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가상의 오선지에 맺힌 핏빛 음표를 고스란히 재현해내기 위해.
긴장감마저 느껴지는 낮은 음색이 연습실을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Largo.
느릿하게 펼쳐지는 선율이 위압감을 조성한다.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낮고 잔인한 선율.
음색이 퍼져나가자 사람들이 숨을 참기 시작한다.
연주하는 나조차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강렬한 음색.
마치 이래서 안 된다고 얘기하는 듯.
연주를 하는 내 고개가 연신 도리질을 이어간다.
‘전쟁이 없었다면 없어도 될 광경.’
악보를 떠올리는 머릿속에 끊임없이 참혹했던 전생의 기억이 더해진다.
비명을 나타내도록 높은음 건반을 강타하자 몇몇 출연자들이 움찔거렸다.
사람들의 주먹이 긴장감으로 꽉 쥐어졌을 즈음.
음악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전과 반대되는 유려한 선율의 전개.
‘반전을 통해 평화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평화.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 없이 평온한 상태.
물론 평화를 떠올리는 잔잔한 선율은 언제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잔잔한 선율의 연속은 뉴에이지와 다를 바 없었다.
평화라는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
참혹한 선율을 도입부에 전개한 이유였다.
이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은은한 멜로디에 사람들의 표정이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진다.
연주를 끝내자 이전 출연자들에게 해줬든 박수가 쏟아져나왔다.
다르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다는 것.
그중에서는 못 보던 얼굴도 있었다.
“무척 인상 깊은 연주였습니다.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하군요.”
짙은 남색 정장을 입은 사내.
희끗한 머리칼이 그의 나이를 짐작게 만들었다.
옆에 있는 잿빛 정장의 남자 또한 그와 비슷한 연배리라.
처음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던 나는 통일부 담당자, 성환의 태도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성환은 무척 각이 잡힌 태도로 둘을 소개했다.
“최종 리허설을 보러오신 국무총리님과 대통령 비서실장님입니다.”
성환의 소개에 출연자들이 크게 술렁였다.
대한민국의 2인자와 대통령의 오른팔이 등장했으니 당연한 것이겠지.
국무총리는 나에게 직접 출연 제의 서한을 보낼 정도로 열정이 강했기에 예상했건만, 비서실장의 등장은 예상 밖이었다.
“대통령 비서실장, 최진웅이라고 합니다.”
진웅은 나를 향해 악수를 청했다.
무척 만나보고 싶었다고.
나의 존재만으로도 많은 기대를 받는 것은 물론, 숱한 변화를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대통령님께서도 이안씨의 활약에 무척 기대하고 계십니다.”
최종 리허설에 직접 오지 못해 아쉬워하셨다고.
리허설에 직접 오진 못했지만, 비서실장을 보낼 정도로 열의가 강하다는 대통령의 뜻을 전했다.
게다가 내 출연으로 외신들도 정부에 여러 문의를 넣고 있다는 소식까지 덧붙였다.
그들이 말한 기대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안씨 덕에 저희 교류 체계도 무척 원활해졌습니다.”
진웅은 모든 것이 내 덕이라며 밝은 기색을 내비쳤다.
북측 담당자가 이러한 유려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고.
내가 참여한다는 의사를 밝히자 북측에서 북한 최고 호텔 이용은 물론, 자체 제작한 악기를 지원하겠다는 등, 열렬한 지원을 약속했다고 덧붙였다.
북한 측에서 무언가를 먼저 하겠다고 한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라고.
“이번 북측 지도자가 클래식에 큰 투자를 하는 만큼, 이안씨의 출연을 반가워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진웅은 나에게 북한이 얼마나 클래식에 진심인지 몇 가지 사실을 일러주었다.
이번 북측 지도자가 클래식을 비롯해 음악에 대한 교육열을 높이고 있다고.
교육기관을 전면 재설정하는 것은 물론, 북한 인재를 해외 콩쿨에 출연시키는 것까지.
기존에 유명하던 모란봉악단을 시작으로, 여러 관현악단 추가적으로 편성하며 클래식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죽하면 북측 고위급에서는 클래식을 배우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정보까지 말해주었다.
“관계 개선을 위해 저희 측에서는 인도적 지원도 제공할 예정입니다.”
진웅의 입에서 여러 종류의 지원 물품이 튀어나왔다.
악기를 비롯하여 일부 악기에 필요한 소모품, 악보 등.
모두 음악을 전공하는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것들이었다.
진웅이 말한 것으로도 충분해 보이는데, 진웅은 너그러운 말투로 나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이안씨가 추천하실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쇼. 클래식을 전공하시는 만큼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내게서 좋은 아이디어를 기대하는 듯 눈을 반짝였다.
대부분의 물품들이 진웅의 입에서 나왔기에.
충분할 거라고 답하려는 찰나, 내 머릿속에 무언가 하나 떠올랐다.
“가능하면 제 교재도 함께 지원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클레어가 말하지 않았던가.
난이도 조절과 진행 방식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아서 판매량이 끊임없이 올라가고 있다고.
이미 숱한 리뷰와 전문가들의 소견으로 우수함이 검증된 교재라고 했었지.
좋은 평을 받았기에 그저 내려놓듯 편하게 말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를 들은 진웅은 생각지 못했다는 듯.
무척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북측에서도 이안씨를 무척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그쪽에서도 반가워할 겁니다!”
진웅이 좋은 제안이라고 칭찬을 이어갔다.
북측에서 나를 생각하는 정도를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우상화로 인해 다른 거장들의 작품을 받지 않는 북한이 이안의 곡이라면 받을 것이라며 현실적인 가능성을 내비쳤다.
가능하다면 나 또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도리겠지.
“그럼 루트비히 출판사에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메일 한 통 정도 보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출판사나 베토벤 재단에 상황을 설명해두면 정부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이 한결 편할 테니까.
곡을 더욱 알릴 수 있는 기회라면 기꺼이 할 의향이 있었다.
연락을 해본다는 말에 진웅은 재차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묻는 것처럼.
진웅의 얼굴에 의문과 경외감이 가득했다.
***
최종 리허설을 끝낸 날 밤.
나는 곧바로 베토벤 재단 측에 메일을 보냈다.
남북 정상회담 때 북측으로 내 이름을 단 교재를 일부 기증하고 싶다고.
빠른 시일 내에 출판 및 운송이 가능하겠냐는 질문을 던졌다.
단 몇 시간 만에 클레어가 답신을 보내왔다.
-우리에게도 무척 좋은 제안이네요. 편집장에게 일러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메일을 통해 엄청난 자신감을 내비쳤다.
내 곡을 담은 교재를 찍어내기 위해 재단이 보유한 공장을 최대로 가동하고 있다고.
만드는 족족 교재가 팔려나가고 있다며 기쁜 마음을 표출했다.
게다가 북한이라는 폐쇄적인 국가에 자신들의 책을 공급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기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나 또한 클레어와 같은 생각이었다.
‘무척 이례적인 상황이겠지.’
누구나 원한다면 유튜브에 접속하여 내 자작곡 독주회를 들을 수 있다.
그것이 불가능한 곳을 꼽자면 유일하게 북한을 들 수 있겠지.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대해서 폐쇄적인 정책을 펼치는 북한이니까.
이번 기회로 북한에도 내 음악을 전할 수 있다면, 누구든 음악을 들을 수 있게끔 한다는 내 철학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루트비히 출판사의 뜻을 전한지 얼마 뒤.
통일부 대북협력팀, 성환이 무척 긍정적인 연락을 보내왔다.
“북한에서 이안씨의 교재 기증을 수락했습니다!”
성환의 격앙된 목소리가 고스란히 전달됐다.
북측에서 예술 물품을 받아들인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것이라며.
남북 관계에 개선 여지가 보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성환뿐만 아니라 진웅도 직접 감사 인사를 표했다.
“먼저 제안을 해줘서 고맙습니다. 이번 일은 무척 기념비적인 사례가 될 겁니다. 서구 문화를 받지 않는 철옹성에 클래식 음악을 보급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실적이 될 테지요.”
엄중하던 진웅의 목소리가 묘하게 밝았다.
아마 클래식 거장들의 곡이 담긴 악보였다면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내가 교재를 기증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자, 북측에서도 무척 반가워했다고 전했다.
특히 현향란 단장.
속칭, 얼음 마녀가 무척 밝은 기색을 보였다고.
“잘된 일이군요.”
나는 그들에게 모두 담담한 입장을 내비쳤다.
진웅의 말을 빌리자면, 무척 기념비적인 것이 사실이리라.
보다 많은 이들에게 음악이 알려지고, 이 기회를 통해 이름이 알려질 수 있는 기회.
교재 기증 소식에 벌써부터 국내 언론은 물론, 외신들도 빠르게 사실을 전파했다.
단순히 북한 측에 음악을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모습.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내 음악이 알려지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그럼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
남북 정상회담 축하 무대에서 보다 완벽한 연주를 선보이는 것.
내 손가락이 자연스레 건반에 올라갔다.
이제 분위기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본능적으로 악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영감>을 완성한 이후 곡을 만들 때 새로운 심상이 더해졌다.
‘마치 완성된 그림을 표현하는 듯이.’
눈을 감자 곧바로 악보와 함께 전생이 겪은 참상들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핏빛 음표로 가득한 도입부를 시작으로, 반전을 겪은 이후 음표들은 평화를 상징하는 하얀빛으로 반짝인다.
참상을 통해 평화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 곡.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점묘화를 보는 것 같아.’
점묘화.
선이 아닌 색색의 점을 찍어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
악보를 재현하면 마치 음표들의 머리가 점처럼 찍히더니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려나갔다.
검고 붉은 음표들이 모여 전쟁의 참상을 떠올리게 만들고, 푸르고 하얀 음표들이 평화로운 그림을 그려나간다.
그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곡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뀐다.
마치 내가 역사의 현장에 있고, 그 당시를 겪은 사람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표현하듯.
처절하기에 더욱 평화롭고, 평화롭기에 더욱 처절한.
감정이 더욱 강화된 선율.
아홉 번째 자작곡, <평안>이 방에 울려 퍼진다.
***
“향란 동지. 남조선에서 보낸 책이 도착했습니다.”
모란봉악단 단장, 현향란.
그녀는 아랫사람이 건넨 책을 받아들었다.
8개의 곡이 세 가지 난이도로 편성된 책.
악보를 하나씩 넘겨보던 향란의 눈이 미묘하게 좁아졌다.
‘믿기지 않는다.’
향란이 악보를 처음 보았을 때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녀는 오십이 넘는 나이까지 수많은 음악을 수학한 사람이었기에.
음악에 대한 향란의 관록을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유학을 다녀오고, 보다 높은 예술성을 가진 선전 음악을 만들었던 향란이었다.
그러한 수준 높은 안목을 가진 향란에게도 이안의 악보는 남달랐다.
‘정말 잘 만들었어.’
무척 간결한 초급 난이도.
그보다 조금 어렵지만 다채로운 선율이 일품인 중급 난이도.
다채로움을 넘어 화려한 기색이 엿보이는 고급 난이도까지.
화음의 전개는 같아도 반주 주법의 종류와 오른손 멜로디가 제각기 조금씩 달랐기에.
교재에 기재된 세 난이도의 곡은 일반적인 편곡의 수준을 벗어난 상태였다.
이미 완성한 곡을 다시금 해체하여 쉽게 바꾸는 것은 새로 곡을 쓰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그것을 스무 번 가까이 반복했을 이안의 모습을 떠올리니 향란의 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무리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녀라도.
향란 아래에서 예술을 배우고 있는 제자들도.
이안처럼 곡을 만드는 것은 역부족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번 공연에서도 자작곡을 펼친다고 그랬지?’
이안의 방북을 고려하기 위해 연주 영상을 찾아본 향란이었다.
최근 펼쳤던 이안의 독주회 영상은 향란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유려하게 펼치는 선율과 각자 다른 매력을 가진 자작곡들.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 이안의 곡이라 그럴까.
교재를 넘기던 향란은 묘한 떨림을 느꼈다.
‘이런 마음은 정말 오랜만인걸.’
최근 그녀가 걸어온 길은 음악가보다 정치가에 가까웠다.
성공을 위해 입대를 했고, 보다 완벽한 선전을 위한 연주를 펼쳤다.
악독할 정도로 완벽을 고수한 덕에 그녀는 대좌라는 계급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덧 뒤를 돌아보니 향란에게 쥐어진 음악은 감동을 전하는 매개체가 아닌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랬던 향란에게 이안의 곡은 가슴 한편을 따스이 녹여주는 듯했다.
‘연주해보고 싶어.’
향란은 어느덧 피아노 앞에 앉아있었다.
단장이자 피아니스트인 향란이었기에.
그녀는 곧바로 고급 난이도로 연주해도 손색이 없을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향란은 초급 난이도 악보를 펼쳤다.
편곡의 수준을 알아내기 위함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뭉클거리는 심장은 음악을 감성적으로 느껴보라고 호소하는 것 같았기에.
향란의 손가락이 악보의 지시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