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비엔나 루트비히 출판사.
루퍼트 편집장은 집무실에서 마지막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루퍼트의 손에 쥐어진 책.
바로 이안의 연주곡 교재의 초판본이었다.
원본 악보의 퀄리티가 너무 좋아 편집하는데 단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예상보다 훨씬 빨리 초판이 나와 이제 출판 일정만 잡으면 끝이었다.
“편집장님. 박이안 피아니스트가 이번 남북 정상회담 축하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 들으셨나요?”
이안의 책을 담당하게 된 직원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특별전과 독주회에 이어 이번에도 자작곡을 펼친다고.
심지어 이안의 연주는 대미를 장식하는 하이라이트에 펼쳐진다고 덧붙였다.
이번만큼 좋은 기회가 없다며 직원이 너스레를 떨었다.
“한 달 뒤. 남북 정상회담이 시작하는 때에 책을 출간하면 딱이지 않겠습니까?”
루퍼트 편집장에게도 익숙한 마케팅 전략이었다.
세간의 관심을 받은 시점에 그 사람이 낸 책을 낸다.
흔히 유명인의 자서전을 광고할 때 사용하는 마케팅 방법이었다.
해외에서는 비트코인으로 크게 유행을 탄 사람의 자서전을 재출시하면서 다 죽어가던 출판사 하나를 살린 사례도 있지 않던가.
이미 많은 클래식 팬들에게 이름을 떨친 이안이었기에.
직원은 타이틀이 하나 더 들어가면 더욱 좋지 않겠냐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베토벤의 영혼을 불러일으킨 피아니스트, 이젠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평화의 선율을 노래한다.’ 정말 매력적인 슬로건 아닙니까?”
직원의 말은 무척 설득력이 있었다.
슬로건을 추가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기에.
그 슬로건으로 부가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루퍼트의 머릿속에는 신입 사원과 조금 다른 생각이 자리 잡혀 있었다.
“지금 일한 지 얼마나 됐죠?”
“이제 막 한 달 차가 되었습니다.”
“그럼 조앤 롤링의 책을 어떻게 마케팅했는지 알겠군요?”
직원의 입에서 곧장 답변이 튀어나왔다.
영화의 흥행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음에도 영화에 힘입어 광고하지 않았던 조앤 롤링이지 않았던가.
영화의 원작이라는 타이틀조차 광고로 활용하지 않았던 소설.
하지만, 1500만 부를 판매한 엄청난 성과를 이룩하지 않았던가.
표지에 영화 포스터 한 장만 붙여도 엄청난 마케팅 성과를 올릴 수 있을 텐데도 하지 않은 이유.
원작 자체의 뛰어난 가능성 때문이었다.
루퍼트는 이안이라는 원작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안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마케팅입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출간 일정을 잡도록 하죠.”
***
‘되게 깔끔하게 잘 나왔네.’
내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베토벤 재단 산하, 루트비히 출판사에서 출간한 음악 교재.
독주회를 준비하는 틈틈이 편곡했던 곡이 고스란히 실려있었다.
편집장은 교재와 동봉한 편지에 워낙 편곡 수준이 높아 편집팀에서 건드릴 것이 없었다며.
책으로 만드는 과정만 거친 덕에 예정보다 훨씬 빨리 출간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 인기가 벌써부터 대단하다고.
베토벤 재단의 운영팀장, 클레어가 직접 메일을 보낼 정도였다.
‘단체 구매 연락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온라인 서점과 오프라인 유통사는 물론, 각국의 학원에서도 문의 전화가 얼마나 오는지 셀 수 없을 지경이에요.’
이안의 명성을 고려하여 일반적인 초판 부수보다 월등히 많은 부수를 찍어냈다고.
그럼에도 너무나도 빠르게 팔려나가 밤낮 할 것 없이 책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전했다.
이를 증명하듯, 유튜브에는 벌써부터 교재 구매 리뷰와 연주하는 영상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루의 시작이 무척 긍정적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피아노 앞에 몸을 옮겼다.
‘내일이면 최종 연습 일이구나.’
첫 미팅으로부터 2주가량이 흘렀다.
그사이에 나는 새로운 자작곡에 대한 세부 사항을 전면적으로 검토했다.
악보는 완성 단계.
이제 해야 할 것은 부분적인 셈여림과 강세, 그리고 어떤 조율이 가장 잘 어울릴지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어느 하나 놓칠 수 없었다.
지난 연습 때 공연 순서를 정하는 과정에서 내 책임이 더욱 막중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안씨의 곡은 가장 많은 기대를 받고 있고, 피아노 독주이기에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게 해두었습니다.”
현춘의 말과 함께 모든 출연자들의 시선이 꽂힌 것이 생생했다.
공연에서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순서.
피아노 독주임과 동시에 북측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대미를 장식할 기회를 얻었다.
나 이외에 모두 몇 년간 무대에서 경험을 쌓은 베테랑이건만.
그들은 오히려 축하한다는 듯 박수를 쳤었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나 또한 최선을 보여주는 것이 도리일 터.
곡의 세부적인 사항을 챙기기 위해 손가락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시작은 낮고 장엄한 단조의 선율.’
웅장한 기색이 돋보이는 음색이 시작된다.
행진을 떠올리게 하는 묵직한 선율이지만, 무척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다.
전쟁의 참상을 표현한 부분이기에 장엄하면서도 공포감을 조성해야 한다.
격앙된 비명을 표현하듯 진하면서도 강렬한 선율이 음악실을 가득 메운다.
‘전생의 기억에서 봤던 것을 떠올리듯.’
가상의 악보를 떠올림과 동시에.
전생이 보았던 참상을 떠올리자 곧바로 미간이 좁아졌다.
마치 지옥도를 연상하듯.
참담한 심정이 고스란히 손가락에 담긴다.
전생의 실상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어 앞으로 이러한 일은 있어선 안 된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힘있게 건반을 누르자 잔혹한 선율이 퍼져나간다.
평소 연주하던 것에 비해 무척 진하게.
이후에 등장할 반전을 위해 다소 과할 정도의 선율이 날뛰도록 둔다.
연습을 마무리했을 즈음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했다.
밤을 넘어 새벽녘이 되어서야 나는 피아노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더욱 완벽하게 펼칠 반전을 떠올리며 내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다목적홀의 끝자락.
두 남자가 뒤쪽 객석 한편에 앉아 출연진들의 연습을 보고 있었다.
한 명은 국무총리 정태수, 그리고 한 명은…
“대통령님께서도 많이 기대하시는 모양입니다. 비서실장님이 직접 시찰을 오실 정도면 말 다 한 것 아니겠습니까.”
대통령 비서실장, 최진웅.
대통령의 업무를 직접 보좌하는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다.
남북 정상회담 준비로도 바쁠 텐데, 비서실장이 축하 무대를 시찰하러 오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행보였다.
특히 이번 남북 정상회담의 의미가 얼마나 큰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판문점 선언 7주년, 무려 10년 만에 열린 남북 정상회담.
정부 인사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대통령 또한 이번 특설 무대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말단 직원 대신 비서실장이 직접 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모두 우리나라를 빛내줄 사람들 아닙니까. 대통령님께서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지요.”
진웅은 근엄한 어투로 출연자들에게 공을 돌렸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유명인들.
출연자 정보를 찾기 이전에 진웅도 각자의 프로필을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이름난 유명 연예인이었다.
연예인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진웅도 알 정도라는 것.
이번 축하 무대의 출연진들이 얼마나 유명인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게다가 이번 무대는 더욱 특별하지 않던가.
“총리님이 이번 무대 준비에 큰 기여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박이안 피아니스트도 직접 설득하셨다고요.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허허. 그저 부탁하는 편지 한 통 썼을 뿐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 사람에게 꽂혔다.
객석에서 출연자들의 음악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청년.
바로 박이안 피아니스트였다.
진웅도 이안의 출연에 무척 반색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여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대한민국 피아니스트.
대통령도 이안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던가.
이안의 위대함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북협력팀장에게 보고 받았습니다. 현향란 단장도 이안씨에게 무척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요.”
진웅 또한 북측 담당자가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는 것을 들은 후였다.
현향란 모란봉악단 단장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자명한 사실.
진웅은 온건한 미소에 속아 몇 번이고 일을 그르쳤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안이 출연 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에 출연자 전원에게 북한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을 주는가 하면, 요청 사항이 있다면 알려달라는 친절한 말까지 덧붙이지 않았던가.
“저는 그 얼음 마녀가 그리 친절하게 변할 줄 몰랐습니다.”
무산되었던 지난 남북 정상회담 때.
당시 축하 공연을 준비하면서 있었던 일이 진웅에게 생생했다.
전달받은 바에 의하면, 팝송을 무대에 올린다고 했다가 미제 앞잡이라며 출연 거부했다지.
그 때문에 곡 선정에 대한 신빙성을 잃었다고 무대 전체를 중단하지 않았던가.
“북한의 클래식 열풍도 한몫하지 않았겠습니까.”
태수의 짐작에 진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 북한 지도자가 클래식에 대해 무척 강한 열망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유명했다.
지도자 자리에 오르자마자 북한 예술 기관을 순방할 정도였으니.
북한 예술 유치원인 경상유치원을 시작으로, 여러 영재 기관에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그가 들어서고 단 1년 만에 북한에서 유수의 음악가들을 세계 무대로 내보내고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안은 서방이 아닌 국내에서 음악을 수학한 청년 아닙니까. 체제상으로도 이안씨의 행보를 무척 독보적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태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평가했다.
북한의 모토.
자국에서 만들고 키운 인재가 세계를 호령한다.
음악적 수준뿐만 아니라 북한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이안만큼 우수한 인재가 없었다.
클래식을 수학하되, 자신만의 스타일로 음악을 펼친 이안의 존재가 북한에게는 큰 귀감이 됐으리라.
“그런 것을 고려하면 이안씨는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묵직한 진웅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우러나왔다.
현 정부 들어서 많은 예술가를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예술과 관련해서는 사설 기관이나 외국의 힘을 빌리는 것이 대부분.
그렇기에 유수한 음악가들이 한국에 머무르지 않고 외국으로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그런 앞선 예술가와 달리 이안의 행보는 무척 독보적이었다.
별도의 유학을 다녀오지 않았음에도, 유명 음대를 자퇴하는 무리수를 뒀음에도.
이안은 스스로 길을 개척하고 무대를 넓혀가지 있지 않은가.
“이번 기회를 통해서 대통령님도 예술계 지원을 더욱 활발하게 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예. 음악 관련 교육에 힘쓸 수 있게 교육부와도 조율할 계획입니다.”
제2의 이안이 나타날 수 있도록.
이안의 활약은 비단 음악을 연주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일부 학계에서는 새로운 이안이 배출되기 위해선 국가적 차원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촉구했을 정도였다.
단순히 클래식 음악을 역사학적으로 가르치고, 성적을 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어렸을 때부터 감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연주를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안의 모토가 새로운 씨앗을 틔우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까지 힘냅시다! 이안씨, 준비해주세요.”
현춘의 기합과 함께 최종 리허설은 막바지에 도달하고 있었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이안이 무대로 올라가자 출연자들이 박수를 치며 독려했다.
이안은 무척 담담한 표정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마치 자신이 보여줄 것은 정해져 있고, 그것을 보여준다는 사람처럼.
이안의 손이 천천히 건반에 닿자 묵직한 선율이 홀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