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91화 (91/250)

91화

북한.

대한민국과 가장 가까운 외국이지만, 함부로 갈 수 없는 곳.

김포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국경을 넘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구름을 바라보던 조율사가 입을 벌리며 숨을 들이켰다.

“죽기 전에 북한에 갈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조율사는 무척 신이 난 듯 너스레를 떨었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북한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며.

돌아가시기 전에 고향인 평안도 이야기를 그리하셨는데, 안타깝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안씨에게도 고마워해야겠습니다.”

피아노는 북측에서 제공해주기로 했다.

현향란 단장이 최고급으로 준비해주겠다고 했던 터.

다만, 이안이 원하는 음색을 제대로 표출하려면 조율은 필수였다.

조율사가 대동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조율사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는다며 현철에게 마구 이야기를 쏟아냈다.

하지만, 정작 현철의 눈길은 조율사가 아닌 이안에게 향해 있었다.

‘전날 늦게까지 연습하더니.’

이안은 안대를 쓴 채 잠을 청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도착하기 직전인 지금까지.

왜 그리 곤잠을 자고 있는지는 현철만 알고 있었다.

출국 전날.

아침 일찍 함께 공항으로 가기 위해 이안의 집을 찾았던 현철이었다.

늦은 새벽까지 연습을 이어가던 이안의 모습에 현철도 기다리다 못해 잠들 정도였다.

아마 실질적으로 잔 시간을 계산한다면 4시간이 채 되지 않으리라.

다행히 비행기에서 단잠을 자고 있는 듯 옅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현철 또한 눈을 조금 붙이려던 찰나,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통일부 담당자, 성환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아, 북측에서 이안씨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고 싶다고 했었거든요. 이안씨에게 미리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왔습니다.”

“방금 잠들었습니다. 깨우지 말고 저한테 말씀하시죠.”

음악가에게 컨디션 조절은 필수다.

오늘 계획된 리허설을 위해서라면 충분한 휴식이 필요할 터.

전날 쉼 없이 연주를 이어갔던 것을 아는 현철은 성환을 제지했다.

성환은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곤 상황을 설명했다.

“북한에서 이안씨에게 강연을 요청했습니다.”

성환의 말에 옆에 있던 조율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게다가 강연을 하는 곳도 예사롭지 않은 곳이었다.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 우리나라 한국대 음대와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말 그대로 북한 내 최고 음악 대학.

북한 예술계의 원동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심지어 이안이 수락한다면 국내 최초로 외부 인사가 북한에서 강연을 하는 것이 된다.

그것만으로도 기념비적인 일이 될 것이다.

조율사는 역시 이안이 대단하다며, 북한에서도 이안의 실력을 인정하는 것 아니겠냐고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현철의 표정은 그리 탐탁지 않았다.

“다소 갑작스러운 경향이 있네요.”

본 공연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연습을 하며 현지 분위기에 적응하기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공연 전에 강연을 하는 것도 어불성설이고, 공연이 끝난 이후에도 그동안 연습으로 쌓인 피로를 풀어야 하기에.

현철은 지금 타이밍에 들어온 강연 제안이 달갑지 않았다.

“저는 부정적인 입장입니다만, 이따 깨면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날카로운 현철의 눈빛에 성환이 옅게 몸을 움찔거렸다.

엄중하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

이렇게 갑작스런 스케줄 추가는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물론, 음악가를 배려하지 않는 행위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현철이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이안이 할 것이라고.

약간의 여지에 성환은 돌아가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

창문 너머로 두 지도자가 서로 악수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외신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두 사람에게 향한 상태.

공식 촬영이 끝나면 우리도 내릴 수 있었다.

큰아버지는 그사이에 내가 잠든 동안 성환이 다녀갔다고 일러주었다.

“강연이요?”

“그래. 북측에서 직접 요청했다더라.”

북한 최고 음악 대학에서 강연할 수 있는 기회.

폐쇄적인 북한에서 이러한 제안을 보냈다는 것이 무척 의외였다.

강연은 나에게도 처음 들어오는 제안이기에.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감돌았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무언가 탐탁지 않은 듯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할 이유가 크게 없지 않겠냐?”

큰아버지는 스케줄이 과중하다는 생각이었다.

지금도 공연 준비로 많은 체력을 소모하고 있다고.

자칫 잘못한다면 컨디션을 망칠 수 있다는 조언을 건넸다.

나 또한 큰아버지의 생각에 일부 동의하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이번 기회가 좋은 기회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아무나 못 하는 경험이지 않아요?”

국내 최초. 아니, 어쩌면 국제적으로 최초일지도 모른다.

북한에서 외부 인사가 강연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을 테니까.

강연을 통해 직접적으로 음악에 대한 철학을 전달하고 음악에 대한 내 소명을 밝히는 것.

이 또한 위대한 피아니스트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 우선 보류하고, 차후에 공연이 끝나고 다시 상의해보도록 해요.”

이번에는 큰아버지도 긍정적인 의사를 전했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공연에서 연주를 펼치기 위해서니까.

보다 온전한 연주를 보이는 것이 급선무겠지.

고려한다면 공연을 마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을 거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나와 큰아버지의 대화를 듣던 몇몇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적인 사건인데요? 이런 경우는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찬희가 빙긋 웃으며 이야기했다.

폐쇄성이 짙은 북한에서 입을 열 수 있는 자리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신기하다며.

오히려 내가 부럽다는 말을 덧붙였다.

현춘 또한 그만큼 내 명성이 높은 것이라며 나를 치켜세웠다.

이윽고 들어온 비서실장, 진웅도 한 마디를 보탰다.

“대통령께서 이안씨가 동행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편하게 생각하시라더군요.”

정부 입장에서도 상당히 긍정적인 듯했다.

편하게 고려해도 된다고.

내가 원한다면 스케줄을 일부 조정해서 기회를 마련하겠다고 덧붙였다.

나 또한 기회가 나쁘진 않다 생각했기에.

본 공연을 끝내고 추가적으로 고려해볼 생각이었다.

이제 나를 비롯한 남측 예술단이 비행기를 나설 차례.

비행기에서 내리자 북측 담당자가 우리를 반겼다.

단정한 단발에 녹두색 군복을 입은 여인.

어깨 견장에 박힌 네 개의 별이 번쩍거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모란봉악단의 단장이자 이번 무대를 담당하게 된 현향란이라고 합니다.”

남측 예술단과 북측 예술단이 처음 마주하는 순간.

두 예술단은 서로 악수를 나누며 반가움을 표했다.

북한의 예술가들과 인사를 건네고, 마지막에는 향란과 악수를 청했다.

익히 들었던 북측 예술단 대표.

하지만, 성환이 ‘마녀’라고 표현하기엔 그녀의 미소는 무척 밝았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생긋 웃는 얼굴에서 향란의 기대감이 고스란히 보였다.

***

동평양대극장.

북한에서 가장 커다란 홀을 자랑하는 거대 공연장.

해외 예술가들이 공연을 하거나, 몇 번 있었던 남북협력 예술 공연 때 사용되던 공연장이었다.

홀을 시작으로 뻗어나가는 수많은 객석들.

오스트리아에서 독주회를 펼쳤던 오페라하우스를 필적하는 규모였다.

“우리 평양에서 제일 가는 극장입니다.”

향란은 간략하게 극장에 대한 소개를 덧붙였다.

최고 2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

현대적 건축물인데다 유수의 해외 예술가들도 이곳에서 공연을 하고 울림을 특히 칭찬했다고 표현했다.

그녀의 말은 리허설을 하며 체감할 수 있었다.

특히 북한 예술단이 펼치는 현악 4중주에서 극장의 시스템이 크게 돋보였다.

별도의 음향 장치를 활용하지 않았음에도 바이올린의 선율이 극장을 가득 메웠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박이안 피아니스트님. 준비해주시죠.”

앞선 출연진들의 리허설이 모두 종료되고 내 차례만 남은 상태.

향란의 지시에 무대 한편에서 피아노가 옮겨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가 모습을 드러내던 찰나.

무대 위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어어어어!!!”

우지끈!

무대 위 조명을 옮기던 인부가 실수로 조명을 떨어뜨린 것.

거대한 조명이 그랜드 피아노의 본체를 가격했다.

다행히 사람이 맞진 않았지만, 피아노 내부가 우려될 정도로 닫힌 뚜껑이 움푹 패어있었다.

갑작스런 사고에 사람들이 놀라 술렁이던 찰나.

군복을 입은 북한 남성이 와서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기야!”

인부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남성이 상황이 분하다는 듯 씩씩대며 계속해서 호통을 쳤다.

향란이 남성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서야 시끄럽던 상황이 겨우 진정됐다.

아무래도 향란이 남성보다 계급이 높은 것 같았다.

인부들이 떨어진 조명을 치우고 뚜껑을 열자 조율사가 재빠르게 피아노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깨진 나무 파편들이 피아노 내부에 들어간 상태.

내가 보기에도 조금 심각해 보이는 상태였다.

“사용 가능할까요?”

내 질문에 조율사는 안경을 고쳐 쓰고 피아노를 확인했다.

건반을 눌러도 보고, 본체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기도 하며 여러 가지 상태를 점검하는 조율사.

그러나 그의 미간이 좁아진 채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끝내 할 수 없다는 듯, 조율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좋은 피아노가 한순간에 가네…”

조율사는 피아노를 쓰다듬으면서 쓴 미소를 머금었다.

러시아 피아노 제작 명가에서 만든 피아노라고.

이안의 요청대로 깔끔한 음색이 매력인 피아노라 무척 품질이 우수하다고 덧붙였다.

이리도 무참히 깨진 것이 너무 아깝다며.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하는 듯 조율사는 내부를 살폈지만, 끝내 도리질을 했다.

“연주 자체는 되겠지만, 조율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는 내부 부품이 문제라고 설명했다.

피아노는 해머가 현을 치면서 울림을 전달하는 악기.

그 울림을 전달하는 현들이 조명에 의해 타격을 입으면서 탄력을 잃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조명이 떨어진 부분은 높은음을 담당하는 쪽.

아마 조율을 해도 탄력을 잃고 본래 소리로 풀려버리거나, 최악의 경우 조율하다가 줄이 끊어져 소리가 아예 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대로 사용하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는 상태.

상황이 조금 정리되자 향란이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새 피아노를 비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연신 사과를 이어가는 향란을 향해 나는 괜찮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리허설이 가능하겠냐는 내 질문에 그녀는 도리어 괜찮겠냐는 듯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조율사가 건반을 누르는 것을 통해 일부 음이 어긋난 것이 확인된 상태.

하지만, 1차 리허설을 이렇게 마무리 지을 순 없었다.

리허설은 연주뿐만 아니라 조명이나 효과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점검하는 것이기에.

완벽한 연주를 펼칠 순 없더라도 무대를 확인하는 것은 필수였다.

“우선 연주해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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