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00화 (100/250)

100화

피아노 연습실에는 오랜만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곡을 선정하는 것에서부터, 곡에 대한 피드백까지.

큰아버지의 눈빛이 그 어떤 때보다 날카로워졌다.

“사실상 결선에서 갈피가 잡힐 게다.”

이번에 참여한 리스트 콩쿨은 본선에서 탈락자가 발생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본선과 결선의 무대를 본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매기고, 그 합산 점수로 우승자를 뽑는다.

본선 무대를 참관했던 큰아버지는 심사위원들이 나와 콜린에게 동일한 점수를 줬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 정도의 무대였다며 큰아버지는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 결선곡은 뭐로 할 거냐.”

리스트 협주곡 1번, 2번.

리스트가 생전에 만든 두 개의 협주곡이 이번 결선의 선택지였다.

큰아버지는 2번 협주곡을 추천했다.

2번이 지금껏 내가 연주했던 4악장의 선율과 비슷할 것이라고.

표현력이 강점이 나이기에, 보다 발전된 2번 협주곡이 더 알맞을 것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경쟁력은 1번이 좀 더 우세하지 않을까요?”

큰아버지가 얘기했듯, 2번 협주곡이 1번보다 발전된 양상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1번 협주곡은 2번과 악장 사이 쉬는 구간이 없어 온전히 20분간 연주를 펼쳐야 했다.

높은 난이도에 더불어 연주를 유지하기 위해선 체력 관리도 필수적인 곡.

하지만, 그 특이점을 잘 살려 연주를 펼친다면 평가에서 더욱 높은 점수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듣던 큰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표를 던졌다.

이제 남은 것은 리허설까지 연습을 하는 것이다.

큰아버지에게 피드백을 요청하자 그는 툴툴거리듯 말을 이었다.

“혼자서도 잘했으면서 뭘 그러냐.”

큰아버지는 말로는 툴툴거렸지만, 정작 연습이 시작되자 열성적인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번 결선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인 만큼, 독자적인 연주만으로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오케스트라의 선율과 얼마나 잘 일치되는지.

독단적이지 않고 유려한 연주를 어떻게 이어가는지 보는 것이 결선의 관건이다.

그러한 것을 체크하기에 큰아버지만 한 사람이 없었다.

“오케스트라에 대해서는 큰아버지가 더 잘 아시잖아요?”

오랫동안 오케스트라를 이끌어온 장본인 아니던가.

국내는 물론, 국제무대에서도 유수한 성적을 이뤘던 대한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

오케스트라의 수많은 악기들을 효율적으로 연상하기엔 큰아버지만 한 사람이 없었다.

실제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리허설 전, 큰아버지의 피드백을 통해 특이점을 미리 파악할 수 있겠지.

큰아버지와 함께라면 더욱 올곧은 연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후회하지 말거라.”

큰아버지가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무섭도록 짙고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큰아버지의 기대감이 엿보였다.

오랜만에 음악적 기량을 맘껏 펼칠 수 있다는 것에 신이 난 듯.

염라가 강림한 큰아버지의 짙은 눈썹이 활기차게 꿈틀거렸다.

***

티볼리브레덴뷔르흐 그레이트 홀.

같은 건물에 속한 헤르츠 콘서트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는 곡.

소규모 연주를 위한 헤르츠 홀과 달리 그레이트 홀은 교향악단을 위한 무대였다.

몇 배나 넓어진 무대는 물론, 부채꼴 형식을 가진 여타 공연장과 달리 이곳은 4면에서 연주를 감상할 수 있도록 객석이 비치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퍼지는 연주를 모두가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무대.

이번 결선이 펼쳐지는 장소였다.

참가자들에게는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수 있는 기회가 딱 2번 주어진다.

한 번은 결선 무대에서, 다른 하나는 리허설을 위한 무대에서였다.

참가자들은 각각 협연곡을 선정해 혼자 연습한 뒤, 리허설을 통해 최종으로 자신의 연주를 갈무리하고 결선 무대에 오른다.

결선 무대를 위해 주어지는 처음이자 마지막 리허설.

심사의 공정성을 위해 모든 참가자들이 동일한 오케스트라와 연주를 하기에, 각자 배정된 연습 일정이 있었다.

한 곡에 20분이나 되는 협주곡을 연주하다 보니 모든 참가자의 리허설이 끝나라면 수일이 걸렸다.

내 차례는 내일.

하지만 리허설의 향방을 살피기 위해 그레이트 홀을 찾았다.

오늘 자 리허설이 펼쳐지는 가운데, 무대에 올라가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콜린이었다.

‘한 번 합을 맞춘 솜씨가 아닌데?’

분명 결선을 앞두고 단 한 번 주어지는 기회였을 텐데.

오케스트라와 콜린의 합작은 수년간 함께 호흡을 맞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은은한 오보에의 독주로 시작하는 도입.

오보에의 소리가 끝나자 플루트와 같은 다른 관악의 선율과 함께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더해진다.

하지만, 이내 잔잔한 선율에 여러 개의 음표가 더해지고, 2악장으로 넘어가며 선율은 화려해진다.

서로가 언제 들어오고, 언제 나올지 이미 다 안다는 듯.

오케스트라와 콜린의 협주는 완벽에 가까웠다.

협주가 끝나자 지휘자가 콜린을 향해 몇 가지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 보였다.

‘말 그대로 리허설이네.’

리허설, 실제처럼 하는 연습.

연주를 끝낸 콜린에게 지휘자가 뭐라 하긴 했지만, 조언은 아닌 것 같았다.

간결한 어조로 보아 수고했다는 말 정도 되는 모양.

아마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평가를 하진 않는 듯했다.

단 한 번의 기회로 곡이 오케스트라와 얼마나 녹아드는지 확인하는 과정.

그 기회를 어떻게 휘어잡는지가 이번 리허설의 관건이었다.

리허설의 방향을 생각하고 있던 찰나, 복도로 올라오던 콜린이 나를 발견하고 의문을 던졌다.

“이안씨는 내일 연습이시지 않습니까?”

리허설이 어떻게 이뤄지는 보러 왔다고.

연주를 들어보니 한두 번 합을 맞춘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말에 콜린은 너스레를 떨었다.

자신이 오랫동안 몸담은 오케스트라라고.

자신을 가르쳐준 스승님도 있는 오케스트라라며 설명을 더했다.

오랫동안 함께 했으니 협주가 자연스러운 것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오케스트라가 클래식의 정수라고 생각합니다.”

콜린의 시선이 오케스트라에 꽂혀있었다.

처음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협주를 펼쳤을 때를 잊지 못한다고.

독자적인 선율을 가진 피아노조차 아우르는 묘미를 일찍부터 깨달았다고 했다.

“제가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콜린이 자신감 어린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신과 뜻이 맞는 여러 음악가들과 악단을 꾸렸다고.

‘일루시아 오케스트라’.

보다 많은 사람들에 환상적인 선율을 펼치겠다는 다짐을 담은 이름이라며 소개했다.

“개인의 역량으로는 불가능한 일도 꽤 많더군요.”

콜린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오케스트라를 만든 계기를 설명했다.

일찍부터 리스트의 사조를 답습하던 콜린은 어느 순간 무언가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리스트의 현신이라는 명성으로 독주회, 연주회에 참가하고, 자작곡을 몇 번 알려봤지만,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고.

자신의 발상과 사조를 펼치는 것이 혼자서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조직을 구성하여 리스트의 초절기교를 뛰어넘는 사조와 발상을 펼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음악을 즐기는 것을 넘어 자신의 사조를 창조해내려는 모습에서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저보다 훨씬 많은 곡을 만드셨으니 잘 아시지 않습니까?”

콜린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오케스트라의 위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큰아버지에 대한 오케스트라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통해 단체가 가진 파급력과 위력을 바로 옆에서 보지 않았던가.

다만, 내가 빈 필의 제안을 거절하면서까지 피아니스트로 남아있었던 이유는 연주를 선보이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였다.

‘하지만 이젠 그 수준을 넘었으니까.’

빈 필의 자리를 거절한 것은 오케스트라의 그림자에서 연주 실력을 갈고닦는 것보다 나 스스로 연주를 펼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이미 내가 만든 자작곡으로 세상 사람에게 내 곡을 펼치지 않았던가.

게다가 자작곡이 쌓여가며 나만의 사조도 점차 갈피가 잡혔고, 이를 통해 선보이고 싶은 이야기들이 생겼다.

이전 거장들이 각자의 사조를 남겼듯.

나 또한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선 내가 가진 사조를 보다 직접적으로 펼쳐야 하리라.

최근 오케스트라에 관심이 간다는 말에 콜린은 밝은 기색을 내비쳤다.

“관심 있으시면 저희가 이번에 준비하고 있는 경연에 동행하시겠습니까?”

콜린이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이야기를 꺼냈다.

로마에서 열리는 오케스트라 경연이 있다고.

일루시아 오케스트라가 첫 출사표를 던지는 곳이라고 했다.

나 또한 대회에 대한 정보를 얼핏 알고 있었다.

‘큰아버지도 몇 번 나간 적이 있댔지.’

바티칸 성당에서 주최한 오케스트라 경연 대회.

가톨릭의 역사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사가 깊은 경연이었다.

과거 성가대를 뽑기 위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은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가 서로의 곡을 펼치는 대형 경연전으로 성장한 대회.

오케스트라계에서 권위 높은 대회로 손꼽히곤 했다.

“저희 데뷔 무대를 봐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처음엔 내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권유하던 콜린은 이내 자신의 진심을 내비쳤다.

자신이 만든 오케스트라를 직접 봐줬으면 좋겠다고.

콜린의 눈에서 오케스트라에 대한 열정과 내 대답을 기다리는 기대감이 동시에 어렸다.

***

새벽 4시 반.

아직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남자는 일어나서 이불을 정리한다.

이불을 정리한 후 그는 곧바로 묵주를 손에 두른 채 기도를 올린다.

하루에 감사하고, 오늘도 신을 위해 하루를 살아가겠다고.

기도를 마친 남자는 백색 의복에 하얀 주게토를 쓰고 교황청으로 향한다.

남자가 지나갈 때마다 인사를 건넸고, 남자는 이에 화답하여 부드러운 미소를 보인다.

“때로 무관심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이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관심을 가져야…”

남자의 미사 강론에 사람들은 초롱한 눈을 한 채 남자를 바라본다.

약 1시간여 시간 동안 남자의 말이 끝나면 그제야 남자의 업무 시간이 시작된다.

“교황님. 오늘 일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스미스 교황.

5년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사람.

그는 1,282년 만에 선출된 비유럽 출신 교황이자, 가톨릭 교회 역사상 첫 미주 출신의 교황이었다.

교황은 보좌관을 통해 하루의 일과를 전해 듣고 차근히 업무를 시작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최근 성공적으로 끝마친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축하문을 쓰는 것이었다.

‘아주 뜻깊은 기회였지.’

스미스 교황은 역대 교황 중 가장 평화를 사랑하는 교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타국의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음에도, 그는 국가적 분쟁이 일어날 기미가 있다면 가장 먼저 서한을 보내 지도자를 꾸짖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교황에게 이번 남북 정상회담이 가진 의미는 더욱 컸다.

게다가 남북 예술단이 함께 만들어낸 무대는 교황의 귀도 즐겁게 만들 정도.

그중 한국의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곡은 교황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이것이 바로 평화라는 것을 일깨워준 곡.’

교황은 업무를 시작할 때마다 이안의 곡, <평안>을 틀어놓고 일을 시작하곤 했다.

공포감을 조성할 정도로 압도적인 선율은 전쟁의 처참함을 고스란히 목도하는 기분이었고, 이후 잔잔한 선율이 흐르면 평화로운 일상에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과하지 않고 핵심만 전달하는 선율.

신부에서 시작하여 추기경이 될 때까지, 성가대에 큰 관심을 가졌던 교황이었기에.

이안의 곡이 주는 감정은 더욱 남달랐다.

‘행진곡도 이처럼 소탈한 음악을 사용했으면 좋으련만.’

스미스 교황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미사나 교황이 향하는 곳에는 꼭 특유의 행진곡이 따랐다.

웅장한 오르간 선율과 함께 나아가는 교향곡의 향연.

거기에 신을 찬양하는 성가대의 목소리가 들어가면 무척 화려한 음악이 완성된다.

그러나, 스미스 교황은 이 곡이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교황이기 이전에 신을 따르는 목자이요, 대중과 같은 인간이었기에.

스미스 교황은 행진곡이 이보다 더욱 간결한 곡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듣고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율이 없을꼬.’

그에겐 신을 믿는 이들도, 신을 믿지 않는 이들도 모두 하나님의 자식이었다.

신을 믿는 이들만 즐기고, 이해할 수 있는 곡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라 하시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선 신을 믿지 않는 이들도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교황의 눈길에 이번 오케스트라 경연 홍보물이 눈에 들어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