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92화 (92/250)

92화

내 손가락이 빠르게 피아노를 훑었다.

가장 낮은음부터 높은음까지.

건반을 누를 때마다 제각기 소리를 내뱉었다.

조율사의 말대로 중간부터 소리가 틀어지더니 오른쪽, 높은음에 도달하자 대부분의 소리가 흐릿하게 풀려버렸다.

“이안씨. 정말 괜찮겠습니까?”

현춘마저 나를 향해 난색을 표했다.

그 또한 대중음악의 거장이기에 피아노 선율이 틀어졌음을 느낀 것이겠지.

분명 연주를 펼치기엔 적합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네. 리허설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내뱉은 발언에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출연진 대부분이 음악을 잘 아는 수재들.

그들 모두 소리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커다란 소리에 몇몇은 아직도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런데도 연주를 강행하겠다고 해서일까.

출연진과 스태프들의 시선에 묘한 걱정이 묻어나왔다.

“현향란 단장님? 아까 그분은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아마 가장 놀라셨을 겁니다.”

향란은 내 요청에 사뭇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밝은 표정으로 응답했다.

그리하겠다고.

아량을 베풀어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향란이 리허설을 이어가겠다고 소리치자 현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발 빠르게 준비를 시작했다.

‘다행히 모든 건반이 틀어진 것은 아냐.’

건반들을 모두 확인해본 결과, 무너지지 않은 건반들도 꽤 있었다.

고음을 담당하는 현들이 상당수 파손되었을 뿐, 저음역대는 다행히 음색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저음에서 시작하는 <평안>을 고려한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중반부터 문제였다.

‘일부 고음들이 너무 망가졌어.’

이전 곡들이 그랬듯, <평안>도 음역대가 다양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밝은 선율을 펼칠 때 높은음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했다.

하지만, 일부 건반에서 나오는 소리는 밝기는커녕 도리어 칙칙한 음색을 토해냈다.

나는 그런 문제가 큰 건반들을 더욱 면밀하게 확인했다.

5분가량의 시간 동안 건반들을 살폈던 나는 그제야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는 사인을 보냈다.

내 사인을 받은 현춘이 고개를 끄덕이며 리허설을 진행하자 조명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망가진 피아노로 펼쳐야 하는 <평안>.

비상 상황에 머릿속으로 악보들이 빠르게 펼쳐진다.

재빠르게 연주가 불가능한 음표들을 삭제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음표들이 자리를 메운다.

지체할 시간이 없기에.

손가락이 건반을 타건하면서도, 머릿속 한편에서는 앞으로 연주할 악보들을 교체하는 작업이 펼쳐진다.

***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향란은 남몰래 씁쓸한 심정을 곱씹었다.

중요한 손님이 왔을 때 사고가 일어난 것은 물론, 부단장의 행패를 남측이 고스란히 보지 않았던가.

‘리금철. 저 작자가 결국!’

향란의 날카로운 눈빛이 금철에게 쏘아졌다.

모란봉악단 부단장, 리금철.

뛰어난 바이올린 실력으로 악단에 들어온 엘리트 중 하나였다.

하지만, 흠이 있다면 다소 모난 성격.

단장인 향란을 제외하고 모든 단원들의 계급은 같은 소위이건만.

그는 부단장이라는 지휘를 마구 휘두르는 악단 내 무법자였다.

상급자인 향란이 몇 번이고 주의를 줬음에도 그는 악단의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라며 괜한 기 싸움을 걸거나 인부들을 모질게 대하곤 했다.

적어도 손님이 왔을 때 저런 상식 이하의 짓을 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거늘.

향란은 당사자인 이안이 사고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보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역시 소리가 뒤틀렸어.’

무대 세팅을 위해 리허설을 강행하는 이안의 모습에 향란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유려하게 움직이는 손은 오랜 시간 피아노를 쳤던 향란이 보기에도 우아할 정도.

그 손에서 피어나오는 선율도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20대 청년이 만들었다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의 높은 완성도.

단단한 베이스를 기점으로 펼쳐진 소리가 극장을 메우고 있었다.

군데군데 타격을 입은 부분에서 흐릿한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향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것들이 아니면 소리가 훨씬 나을 텐데.

아쉬움을 표하던 찰나…

‘…뭐지? 왜 소리가….’

연주는 점차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다.

자욱하게 깔리던 낮은 선율에서 높고 활기찬 선율이 펼쳐졌다.

그러나 문득 향란은 어느 시점부터 문제가 되던 음색이 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안>의 악보를 봤던 향란이기에.

이안의 연주가 달라진 것은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변화를 알아챈 향란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설마 지금 임기응변으로 곡을 바꾸고 있는 거야?’

이안의 연주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암보를 해서 연주할 경우 그 곡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텐데.

이안은 그와 동시에 문제가 있는 건반을 피해 가며 연주를 이어가고 있었다.

상당수의 건반이 지뢰처럼 건드리면 삐끗하는 수준.

건반을 기억하는 것도 모자라 다른 대체음을 찾는 모습은 기인에 가까웠다.

‘미묘한 차이를 통제한다는 말이 이런 거였나?’

여러 평론가들이 설명하기를.

이안의 진가는 미묘한 차이를 움직이는 데서 나온다고 했다.

같은 음을 치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음색을 내뱉는 것.

지금도 짧은 시간에 잘못된 건반의 위치를 떠올리고, 어울리는 다른 건반을 찾아 누르고 있지 않은가.

엄청난 대처 능력에 향란은 그저 박수밖에 칠 수 없었다.

다들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이안의 연주가 끝나기 무섭게 주변에서 박수 세례가 터져 나왔다.

“정말, 말이 안 되는 수준이군요. 어떻게 하신 겁니까?”

“틀어진 건반을 피해서 연주했을 뿐입니다. 최대한 피한다고 했는데, 초반부에는 실수를 좀 했네요.”

여유롭게 말하는 이안의 모습에 향란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상상만 해도 어려운 작업인데, 이를 담담하게 털어놓는 경지라니.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안 선생님이 이렇게 좋은 곡조를 들려주셨으니. 저도 답례로 한 곡조 펼치고 싶습니다.”

향란의 말에 이안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향란은 조심스레 피아노에 앉아 손을 풀더니 곧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죽음>.

이안의 일곱 번째 자작곡이 향란의 손에서 피어난다.

기어가듯 낮은 선율의 시작.

한때 피아니스트였던 향란의 손이 건반을 어루만지자 짙은 음색의 소리가 퍼져나간다.

‘이안 선생님은 죽음의 강을 떠올리며 썼다지.’

앨범에 있던 설명을 읽은 향란은 머릿속으로 신화를 떠올렸다.

죽음의 강에서 노를 젓는 노인을 생각하며.

죽음이라는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묵직하게, 하지만 답답하지 않을 정도의 느린 선율로 연주를 이어간다.

이안의 교재를 본 향란이 매력을 느낀 곡.

이 연주는 자신이 이안을 무척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자, 이안이 이번 무대에 참여해줘서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부드럽게 연주를 끝낸 향란은 다시금 남몰래 경악을 터뜨렸다.

‘정말 어떻게 연주했는지 의문이야.’

<죽음>을 연주하는 동안 향란은 몇 번이고 흐려진 소리를 내었다.

파손된 피아노에서 나오는 소리.

하지만, 연주를 하면서 그 건반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한두 개의 건반이 문제라면 응당 기억할 수 있겠지만, 커다란 조명이 떨어진 만큼 망가진 부분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일일이 기억하고 곡의 방향을 바꿨다는 사실에.

이안의 향한 향란의 눈길이 더욱 진해졌다.

훈훈하게 분위기가 흘러가려던 찰나, 미꾸라지 하나가 또다시 물을 흐렸다.

“캬아! 정말 대단한 연주였습니다 단장님. 남조선 동무들. 영광으로 아시오! 우리 현단장님의 연주는…!”

향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금철의 과한 제스처에 남측 출연진들이 불편해하는 것이 여지없이 보였다.

근거리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탓에 몇몇 출연진들이 움찔거릴 정도.

소위라는 계급장의 무게는 어디 두고 저리 경박스런 모습을 보이는지.

향란의 미간이 매우 좁아졌다.

***

‘<죽음>을 선곡할 줄이야.’

향란이 한 곡조 펼치겠다는 말에 연주를 들어보자는 생각이었다.

북한의 클래식은 어떤 것이 있는지.

또 향란은 그것을 어떻게 펼칠지 바라보았던 것.

하지만, 향란이 내가 만든 교재에 수록된 <죽음>을 연주한 것은 예상 밖이었다.

게다가.

‘무척 열심히 연습했나 보네.’

향란의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가상의 오선지에 음표가 맺힌다.

중반 즈음 연주가 지속되었을 때, 나는 그녀가 교재의 세 난이도를 모두 연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게 악보를 편곡하는 것은 단순히 난이도를 낮추는 것이 아니었다.

초급에서 중급으로, 중급에서 고급으로 넘어갈 때 특이점을 하나씩 발견하고, 그것을 유려하게 넘길 수 있도록 하는 것.

난이도마다 셈여림표의 위치가 조금씩 다른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초급 난이도에서 진행하던 셈여림이 손에 익은 채 중급 난이도로 넘어가면 보다 풍부한 선율을 이어갈 수 있었다.

향란이 펼치는 연주에는 초급과 중급, 고급까지의 셈여림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올곧은 연주다.’

군복을 입은 채 연주를 이어가는 향란의 모습은 우아함 대신 격식이 느껴졌다.

<죽음>이라는 곡을 무척 경건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곧은 선율이 극장을 메웠다.

피아노가 파손되지만 않았더라면 더욱 매력적이리라.

향란이 연주를 끝마치자 나는 가장 먼저 박수를 쳤다.

“남조선 동무들. 영광으로 아시오!”

아까 인부를 몹시 꾸짖었던 사내가 큰 소리를 내며 출연진을 비집고 들어왔다.

향란의 대단함을 추앙하듯 표현하면서도 무척 으스대는 표정.

과하게 큰 목소리에 옆에 있던 출연진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한창 향란을 칭찬하던 사내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내게 다가왔다.

“우리 현 단장님이 박이안 선생님 곡도 연주해주셨는데, 선생님도 뭔가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찢어진 그의 눈에서 의도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까부터 일부러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위압감을 주려는 것일 테지.

그의 전략이 일부 먹힌 듯, 몇몇 출연자가 조금 움츠러든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목소리가 큰 사람일 뿐.

그것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내가 전혀 개의치 않자 사내는 조금 더 힘을 가하듯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우리 현단장님 연주가 너무 고와서 넋을 놓으셨습니까? 그 아름다움을 연주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작곡에 자신이 있으시다면 그 정도는 가능하시겠지요?”

기 싸움을 걸려는 금철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못할 것은 없었다.

올곧은 향란의 연주와 비슷한 악상을 떠올리면 되니까.

정석적인 화음의 전개를 펼치면 충분히 그녀의 연주를 표현할 수 있으리라.

한 번 더 연주를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니까.

나는 다시금 피아노로 다가갔다.

“리금철 동무.”

피아노 앞에 앉아있던 향란이 입을 열자 무척 낮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차디찬 어투에 사내마저 움찔거릴 정도.

사내가 조용해지자 향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밝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내게 다가왔다.

“피아노가 망가져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보다 완벽한 연주는 다음 리허설 때 새 피아노로 보여주시라요.”

서글한 어투로 이야기한 향란은 내 손을 한 번 꼭 잡더니 이내 사내에게 향했다.

사내에게 향하는 발걸음이 묵직하면서도 절도 있었다.

“차렷.”

옷깃이 세차게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금철이라는 사내가 굳은 얼굴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남북 출연진 모두가 숨죽이고 향란의 행동을 보고 있었다.

“박이안 선생님은 우리 북조선에 온 귀한 손님입니다. 어디 되도 않는 기 싸움으로 선생님께 장난질을 치려 듭니까?”

목소리가 크지 않음에도 느껴지는 위압감.

나는 문득 성환이 향란을 뭐라 표현했는지 떠올랐다.

얼음 마녀.

그녀의 본모습은 장내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카리스마 넘치는 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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