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네덜란드 같이 가실래요?”
아들의 제안은 무척 달콤했다.
은희 또한 리스트 콩쿨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콩쿨을 보러 가는 것만으로도 음악적 영감을 받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한국에서 응원하고 있을게.”
은희는 아쉬운 기색을 최대한 숨긴 채 거절해야 했다.
이안에게 투자를 받은 이후 더욱 사업을 빠르게 진행한 탓에 쉴 틈이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사무실 계약을 하는 날이라 더욱 바빴다.
아직은 대표실도 별도로 마련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사무실.
하지만, 은희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마구 뛰었다.
‘덕분에 빨리 진행할 수 있었지.’
은희도 자산이 없진 않았건만, 대부분 부동산과 주식과 같은 동결 자산인 탓에 운용할 수 있는 금액이 적었다.
그 탓에 준비 중이던 사업도 조금씩 미루던 상태.
이안이 수익 대부분을 투자한 덕에 모든 일에 속도가 붙었다.
작업실 기기를 들이고, 사무실을 꾸밀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안의 덕.
이에 보답하는 의미로 은희는 대부분의 지분을 이안의 이름으로 내어주었다.
‘본격적으로 미팅 일정을 잡아야겠어.’
장비를 모두 갖췄으니 이제 인재만 영입하면 되는 상태였다.
관건은 어떤 사람을 찾아서 채용할 것인가.
은희의 머릿속엔 수많은 가능성이 떠올랐다.
기존의 음원사처럼 음원을 만들되, 유명 음악가를 섭외하는 것에 그치지 않도록.
전속 음악가로 채용하여 오리지널 음악을 만들 생각도 하고 있었다.
‘클래식? 아님 창작곡? 어떤 장르가 가장 선행되어야 할까?’
은희는 가장 먼저 OST에 집중할 계획이었다.
곡을 만들어내는데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클래식, 재즈, 대중음악, 등 다양한 장르로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게다가 잘 만든 OST가 영화나 드라마에 사용되면 곧바로 고정 수입으로 이어질 터.
그러니 이제는 어떤 사람들과, 어떤 OST를 만들지 떠올려야 한다.
은희는 미리 정리해둔 섭외 리스트를 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
튤립의 고장,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차로 약 40분을 나아가면 거대한 강을 끼고 있는 도시가 나온다.
위트레흐트.
레크강이 일품인 곳이자, 이번 리스트 콩쿨이 펼쳐지는 곳.
월드 피아노 콩쿨때와 마찬가지로 예비 소집과 인터뷰를 위해 먼저 네덜란드를 찾았다.
리스트 콩쿨이 벌어지는 콘서트홀, 티볼리브레덴뷔르흐.
그중 실내악에 맞춰 만들어진 헤르츠 콘서트홀에는 붉은 기가 도는 흑갈색 무대가 돋보였다.
무대의 중심에는 콩쿨 때 사용할 피아노가 놓여있었다.
이윽고 예정된 시간이 되자 진행자로 보이는 사람이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참여자들께서 모두 오신 것 같으니 설명회 및 확인 절차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행자가 손에 든 리모콘을 건드리자 무대에 드리워진 스크린에 명단이 떠올랐다.
총 14명의 참가자가 선택한 곡들과 순서가 마련되어 있는 리스트.
리스트의 공개에 순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일부는 탄식을, 일부는 경악을 터뜨리며.
나는 차근히 순번과 다른 이들의 선곡을 바라보았다.
‘파가니니를 고른 사람이 몇 안 되네.’
일부 예상한 바였다.
파가니니의 곡은 높은 기교를 보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난이도가 무척 어려워서 전공자도 꺼리는 곡들.
아무리 유수의 피아니스트들이 온다 하더라도 장시간 파가니니의 연주를 펼치는 것은 무리일 테지.
그 때문에 파가니니 키워드를 선택한 사람은 나를 포함하여 세 명밖에 되지 않았다.
아마 나처럼 파가니니의 곡을 펼치는 데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법한 선택을 하여 추가 점수를 노리는 것이겠지.
그러나 단 3명밖에 선택하지 않을 정도라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이러면 비교 대상이 너무 줄어들어서 문제인데.’
본디 음악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라 캄파넬라>는 유명한 곡인 만큼, 콩쿨 내에서 비교 대상이 적다면 심사위원들의 머릿속에 가장 잘 친 연주를 떠올릴 것이다.
이미 숱한 거장들도 연주한 곡일 테니, 그 이상을 보이지 않는다면 도리어 점수를 깎을 수 있는 상황.
그렇다면 비교적 개인의 차별성이 돋보이는 곡들이 강세를 띠리라.
전략을 조금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박이안 피아니스트님 맞죠?”
갈색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사내 하나가 나에게 아는 체를 했다.
능숙하게 맞다고 대답하자 그는 피부만큼 하얀 치열을 뽐내며 반갑다는 인사를 전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콜린이라고 합니다.”
콜린 반 다이크.
그는 자신도 이번 콩쿨의 참여자라고 덧붙였다.
나의 명성을 익히 들었다고, 내가 만든 교재는 물론 음원까지 많이 들었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순번 리스트를 바라보던 콜린은 아쉽다며 울상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파가니니의 곡들을 선택하셨군요. 같은 곡으로 맞붙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조금 아쉽습니다.”
그래도 같은 현장에서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장난스레 입담을 내놓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느껴졌다.
그동안 고전의 클래식을 펼친 나였기에 단연 거장 키워드를 선택할 줄 알았다고.
예상이 빗나가서 아쉽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본선 진출자들은 순번에 맞춰서 필요 서류에 서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진행자들의 말에 하나둘씩 무대 위로 올라가 서명을 이어갔다.
서명을 함과 동시에 무대에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
사전 모임을 가지는 가장 큰 이유였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어 올라갔을 때, 나는 서류에 서명을 함과 동시에 문의 사항을 덧붙였다.
“혹시 이 피아노가 콩쿨에 그대로 사용될 예정인가요?”
“물론입니다. 조율도 마친 상태이니 테스트가 필요하다면 연주해보세요.”
진행자의 친절한 언행에 나는 목례를 하고 피아노로 다가갔다.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그랜드피아노.
피아노로 다가가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마치 기대라도 하듯 시선들이 꽂히는 것이 뒤통수에 느껴졌다.
의자에 앉은 나는 <라 캄파넬라>의 일부를 잠깐 연주했다.
단 몇 초의 연주였음에도 사람들은 박수로 내 연주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밝은 표정을 지은 다른 참가자와 달리,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조율 차이가 너무 심한데.’
내 피아노는 고전 시기에 맞춰 음색이 낮게 조율되어 있다.
그 때문에 <라 캄파넬라>를 비롯한 리스트의 곡들이 가지는 웅장한 선율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콩쿨장에 설치된 피아노의 조율은 극히 일반적이었다.
공정함을 지키기 위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일률적인 조율을 해둔 듯했다.
파가니니/리스트의 곡을 연주하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음색.
이 피아노로는 내가 원하는 소리를 낼 수 없다.
‘조율을 부탁할 수 없는 노릇이고.’
조율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기에.
공정성을 감안한다면 내가 조율을 요청하는 것은 특혜를 달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리라.
콩쿨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법.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도박 수처럼 보일 법한 행동.
‘경연곡을 바꿔야겠어.’
***
“콜린씨. 그동안 이비 선생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리스트 콩쿨을 지원하지 않으셨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참여하신 이유가 있나요?”
“한국의 박이안 피아니스트님이 참여자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연습실 한편에 놓여있던 TV에서 이번 리스트 콩쿨 참여자 인터뷰가 나오고 있었다.
지금 나오고 있는 사람은 내게 아는 체를 건넸던 콜린이었다.
나와 경쟁을 해보고 싶었다고.
자신의 스승이 심사위원 자리를 건넬 만큼 대단한 인물이기에 더욱 기대를 안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내게 곧바로 아는 체를 하길래 그저 붙임성 좋은 청년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네덜란드에서도 꽤 큰 명망를 가진 피아니스트였다.
콜린 반 다이크.
그는 리스트의 현신이라는 이명(異名)을 가진 천재 피아니스트였다.
네덜란드 콘체르테 오케스트라의 최연소 피아니스트로 선 것을 포함하여 국제적으로 유명한 콩쿨에서 상을 휩쓴 존재.
게다가 나와 더불어 이번 리스트 콩쿨의 심사위원 초청을 받을 정도로 실력자였다.
나와 경쟁하기 위해 자신의 심사위원 자리도 반납했다는 말에 그가 얼마나 피아노에 진심인지 알 수 있었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군요. 그렇다면 혹시 한국의 박이안 피아니스트가 어제 갑작스레 곡을 바꿨다는 소식은 알고 계신가요?”
“네?! 그게 가능한 겁니까?!”
진심으로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뜬 콜린에게 리포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차례에 내가 얘기해준 정보라 확실할 것이라고.
규정상 문제는 없었고, 협회 측에서도 요청을 받아들여 본선 무대에서 ‘거장’의 테마를 연주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허어…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단하네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콜린은 패닉에 빠진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의 입에서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말이 연신 터져나왔다.
하루아침에 곡을 바꿀 정도라면 대단한 자신감이 있는 것이라고.
사전 모임에서 잠깐 펼쳤던 <라 캄파넬라>의 표현도 무시하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거장의 선율은 어떻게 만들어낼지 궁금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필요한 일이었지.’
내가 원하는 선율을 나타내지 못하는 일.
아마 심사위원 정도 레벨이라면 조율이 다른 피아노에서 펼쳐나오는 괴리감을 분명 알아챌 것이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의 반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안하리만도 못할 테지.
내가 가진 힘의 반절밖에 사용할 수 없다면 굳이 경쟁을 하지 않아도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리라.
주최 측에서도 내 요청을 받아들이며 본선 당일이 아닌 이상 자유롭게 바꾸어도 된다고 덧붙였다.
“우리 리스트 콩쿨은 참가자의 안위를 최선으로 생각합니다. 박이안 피아니스트님이 그리 생각하신다면 바꾸도록 하시죠.”
주최 측에서는 도리어 흥미롭다는 편이었다.
조율의 차이로 인해 곡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며.
다음 콩쿨에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반영하겠다고 덧붙였다.
도리어 그들은 콜린처럼 묘한 우려감을 표할 뿐이었다.
‘본선 무대까지 단 며칠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단 3일.
본선 무대를 앞둔 내게 주어진 시간이었다.
높은 난이도를 자랑하는 리스트의 곡을 그 시간 동안 마스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
하지만, 내게는 믿는 구석이 있다.
첫째.
이미 악보를 바라본 내 머릿속에는 키워드 ‘거장’에 수록된 세 곡의 악보가 저장되어 있다는 점.
둘째.
베토벤, 슈베르트, 바흐 모두 전생의 기억 속에 아주 생생하게 담긴 사람이라는 점.
마지막 셋째.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눈앞에 현현하고, 내 손이 자연스레 건반을 훑고 있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