을 꼽을 것이다.

곡을 단순화시키는 작업은 음표 몇 개를 빼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음표를 빼내되, 음색이 어울리게 배치해야 하고, 쉽되 허무하지 않아야 한다.

초보자는 어려운 느낌을 받거나, 연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음악을 놓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해야 한다.

단순히 연습곡을 만드는 것이 아닌, 연습하는 사람의 심리까지 고려하는 편곡.

그것이 루트비히 출판사가 음악 서적 1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이유였다.

그런데 그 어려운 작업을.

이안은 8개의 곡을 단 며칠 만에 해냈다.

그것도 초급, 중급, 고급이라는 세 난이도로 편찬해서 말이다.

집에 있던 피아노로 각 난이도를 연주해보던 루퍼트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허, 참. 이게 피아노를 수학한 지 1년이 된 사람의 실력이라니.”

루퍼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말로 표현해도 믿기지 않을 수준이었다.

이안의 편곡은 단순히 음을 제거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넓게 포진된 음들 중에서 조금만 손을 움직여도 선율을 펼칠 수 있도록 바꾸되, 빈자리가 어색하지 않도록 다른 음표를 더해 보강한다.

그뿐만이랴.

중급과 고급에서 펼쳐지는 소리는 미묘하게 달랐다.

‘이건 거의 재창조한 수준인데?’

이안의 악보는 편곡의 수준을 넘어선 상태였다.

앞선 난이도의 악보를 답습하되, 너무 같은 느낌이 들지 않도록 일부 구간에 이전 악보보다 훨씬 발달된 선율이 들어가 있었다.

메인이 되는 선율은 같아 익숙하게 느껴지면서도, 새로운 도전 의지를 불태우는 구간을 넣어 연습에 더욱 총력을 가할 수 있도록 만든 것.

교재를 위한 악보를 만드는 것은 전공자도 배우지 않는 것이었기에.

루퍼트는 이안의 악보를 전율이 일렁였다.

‘범재가 천재를 이해할 순 없겠지.’

그동안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이어왔던 이안 아닌가.

‘대체 어떻게? 왜?’라는 식의 질문은 불필요했다.

이안은 그저 악보와 연주로 증명하지 않았던가.

그대로 교과서로 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난이도 편성.

대단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태였다.

루퍼트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 대신 이안의 실력을 고스란히 믿기로 했다.

‘반드시 세계적인 교과서가 될 것이야.’

오랫동안 편집장으로 살아왔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루퍼트마저 매료시킬 정도로 난이도와 만족감을 주는 악보들.

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얼마나 집중될지.

악보를 잡은 루퍼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박이안은 이미 거장이다.’ 폴란드 유명 피아니스트의 선언이 화제 중.

더 클래식. ‘앞으로가 기대되는 신예 음악가’ 1위로 박이안을 선정.

비엔나 하르모니아. ‘박이안 피아니스트와의 협업은 영광이었다.’라고 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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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주회가 끝난 다음 날.

내 이름을 들어간 기사들이 줄을 이었다.

독주회를 본 여러 거장들이 내 연주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이어갔다.

누군가는 독보적인 멜로디라며, 누군가는 클래식을 가장 잘 차용한 연주였다며.

일부 거장은 나와 함께 듀엣 연주를 펼치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여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젊은 거장과, 농익은 노장의 연주가 함께 펼쳐지면 어떻겠냐고.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반응들이 줄을 이었다.

그뿐만이랴, 여러 음악 잡지사에서는 여러 순위표에 내 이름을 등재하여 미래가 기대된다며 긍정적인 평을 내놓았다.

숱한 기사들을 넘기던 중, 빈 필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기사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New Classic의 활로를 열기 위해 유튜브를 개설하겠다고 선언.

‘전통만 고집하던 양반들이?’

나는 곧바로 기사 링크에 첨부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유튜브 채널로 들어갔다.

간드러진 필기체로 쓰인 오케스트라 네이밍을 간판으로 단 빈 필의 공식 채널.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소식을 접했는지 구독자도 꽤 빠른 기세로 늘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첫 영상의 제목은 나의 눈길을 더욱 확실히 사로잡았다.

‘New Classic, Started by Ian.’

직역하면 ‘이안으로 시작된 새로운 클래식’ 정도 되는 제목.

1분가량 짧게 편집된 영상에서 익숙한 선율이 들려왔다.

‘이건 <환생>의 3악장인데?’

점차 빨라지는 선율이 특징인 <환생>의 제3악장.

하지만 피아노 단독으로 펼쳤던 내 <환생>과 달리 빈 필 버전의 <환생>은 관현악단의 선율을 고스란히 펼치고 있다.

빠르게 진행되는 바이올린 선율이 멜로디를 담당하고, 첼로와 바순과 같은 낮은 선율들이 반주를 자처하여 펼쳐진다.

1분간 빠르게 스쳐 지나간 선율이 끝나자 말미에는 ‘Coming Soon’이라는 글자가 떠오르며 영상이 종료된다.

그동안 정통성을 고수하던 빈필의 태도 변화.

고개를 갸웃거리던 찰나, 큰아버지가 들어왔다.

“너도 빈 필의 영상을 보고 있었냐.”

큰아버지를 통해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독주회 직후 온 레오의 연락.

앞으로 새로운 클래식을 보여주기 위해 분골쇄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그 시작을 위해 내 자작곡을 커버하겠다고.

내가 만든 곡이야말로 앞으로 클래식이 가야 할 방향이라고 했다나?

‘빈 필이 커버를 한다면 더 많은 이들이 알겠지.’

비엔나의 음악가들은 물론, 전 세계의 클래식 팬들이 주목하는 비엔나 필하모닉.

그들이 내 곡을 커버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내 자작곡을 들을 수 있으리라.

게다가 어머니가 플루트로 새로운 선율을 만들어내었듯, 그들도 관현악 특유의 웅장함으로 내 자작곡을 재탄생시키겠지.

더 많은 이들이 내 곡을 들을 수 있다면 문제없으리라.

큰아버지도 내 뜻을 미리 알고 레오의 요청에 응한 것이겠지.

“그럼 손에 들린 그 종이들은 뭐예요?”

큰아버지는 그제야 원래 목적이 떠올랐다는 듯, 서류들을 내려놓았다.

국내 공중파를 포함한 숱한 방송사들이 여러 섭외를 보내온 것.

간단한 인터뷰를 포함하여, 최근 핫한 셀럽들을 섭외하여 진행하는 예능 프로그램도 있었다.

그동안 밀린 방송사 섭외들이라고.

“그중 인터뷰 질문 내용들로 괜찮은지 판별해 봤다.”

큰아버지는 서류뭉치 사이로 서류를 몇 개 더 내려놓았다.

예비 질문들을 미리 받고, 그 질문들의 수준으로 인터뷰를 판별하겠다는 뜻.

큰아버지의 철저한 성미가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단순히 소감이 어떠냐는 간략한 질문 대신, 앞으로의 행보와 곡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질문들로 추려진 항목들.

모두 나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인터뷰 용지들을 차근히 살피던 중, 큰아버지가 조심스레 무언가 하나를 덧붙였다.

“통일부에서도 제안을 보내왔더라.”

“통일부에서요?”

통일부면 정부 산하 기관이 아닌가.

내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반문하자, 큰아버지는 관련된 제안이 있다고 말을 이었다.

남북 정상회담.

매번 상의에서 그쳤던 정상회담이 10년 만에 열린다고.

게다가 이번 정상회담은 평화를 위한 판문점 선언 이후 7주년이란 명목으로 더욱 의미가 깊은 날이었다.

뜻깊은 날을 기념하기 위한 남북 특설 무대를 준비하는 거라고.

“통일부에서 특별 서한까지 보냈다.”

큰아버지는 나에게 또 다른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정부 마크가 큼직하게 찍힌 서한.

앞장에는 뜻밖의 인물이 보낸 편지도 첨부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 음악 도시에서 성공리에 독주회를 마친 것을 축하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남북 정상회담 축하 무대를 이안씨와 함께 하고 싶어 서한을 보냅니다.

.

.

국무총리 정태수.

직인까지 찍혀있는 서한.

국무총리가 직접 나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큰아버지도 국무총리의 서한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한민국의 이인자가 직접 보낸 요청.

“할 거냐?”

큰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잠깐 생각을 더 했다.

무척 좋은 기회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문화 교류를 명목으로 양국의 음악가를 초빙하는 무대인 만큼, 북측에서도 대단한 실력가가 나올 테니까.

좀처럼 공개되지 않는 북한 예술가의 무대.

새로운 경험을 쌓는 의미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게다가 남북 정상회담으로 국내 시선뿐만 아니라 외신의 시선도 한 번에 사로잡을 수 있는 무대이리라.

열린다는 소식만으로도 세간의 주목을 받은 역사적인 사건.

그 중심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예술가에게는 큰 커리어가 되리라.

게다가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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