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01화 (101/250)

101화

어느덧 시간은 새벽을 넘어가고 있었다.

리허설 무대를 앞둔 날.

본선 무대를 제외하면 오케스트라와 협주를 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단 한 번의 기회에서 가장 적합한 연주를 펼치기 위해 손가락이 움직인다.

“무조건 관현악에게 자리를 양보할 필요는 없다. 화합도 중요하지만, 도리어 강세를 세게 했을 때 빛나는 부분도 있지.”

나는 큰아버지의 조언을 떠올리며 연주를 이어간다.

큰아버지가 짚어준 악보에서의 특이점들이 내 손가락에 의해 퍼져나간다.

대한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가 기억하는 노하우들이 덧입힌 악보.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자 연습실엔 나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가 존재한다는 착각이 일렁인다.

관현악의 선율이 덧대어진 채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듯.

그와 동시에 큰아버지가 잊지 말라고 조언했던 말이 떠오른다.

“함께 연주를 펼친다는 것만 기억해라.”

독주와 협주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한다면 협주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차이점.

그러나 그 차이점으로 파생되는 것들은 무척 많았다.

피아니스트는 과도한 선율을 내려놓고, 오케스트라의 향연에 잘 섞이게끔 연주를 이어가야 하고, 정석의 반주를 맞추되 단조롭지 않게 신경 써야 한다.

어디 그뿐만이랴.

‘아마 오케스트라 사이에서도 빛날 수 있는지 살피려는 것이겠지.’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펼친다면 분명 더욱 웅장한 선율을 낼 수 있으리라.

하나보단 둘이, 둘보단 셋이 한데 펼치는 소리가 더욱 크고 다채로울 테니까.

하지만, 오케스트라와 협주를 하는 경연이라면, 과하게 섞이지 않는 것도 심사 기준이 될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위용에 눌리지 않게 신경 쓰면서도 뚝심을 지킨 연주.

경연을 위한 연주이니 오케스트라와 잘 섞이되 내 특색을 분명하게 전해야 하겠지.

‘그 특색을 곡의 표현과 해석에서 돋보이게.’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머릿속에 악보들이 떠오르더니 리스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리스트가 처음 발표한 피아노 협주곡이자, 무려 26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완성한 곡.

특히 피아노 협주곡 1번은 기존에 그가 연주해온 곡들과 다른 점이 많았다.

바흐에 이어 베토벤, 슈베르트, 등 숱한 거장들의 연주를 편곡해왔던 그였는데.

그는 처음 만들어낸 피아노 협주곡에서 기본적인 악장 사이 간격을 두지 않았다.

서로 다른 주제가 나아간다는 예고를 하는 장치적 부분인데도.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끊김이 없다.

‘마치 곡을 만들 때의 고뇌를 상징하는 것 같았지.’

이 곡을 만들었던 당시.

리스트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기 위해 화려한 피아니스트 인생을 내려놓고, 궁정악단의 지휘자로 살아가기 위해 이 곡을 만들었다.

하지만, 본래의 특색을 여지없이 펼치지 못한 까닭일까.

리스트는 이 곡을 완성하는데 26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 긴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듯, 고뇌가 담긴 선율.

그것이 이번 결선에서 내가 선보일 이야기였다.

생각을 갈무리했을 즘, 이미 시계는 아침에 다다르고 있었다.

지금 잔다고 해도 4시간이 최대이리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연습하자.’

나는 더 많은 잠 대신 연습을 택했다.

백지를 주면 높은음자리표부터 끝세로줄까지 완벽하게 복사할 수 있는 경지이지만.

한 번 더 연습하고 체득한다면 리스트의 고뇌를 더욱 유려하게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리스트의 초상에 고뇌 어린 주름을 한 줄 더 새겨넣듯.

손으로 그림을 그리듯 건반 위에서 손가락이 춤을 춘다.

***

그레이트 홀에 들어서자 나와 같은 날 연습하는 사람이 이미 연습을 이어가고 있었다.

결선에 있을 오케스트라 협주를 위한 리허설.

나의 순번은 오늘 자 리허설 마지막이었다.

두 사람의 연습이 끝난 후, 내 차례가 되자 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지휘자와 악수를 나눴다.

백발이 성성한 지휘자는 큰아버지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빌렘 하이팅스라고 합니다.”

내 명성을 들었다며 너스레를 떠는 지휘자.

빌렘 하이팅스.

그는 리스트 협회의 모태가 된 네덜란드 콘체르테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마에스트로였다.

‘콘체르테 오케스트라도 엄청난 곳이지.’

암스테르담에 왕립 오케스트라가 있다면, 위트레흐트엔 콘체르테 오케스트라가 있다.

오케스트라 서열 1위 자리를 놓고 경쟁할 정도로 양대 산맥.

비교적 신생 오케스트라였음에도, 곡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뛰어난 예술가들의 해석이 결합되어 빠른 속도로 오케스트라계를 평정한 악단이었다.

그러한 오케스트라의 수장을 맡고 있는 빌렘이었다.

“박이안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은 우리가 해야지요.”

빌렘은 너털 웃음을 지으며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나의 곡을 몇 번이고 들어봤다고.

특히 전 세계에 송출된 라이브 독주회는 빌렘 또한 실시간으로 보았다고 언급했다.

게다가 빈 필하모닉의 마에스트로가 진작 협업 제안을 할 정도로 검증된 인재라고 내 능력을 믿는다고 덧붙였다.

“벌써부터 협회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빌렘이 말하길, 단원들도 무척 기대하는 눈치라고.

벌써부터 협회 내에서는 우승자가 누가 될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분위기라며 이야기를 이었다.

본선 진출자는 14명이지만, 사실상 나와 콜린의 라이벌 구도로 펼쳐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평이 많다고 했다.

“심지어 심사위원 자리를 거절하고 참가하지 않으셨습니까.”

빌렘은 그 소식을 먼저 접한 사람 중 하나라고 했다.

이번 대회의 심사위원이자, 리스트 콩쿨의 총책임인 이비를 통해 전해 들었다고.

심사위원 자리를 거절했다는 말에 내심 서운했는데, 이렇게 참가자로 만나게 되어서 더욱 좋다고 덧붙였다.

본선을 참관하여 듣는 것만으로도 기대되었다고.

오늘 리허설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고 기대감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콜린씨와도 엄청난 합작을 보여주셨던데요.”

나는 콜린과 오케스트라의 협주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한 번 합을 맞춰본 수준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고.

마치 오랫동안 함께 협연을 한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저 또한 그를 키우는 데 한몫한 사람이니까요.”

콜린의 스승과 막역한 사이라 자주 그의 연주를 봐주었다고.

게다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자 오케스트라에 관심을 가져 여러 번 협주를 펼친 경험이 있다고 덧붙였다.

역시.

오랜 가족들의 연주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괜한 착각이 아니었다.

“그럼 뭐합니까. 제가 호랑이 새끼를 키운 격이 되었죠.”

빌렘은 익살스런 농담을 던졌다.

이번에 그가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고, 로마에서 열리는 오케스트라 경연에 나간다는 소식을 잘 알고 있다고.

게다가 콘체르테 오케스트라도 이번 경연에 참여할 예정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이젠 경쟁자가 되게 생겼다고.

하지만, 그리 말하는 빌렘의 표정은 열정이 가득했다.

도리어 그러한 경쟁을 펼칠 수 있어서 좋다는 듯, 뿌듯한 기색이 보였다.

“그럼! 리허설 시작해보시죠.”

지휘자의 제안과 함께 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몇몇 사람들이 응원 섞인 박수를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 나는 차근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음과 동시에 리스트 협주곡 악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선지 위로 그의 성정을 엿볼 수 있는 음표들이 잔뜩 걸린다.

자비 없이 쏟아지는 음표들의 향연.

피아노 입장을 축하하기라도 하듯, 팡파르를 연상케 하는 현악과 관악의 선율이 동시에 펼쳐진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리허설이 시작된다.

***

‘당연히 2번을 펼칠 줄 알았는데.’

빌렘은 이안이 리스트 협주곡 1번을 연주한다고 했을 때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안의 행보를 모두 엿본 그였기에.

이안이 얼마나 고전 시대의 음악에 강한지 알고 있던 터였다.

같은 4악장 체계의 협주곡임에도 1번과 2번은 완전히 달랐다.

쉴틈 없이 쏟아지는 1번과 달리 2번 협주곡은 기존의 사조처럼 악장마다 간격이 있었고, 후기에 만들어진 2번이 1번 협주곡보다 더욱 발전적인 양상을 띠었다.

이번 결선에 2번 협주곡을 선택한 사람이 더 많은 이유였다.

콜린마저 2번 협주곡을 택했지 않았던가.

‘나도 1번 협주곡을 할 때마다 힘든데 말이지.’

지휘자의 입장에서, 1번 협주곡의 무시무시함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협주곡의 특성상 피아노가 군데군데 연주를 멈추는 곳이 있었지만, 여타 곡들과 비교하면 쉬는 시간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곡도 아니고, 리스트의 곡 아닌가.

빌렘 또한 리스트를 무척 존경하는 마음으로 콘체르테 오케스트라에 입단했기에.

리스트의 곡 난이도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빌렘의 머릿속에 있던 우려는 단숨에 날아갔다.

‘이번 연습이 처음일 텐데?’

빌렘은 지휘봉을 흔들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콜린이야 몇 번이고 콘체르테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으니까.

공정을 위해 콜린도 똑같이 한 번의 리허설을 했지만, 이전부터 함께 쌓은 케미는 무시할 수 없었다.

눈빛만 봐도, 제스처만 봐도 어디가 강조되는지 보이고 어느 선율이 변화하는지 알 수 있다.

콜린과의 합이 무척 잘 맞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빌렘 특유의 사인을 알고 있었기에.

콜린은 빌렘의 지휘를 보고 앞으로 펼쳐질 관현악의 선율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안은 연습은커녕, 콘체르테 오케스트라와 협연이 처음이지 않은가.

‘실로 무시무시한 재능이다.’

빌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연주를 이어가는 중간에도 자신과 악단을 향해 눈길을 돌리는 이안의 모습에 맹수가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서늘한 기류가 흐를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

의중을 모두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빌렘은 나체로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안의 연주에서 느껴지는 해석은 또 어떠한가.

‘엄청난 고민을 떠안고 있는 사람을 형상화한 건가?’

5옥타브 음계를 트릴로 표현하는 부분.

본래라면 독특한 트라이앵글의 선율을 따라 하듯 펼쳐지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 가벼울 법한 부분에서 강약을 조절하여 음색을 펼친다.

본래 3악장에 트라이앵글이 등장하며 무척 선율이 가벼워지는 대목이거늘.

이안의 연주가 섞이자 밝은 트라이앵글 소리는 소심하게 고뇌하는 누군가의 생각을 형상화하듯 울린다.

‘셰익스피어가 생각나는군.’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유명한 구절이 있지 않은가.

To be, or not to be.

인생의 두 갈래 길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처럼.

이안의 연주는 유려하면서도 그 속에 깊은 걱정이 느껴졌다.

마치 리스트가 이 곡을 쓸 때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빌렘은 이안의 연주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한편으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비가 깨나 고생하겠군.’

이안과 콜린.

두 사람의 연주를 모두 들었던 빌렘에게도 선택이 어렵지 않았던가.

이 둘을 심사하고 점수를 매겨야 하는 이비를 떠올리니 불쌍한 마음까지 들었다.

빌렘은 속으로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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