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99화 (99/250)

99화

헤르츠 콘서트홀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꽂힌다.

이내 복도를 따라 내려가자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영어, 독일어, 일본어 등 수많은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들.

아마도 곡을 바꾼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내 얘기를 하는 것이겠지.

객석 한편에 앉자 콜린은 기다렸다는 듯 곁에 다가와 눈을 반짝였다.

“상상도 못 했습니다. 본선 무대를 3일 앞두고 곡을 바꾸실 줄은.”

자신에게는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파가니니의 곡들을 듣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바꾼 곡들도 명곡들이니 기대가 넘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콜린은 잠깐 망설이더니 모두가 하고 싶을 법한 질문을 건넸다.

“곡을 바꾼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피아노가 파가니니의 곡을 연주하기엔 음색이 부족하다 생각했습니다.”

나는 턱짓으로 무대 한가운데 있던 피아노를 가리켰다.

파가니니의 선율은 무척 낮은 데서 오며, 그 웅장한 기색이 빗발치는 음표 세례를 시끄러운 소음이 아닌 음악으로 느끼게 해준다고.

하지만, 콩쿨장에 설치된 피아노는 내가 원하는 만큼 낮은 것도, 그렇다고 밝은 저음을 내비치는 높은 음색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고.

그렇기에 저 피아노로 연주하는 파가니니는 반쪽에 불과하다는 평을 내비쳤다.

콜린은 무척 심각한 표정으로 듣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조율의 특색으로 선율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의 느낌은 저도 생각하지 못했군요.”

콜린은 자신도 만약 같은 생각이 들었다면 나와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다만, 자신은 나처럼 3일 만에 곡을 완성시킬 수 없어 기권했을 것이라며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본래 콩쿨이라 함은 한 달 전부터 콩쿨곡만 연습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콜린도 본선 때 선보일 최고의 무대를 위해 한 달 동안 거장의 음악만 연습했다고.

리스트의 편곡은 빠른 속도와 우월한 기교 탓에 한 곡을 완성시키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두 키워드의 곡을 모두 완성 수준으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이냐며.

파가니니 키워드의 곡들은 물론, 거장 키워드의 곡도 완성 수준으로 연습하였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곡으로 연주하실 수 있다면… 나머지 곡들도 다 연습하신 겁니까?”

<운명>과 <마왕>, 거기에 바흐의 <푸가와 환상곡>까지.

워낙 명곡인지라 연습을 하며 몇 번 쳐본 곡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고작 그 몇 번의 경험으로 가지고 3일 만에 완숙된 연주를 보이기엔 역부족인 곡들이었다.

만약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음악을 듣고, 악보를 보면 뇌리에 각인되는 신비한 능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전생의 기억 속에서 거장들이 튀어나와 내 머릿속에 악보를 채워주듯.

곡들을 찬찬히 살피는 동안 전생의 기억들이 물씬 흘러들어왔다.

다행히 리스트의 편곡을 거치며 곡의 묘사는 조금씩 달라졌지만, 기본적인 선율은 같았기에.

3일 만에 곡들을 완성의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전생의 기억에는 그들의 이야기가 가장 잘 담겨 있으니까.’

전생의 기억 속에는 세 곡이 모두 들어 있었다.

전생이 살았던 때에는 이미 교과서로 통하던 바흐였기에, 바흐의 <푸가와 환상곡>은 간결하면서도 연습곡으로 자주 사용되어 전생이 손에 익도록 쳤던 곡이었다.

슈베르트와 베토벤은 오죽한가.

전생은 베일 너머 슈베르트에게 곡에 대한 생각을 전할 뿐더러, <세레나데>의 특이점을 알고 있을 만큼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베토벤의 <합창>에 대한 피드백을 달거나, 이번에 새롭게 재탄생시킨 <조우> 완성할 정도로 전생은 베토벤을 잘 기억하고 있지 않던가.

‘리스트는 기교와 풍미를 더할 뿐, 곡에 담긴 이야기를 해치진 않았으니까.’

전생의 기억 속에 고전의 거장들이 담겨 있다면, 리스트를 이해하는 데는 내 역량이 컸다.

프란츠 리스트는 전생이 죽고 한참 뒤에 태어나고, 유명해진 음악가니까.

전생의 기억 속에는 리스트의 사조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겐 그동안 피아노 연습을 위해 익힌 리스트의 사조뿐만 아니라, 전생에겐 없는 낭만파 시기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

내가 한 것은 전생의 기억에 힘입어 곡을 완성하되, 현재의 사조를 덧입혀 리스트의 곡에 더욱 가깝게 표현하는 것.

3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연주를 완성의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눈을 감으면 가상의 오선지가 펼쳐진다고 할 순 없으니…

“그냥, 리스트 선생님의 음악을 좋아해서요.”

돌려 말했음에도 콜린은 잘 알겠다는 듯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콜린은 자신도 그렇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빠른 선율을 펼치는 것이 때론 스트레스를 푸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고, 게다가 손가락을 푸는데 리스트의 곡이 제격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 곡들을 3일 만에 마스터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며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연습량이 대단하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일전에 인터뷰에서 하루에 얼마나 연습하냐는 말에 대답한 적이 있다.

연습을 이어갈 땐 밤을 새우는 것이 기본이라고.

시간을 인식하지 않고 계속해서 연주를 펼치면 어느덧 새벽이고, 해가 뜨고 있다는 말에 입을 떡 벌린 리포터들이 한 둘이 아니었지.

콜린은 리포터들처럼 그 사실을 알고 입을 떡 벌렸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저는 오히려 좋은 것 같습니다. 이젠 같은 곡을 연주하게 되었으니까요.”

더욱 직접적인 경쟁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심사위원 자리를 내려놓고 올 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고 평했다.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는 기대감을 내비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 또한 본래 우승을 목표로 두되, 다른 천재의 연주로 무언가 얻을 수 있다면 좋은 경험이 되리라.

이내 조명들이 하나둘씩 꺼지더니 본선이 시작되었다.

유수한 실력자들이 참가한 리스트 콩쿨.

단연 돋보이는 것은 콜린이었다.

‘왜 리스트의 현신이라고 불렸는지 알 것 같네.’

열성적인 연주에 그의 몸에서 풍기는 열기가 객석에 있는 나에게도 닿는 것 같았다.

손이 빠른 것은 기본.

손가락 마디에 힘을 달리 주는 듯, 빠르게 펼쳐지는 슈베르트의 <마왕>에도 콜린의 연주는 흔들리지 않았다.

마왕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아들을 껴안은 채 말을 탄 남성의 이야기.

말발굽을 나타내기 위한 선율이 끊임없이 펼쳐지며 더욱 공포스런 난이도를 자랑하는 곡이었다.

박진감을 온몸으로 느끼듯, 그 또한 눈을 얇게 뜨며 인상을 찌푸렸다.

‘연주를 굉장히 유연하게 할 줄 아는 사람.’

콜린에 대한 내 생각이었다.

리스트의 곡은 속도뿐만 아니라 압도적인 음색으로 흔히 곡이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묵직한 선율을 반복하니 생기는 부분.

그러나, 콜린의 몸을 보면 그러한 긴장 어린 느낌은 느껴지지 않는다.

도리어 당연하다는 듯 쾌속의 연주를 펼치는 콜린이기에.

<마왕>에 이어 펼쳐지는 <운명>과 <푸가와 환상곡> 또한 무척 유려하게 펼쳐진다.

앞선 참가자에 비해 압도적인 실력.

콜린이 마무리를 하며 고개를 높게 치켜올리자 땀이 이슬처럼 맺혀 땅으로 떨어졌다.

이어지는 박수에 나 또한 박수를 보냈다.

“한국의 박이안 피아니스트, 무대로 올라와 주세요.”

자리로 돌아오던 콜린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하얀 옷깃이 투명해질 정도로 땀범벅이던 그가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옅은 응원이 담긴 손길.

나 또한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수고했다는 뜻을 전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채 주변을 둘러보자 마치 나밖에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오롯이 피아노와 나만을 내리쬐는 스포트라이트.

연주에 앞서 눈을 살짝 감자 3일 동안 고뇌했던 곡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그것을 연주로 옮기기 위해.

시작부터 빠르고 무거운 손길이 건반을 후려친다.

***

‘리스트가 연주한다면 이 느낌이겠지.’

이비는 콜린을 처음 만난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처음 오르는 콩쿨 무대라면서 리스트의 곡을 선곡하는 모습에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

피아노가 어려워진 이유가 리스트의 존재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리스트의 곡은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그동안 리스트의 곡을 정확하게 재현해내는 사람은 없었기에, 이비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비의 생각과 달리, 그날을 기점으로 콜린은 리스트의 현신이라는 이명을 얻게 되었다.

빠르게 전개되는 리스트의 선율을 재현해내는 것은 기본.

리스트의 곡을 마치 자신의 곡인 양 펼치는 모습에 네덜란드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콜린을 제자로 받아들인 건 내 생에 가장 잘한 일이었지.’

이비가 정식으로 콜린을 제자를 받아들이고 나서 그의 재능은 더욱 빛났다.

이비의 가르침 아래에 리스트에 대한 공부를 이어간 덕일까.

콜린은 한 해를 보낼수록 더욱 풍부한 선율로 리스트의 곡을 재현해냈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넘어 더 높은 목표로 달려가는 천재.

이보다 더한 사람이 있을까 했건만.

한국의 신인 피아니스트는 이비의 예상을 뒤엎을 정도였다.

‘3일 만에 곡을 체득했다고?’

본선 무대를 3일 앞두고 갑작스레 곡 변경 요청을 하지 않았던가.

1개의 곡도 아닌, 3개의 곡을 펼쳐야 하는 콩쿨에서 곡을 바꾸겠다는 것은 무리수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천재라고 칭송받는 이비의 제자라도 할 수 없는 일이리라.

그러나 이비의 눈앞에서 연주를 이어가는 이안은 그 불가능한 일을 실제로 펼치고 있었다.

본래 선정 곡을 치는 것처럼.

이안의 표정은 여유롭기까지 하다.

‘마치 이야기꾼 같군.’

시작은 앞선 사람들과 같이 <마왕>이었다.

말 편차 소리를 연상케 하는 숨 막히는 시작이 일품인 곡.

하지만, 그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엄지와 소지를 극한으로 펼쳐 연주를 이어가야 하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곡이었다.

그에 반해 왼손은 오른손과 달리 연한 기류로 연주해야 한다.

마치 오른손은 쉴 새 없이 달리는 말을 표현하듯, 왼손은 말에 탄 아이와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듯 곡이 흘러간다.

‘악보를 그린다는 표현이 거짓이 아니었어.’

이비는 한 비평가가 이안의 독주회를 보고 했던 말이 떠올렸다.

이안의 자작곡들은 오선지에 음표를 끼워 넣는 것이 아닌, 빈 종이에 오선지부터 채워 넣는 것처럼 기본과 특색이 적절히 버무려진 결과물이라고.

그 음색이 고스란히 연주에 반영된다고 극찬을 하지 않았던가.

지금 이비의 눈앞에서 연주를 펼치는 이안이 그랬다.

바흐의 <푸가와 환상곡>은 도화지에 선을 그리듯 유려하게 뻗어나가고, 베토벤의 <운명>은 뭉크의 그림, 절규를 마주한 것 같은 처절함이 느껴진다.

‘녀석이 심사위원 자리를 반납하고 내려갈 만하네.’

연주를 듣는 이비의 손에 주먹이 쥐어졌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연주를 하는 것보다는 인재를 발굴해내고, 젊은 연주가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일만 하고 있건만.

젊었을 때로 돌아가 함께 경연을 펼치고 싶다는 마음에 노파의 가슴이 소녀처럼 두근거렸다.

‘결선이 아주 즐거워지겠어.’

이비의 입가에 기대감이 걸렸다.

리스트 콩쿨은 본선과 결선의 점수를 합산하여 우승자를 가린다.

탈락자를 가려내는 대회가 아닌, 참가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을 고르는 시스템.

본선에서 펼친 독주가 개인의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면, 결선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연주의 유연성을 평가하는 자리였다.

단순히 연주를 잘한다고 해서,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누구보다 피아노를 잘 이해하고, 그 음색을 여타 악기의 선율과 어우러지게 펼칠 수 있는지에 대한 평가.

결선은 그러한 재능을 판별하는 무대였다.

‘피아노의 조율 차이 때문에 곡을 바꿀 정도의 실력자라면…’

잠깐 피아노를 친 것만으로도 곡 전체의 흐름을 예측하고,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을 내리지 않았던가.

지금껏 그러한 행보를 보인 참가자는 없었기에.

이안의 협주가 더욱 기대되는 대목이었다.

게다가 빈 필의 삼고초려에도 피아니스트 자리를 거절한 것으로 유명한 이안이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이룬다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안의 연주를 바라보던 이비는 그저 결선 날이 빨리 오길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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