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88화 (88/250)

88화

아침부터 다목적홀은 시끌벅적했다.

앞으로 남북 정상회담 축하 무대 팀이 사용될 곳이라고.

오늘이 첫 미팅인 만큼 스태프들이 준비를 서둘렀다.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의자와 테이블을 세팅하고, 세션들이 사용할 악기들을 미리 비치했다.

한창 정리가 진행 중일 때, 출입문이 활짝 열렸다.

“안녕하세요~”

한 여인이 생글한 미소를 띤 채 다목적홀로 들어왔다.

홀에 테이블을 비치하던 스태프들이 여인의 등장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

여인을 알아본 사람들이 조금씩 여인에게 다가갔다.

누군가는 팬이라며 사인을 부탁하기도, 누군가는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여인은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찬희님 정말 팬이에요!”

“진짜 너무 예쁘세요!”

이찬희.

서글한 눈웃음이 매력인 사람.

50대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그녀의 목소리엔 힘이 넘쳤고, 기품이 흘렀다.

평생이 전성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재까지 ‘고음 킬러’로 통하며 유수한 노래를 펼쳤던 디바.

찬희도 이번 남북 정상회담 축하 무대에 오르는 사람 중 하나였다.

“조금 도와드릴까요?”

준비를 하던 스태프들이 말렸지만, 어느덧 찬희는 물을 가져와 테이블에 얹었다.

오랜 시간 연예계에 몸담으면서 게을러질 법도 하건만.

찬희는 중견 가수가 되었음에도 항상 스케줄보다 일찍 나와서 스태프들을 돕곤 했다.

스태프들은 찬희 덕에 일이 빨리 끝났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모두가 나가고 찬희 혼자 있던 중.

그녀는 땀 때문에 삐뚤어진 화장을 고치고자 화장실에 다녀왔다.

다시 홀로 돌아와 문을 열기 직전…

‘누가 왔나?’

분명 몇 분 전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약간 벌어진 문틈 사이로 은은한 멜로디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연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인 채 안으로 들어왔다.

소리의 근원지는 사내가 연주하고 있던 키보드였다.

‘박이안 피아니스트?’

찬희 또한 이안에 대해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카타리네 스튜디오 영화에서 그의 음악을 들었던 것은 물론, 오스트리아에서 펼친 라이브 독주회도 실시간으로 봤던 터.

게다가 이번 축하 무대에 함께한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이안씨도 일찍 와서 손을 풀고 있나 보네.’

은은한 종소리를 연상케 하는 편안한 선율.

이른 새벽부터 준비했던 찬희에겐 마치 자장가처럼 들렸다.

하지만, 계속 듣고 싶어서 잠을 자고 싶지 않을 정도의 유려한 음색.

찬희는 눈을 감은 채 음악을 경청했다.

음악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안이 연주하는 곡은 찬희의 40년 음악 인생에서도 들은 적이 없는 곡이라는 것을.

***

미팅 30분 전이라서 그럴까.

다목적홀은 정갈하게 세팅이 된 채 텅 비어있었다.

앞으로 연습을 할 곳이라는 통일부 담당자의 말에 먼저 와서 살피고 싶었다.

객석은 비교적 소규모였지만, 여러 연습을 할 수 있게끔 무대는 넓었다.

스무 명에 달하는 출연자들의 사전 미팅을 위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들이 비치되었음에도 공연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무대.

무대의 한편에는 세션들이 사용할 수 있는 악기들이 놓여있었다.

‘손이나 풀어볼까?’

새벽까지 곡을 완성하는 데 집중해서 그럴까.

무대 한편에 있던 키보드를 보자 머릿속에서 악보가 떠올랐다.

시계를 보니 아직 사람들이 오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기에.

나는 자연스레 키보드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원을 켜고 플라스틱 건반을 누르자 강한 선율이 튀어나왔다.

피아노의 울림을 따를 수는 없지만, 강렬한 시작으로 전개되는 곡.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선율이 빠르게 홀을 채워간다.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면서도, 그러지 않은 평화로운 시기를 보여주기 위한 음색.

내 머릿속에서 떠오른 이야기들을 들려주기 위해 손가락이 바삐 움직인다.

한 차례 연습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한 명의 박수 소리가 홀을 울렸다.

“멋진 연주였어요. 박이안 피아니스트님.”

갈색 머리칼에 붉은 립스틱을 바른 여인.

얼굴을 보자마자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찬희 선생님.”

한국 사람이라면 이찬희를 모른다면 간첩이리라.

속칭, 고음 킬러라고 불리는 찬희의 곡은 제목은 몰라도 들으면 누구나 알 법한 정도였으니까.

3옥타브 솔이라는 어마무시한 음에 여자들의 고음을 상징하는 대표곡.

선생님이란 칭호에 찬희는 부끄럽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제가 선생님이면 이안씨는 거장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데요?”

그녀는 내 앨범까지 구매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스케줄 때문에 오스트리아를 가진 못했지만, 라이브 독주회는 실시간으로 보았다고.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고, 때론 신이 난 듯 심장이 뛰었다고.

내 연주에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표현했다.

“요즘 일어나면 <영감>을 듣곤 해요. 뭐랄까. 활기찬 느낌이 들어서 아침을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게 만든달까요?”

매우 듣기 좋은 노래들이라고.

요즘 내가 만든 곡을 들으며 음악 인생을 환기시킨다고 덧붙였다.

찬희의 너스레는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다가오고 나서야 끝이 났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무대 위에 있던 테이블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차기 시작했다.

홀에 들어오던 사람들은 나를 보곤 한 마디씩 건네고 들어갔다.

“박이안 피아니스트시죠? 독주회 연주 정말 잘 들었습니다.”

힙합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을 거머쥔 사람부터.

“이안씨 연주야말로 진정한 마술이죠. 어떻게 그런 연주를 하실 수 있는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대한민국 유명 마술사까지.

남측을 대변하는 연예인 인사들이 하나같이 나를 보고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고 자리에 앉았다.

한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거물급 연예인들이건만.

그런 연예인들이 되레 나를 연예인 보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몇몇은 앨범을 구매했노라고.

실시간으로 라이브 공연을 봤지만, 묘한 아쉬움이 있었다고.

다음 독주회 때는 직접 객석에 앉아서 연주를 듣겠다며 포부를 밝히는 연예인도 있었다.

“모두 다 모이셨군요.”

정시가 되자 통일부 담당자와 함께, 이번 무대의 총 연출을 맡은 현춘이 등장했다.

현춘의 말을 시작으로 남북 정상회담 축하팀의 첫 미팅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

‘서로 화합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무대이지.’

현춘의 철학은 확고했다.

각자의 곡뿐만 아니라, 함께 하모니를 맞추는 무대도 있는 만큼.

현춘은 남북 정상회담 축하 무대 연출을 맡을 때마다 화합을 중요시했다.

그렇기에 단순히 정보 전달로 끝날 수 있는 부분도 대규모 미팅을 진행하여 전달하고, 곡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미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북측에 가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 계획과 일정을 공유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일러주는 과정.

추가로 각 팀에서 제공한 플레이리스트를 검토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도 현춘의 몫이었다.

“모두 좋은 곡들을 제시해줘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몇 개 아쉬운 부분을 짚고 넘어가려고 해요.”

푸근한 미소를 지닌 현춘이었지만, 업무에 대해서는 무척 날카로웠다.

이번 무대에 어울리지 않는 곡에 대해서는 곡 변경 요청을 하는가 하면, 분위기에 따라 플레이리스트의 순서에 따라 순번을 바꾸는 것에도 거침이 없었다.

베테랑 가수들이 고심 끝에 내놓은 플레이리스트라 거부 반응이 있을 법하건만.

현춘의 언변은 그런 베테랑들도 굽힐 정도로 뛰어났다.

“좋은 선곡 해주셨네요. 추가로 무대 연출을 위해 편곡을 진행하고 싶은데, 어떤가요?”

현춘의 입에서 편곡 방향에 대한 설명이 술술 흘러나왔다.

몇몇 가수들은 생각지도 못한 방식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중음악은 물론, 무대 연출에 대해서도 권위자였던 현춘이기에.

미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자작곡 준비는 잘 되어갑니까?”

“네.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담담한 이안의 말투에서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현춘 또한 이안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악보가 나오길 누구보다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안부차 질문을 하고 넘어가려던 찰나, 찬희가 문득 떠오른다는 듯 이안에게 질문했다.

“혹시 아까 연주하던 곡이 이번 무대에서 연주할 곡이었나요?”

“맞습니다. 아직 1차 완성이라 디테일이 부족하지만, 곧 채울 수 있을 겁니다.”

이안의 긍정 표현에 찬희가 호들갑을 떨었다.

들어봤는데, 무척 대단했다고.

무대에 있던 키보드로 연주했는데, 피아노에서 들릴 법한 웅장함이 그대로 재현되었다고 했다.

도리어 1차 완성이라는 말에 놀라며 겸손하다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1차 완성이라지만, 완성도가 무척 높았다고.

이안의 말을 들으니 더욱 무대가 기대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둘의 대화를 듣던 현춘은 눈만 끔뻑였다.

‘벌써?’

그저 확인차, 안부 묻듯 가볍게 내놓은 질문이었다.

이안이 제안을 수락한 지 이제 겨우 3주가 지난 무렵이었기에.

완성은 무슨, 악상을 떠올렸다고만 해도 대단한 수준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일반적인 가요가 아니라 피아노곡이지 않았던가.

피아노곡은 보통 3~4분 만에 끝나는 곡이 아니었다.

특히, 뉴에이지가 아닌 클래식풍을 지닌 이안의 곡은 짧아도 7~8분, 길면 10분이 훌쩍 넘는 곡들이었다.

그동안 이안이 만든 곡을 누구보다 면밀히 분석했던 현춘이었기에.

3주 만에 1차 완성을 했다는 것은 이해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었다.

‘일찍 와서 들을걸!’

현춘이 아쉬움과 호기심에 손을 떨었다.

그가 정시에 등장한 이유는 담당자와의 대화를 한 것도 있었지만, 후배 가수들을 위한 배려였다.

아무리 편안하게 있으라 해도 긴장 어린 모습을 보이는 후배들이 많았기에.

적어도 대기하는 시간 동안은 편하게 있으라고 일부러 늦게 왔거늘.

일찍 왔다면 이안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렇다고 갑작스레 연주를 청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런데.

“아직 완성이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먼저 들어보시겠습니까?”

현춘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생각이 읽힌 것 같아 부끄러워하려던 순간.

이안의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곁에 있던 다른 연예인들이었다.

때론 미완성이 날 것 그대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며 이안의 연주를 독려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반응에 현춘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기대를 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리어 좋은 기회다.

현춘은 누구보다 기쁜 얼굴을 한 채 이안에게 정식으로 요청했다.

“그럼 한 번 청해도 될까요?”

현춘의 말에 이안은 기꺼이 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유롭게 키보드 앞에 걸어간 이안은 익숙한 듯 전원을 켜고 소리를 테스트했다.

테스트 삼아 건반을 누르는 데도 사람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잠깐의 손 풀기를 끝낸 이안이 천천히 자작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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