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02화 (102/250)

102화

리스트 콩쿨 결선 전날.

내일이면 콩쿨이 끝난다는 생각에 오늘은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이비는 밤늦은 시간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협회가 이렇게 뒤숭숭해질 줄이야.’

언제부턴가 협회의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결선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함부로 우승자를 예측하는 파벌이 생기기 시작한 것.

리스트 콩쿨은 지금까지 참여자 모두의 축제라는 미명하에 펼쳐진 콩쿨.

그러나 지금은 모두의 축제가 아닌, 둘의 스타에게 스포트라이트가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이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어디서부터 이리된 것이지?’

처음에는 콜린에 대한 인식이 컸다.

콜린은 단연 네덜란드의 연예인이었으니까.

국가적 천재라고 칭송받는 것은 물론, 같은 협회 사람이 보아도 콜린의 연주는 비견할 자가 없었으니까.

이미 타국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으며 천재 피아니스트의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팔이 안으로 굽는 것 정도의 단순한 생각에 그치지 않았다.

이안의 연주가 시작되고 그 기류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심사위원들이 이안의 얘기를 꺼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본선 무대를 끝냈던 시점.

이비를 비롯해 심사위원들이 서로의 생각을 얘기하던 때였다.

시작부터 이안과 콜린 중 누구에게 최고점을 줘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고뇌하지 않았던가.

이비를 제외한 두 심사위원이 각자 한 명의 편을 들고 누가 우수한지 토론을 할 때부터 벌써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지.

“명실상부 콜린의 연주가 단연 최고였지 않습니까? 리스트의 사조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콜린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한국의 박이안 피아니스트는 리스트의 사조를 잘 표현한 데 이어 거장들의 곡을 재현하는 듯 보였습니다. 거장의 이야기를 해치지 않은 선에서 기교를 더한 리스트 선생님의 뜻을 고려한다면 이안의 연주가 더욱 걸맞지 않겠습니까?”

두 심사위원의 말에 이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봐온 콜린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이안의 연주도 훌륭한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으니까.

게다가 이안은 본선 3일 전에 곡을 바꿨음에도 콜린과 대등한 연주를 펼치지 않았던가.

이안에 대한 평이 더욱 높아진 결정적 계기였다.

본선 무대를 보고, 리허설에 참여했던 단원들의 이야기까지 더해지며 지금 협회는 두 갈래로 찢어져서 의견을 표출하고 있었다.

30년 가까이 협회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비도 이러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순 없겠지.’

우승자에 대한 이야기를 자제시키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으리라.

다음부터는 무조건 입막음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이비였다.

하지만, 이미 뒤숭숭해진 분위기를 바꿀 방도는 없었다.

엄청난 파급력에 그저 놀라워할 뿐.

그러나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러면 어떤 쪽에 우승을 줘도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텐데.’

이안이 우승자가 되면 콜린을 버리냐는 말이 나올 것이고, 콜린이 우승자가 되면 협회원 감싸기 아니냐는 오명을 살 테지.

당장 내일 결선을 대중에게 공개하면 분명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작은 사회인 협회에서도 이 정도의 분열 양상을 보이는데, 이것이 대중의 인식으로 퍼지면 어떻게 될까.

이비는 오싹한 마음에 몸서리쳤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결선의 날은 밝고 있었으니까.

***

‘저 녀석도 장난이 아니구먼.’

현철은 결선 무대를 보는 내내 혀를 찼다.

이안과 함께 다니면서 각국의 인재들을 두 눈으로 목도한 현철에게도 콜린의 연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일본에서 히마리도 표현력의 대가로 현철의 귀를 홀렸는데.

네덜란드에서는 콜린이라는 청년이 리스트의 사조를 그대로 재현하며 현철의 눈을 크게 만들었다.

‘이명이 붙을 만하네.’

리스트의 현신이라는 이명.

그만큼 콜린의 연주는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기존의 화려함보다 정형화된 환상에 집중한 리스트 협주곡 2번.

리스트의 초절기교적인 면을 여지없이 드러내면서, 경쾌한 선율을 펼치는 모습은 리스트의 의중을 모두 파악한 사람의 연주 같았다.

그러나 이안도 만만치 않았다.

‘그 몇 마디에 저렇게 발전할 줄이야.’

사실 마에스트로의 피드백이라고 해도 크게 조언한 것은 없었다.

단지 관현악 선율을 더욱 잘 이해하기에, 어떤 부분에 강세를 넣으면 좋을 것이라는 조언과 협주의 기본 사조를 알려줬을 뿐.

그러나 이안은 몇 가지 가르침을 몇 배로 불려 활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끊김 없이 연속되어 펼쳐지는 곡조에 사뭇 지루할 수도 있을 법한 곡인데.

이안의 화려한 연주는 지루할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협주 경험이 몇 없는데도 잘 이어가고 있어.’

흔히 협주에 익숙지 않은 피아니스트들이 하는 단점.

바로 악보를 너무 따라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음악이 매끄럽게 흘러가지 않고 마치 퍼즐 조각을 끼우듯 단조로워지기 마련.

마치 연주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지시문에 따라 선율을 덧붙이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다.

콩쿨에 참여한 참가자 중 일부도 할 정도로 익숙해지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안의 연주는 필름을 이어 붙인 듯 자연스레 펼쳐진다.

‘심사위원들이 골머리깨나 앓겠군.’

이안과 콜린.

두 사람이 연주를 끝마쳤을 때 독보적으로 환호성이 터져 나오지 않았던가.

그레이트 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열성적인 환호성과 박수를 보냈다.

우위를 평할 수 없는 수준의 무대.

게다가 서로 다른 곡을 연주했던 탓에 심사하기 더 어려울 터.

차라리 같은 곡이라면 차이점을 비교하며 우열을 가리기 편했을 텐데.

수상자 발표를 앞둔 지금, 심사위원들이 고군분투할 것이 선했다.

그러나 현철에겐 확신이 있었다.

‘이안이 우승하겠다.’

현철이 확신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마에스트로서 평가했을 때, 이안의 연주가 더 나았다.

2번 협주곡을 연주했던 콜린의 연주도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1번 협주곡보다 더욱 발전적인 경향을 보이는 2번 협주곡.

콜린은 그 발전 양상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이안의 연주는 곡의 차이점을 잊게 만들 정도로 뛰어났다.

그리고 다른 하나.

‘단원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지.’

대중의 인식은 비슷하다.

하지만, 오케스트라 단원들 같은 전문가들은 보다 면밀한 생각을 할 터.

게다가 개인의 연주뿐만 아니라 전체의 소리를 느끼는 단원들이기에, 단원들의 표정은 협주가 얼마나 잘 이뤄졌는지 알 수 있는 수단이었다.

현철은 마에스트로 특유의 눈썰미로 두 무대가 끝난 직후 단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콜린이 연주가 끝났을 때보다 이안이 연주했을 때 더 많은 사람이 웃음꽃을 피웠다.

***

파크 식스 홀.

티볼리브레덴뷔르흐의 소규모 극장이자, 파티 홀로 사용되는 공간이었다.

리스트 협회에서 콩쿨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며 초청장을 보내왔다.

하지만, 파티장에 들어가자마자 조촐하다는 것은 무척 겸손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전생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무도회장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

임시로 설치한 샹들리에가 밝은 빛깔을 펼치고 있었다.

테이블에 올려진 갖가지 산해진미들은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우승 축하드립니다. 박이안 피아니스트님.”

콜린이 샴페인 잔을 건네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내가 샴페인 잔을 받아 잔을 맞추자 콜린은 무척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잔을 기울였다.

그는 이보다 더욱 짜릿한 경쟁은 처음이라며.

내 연주가 무척 대단했다고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리스트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 1번 협주곡을 발전시킨 것 같은 연주였다고.

콜린은 승패를 떠나 그러한 곡을 듣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며 빙긋 웃었다.

‘나한테는 상장이 큰 수확이겠지.’

본선 3일 전에 곡을 바꾸는 수를 두기도 하고, 콜린과 같은 경쟁자를 만난 탓에 마냥 쉬운 경쟁은 아니었다.

콜린의 연주도 우수할 뿐더러, 네덜란드에서 그의 입지는 생각보다 컸다.

콜린의 무대가 끝나자 엄청난 환호성이 나오지 않았던가.

게다가 지금도 어딘가에서 콜린의 지지자들이 질투 어린 시선으로 보는 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겠지.

병무청이 인정하는 리스트 콩쿨 우승.

큰아버지가 상장이 나오는 대로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으니 이번 콩쿨의 목표는 달성된 셈이다.

이제 복무에 대한 걱정은 사라졌으니까.

“저는 이제 바티칸 경연만 신경 쓰면 되겠군요.”

콜린은 이제 자신이 해야 할 것은 오케스트라 경연이라며 이야기를 이었다.

지난번에 생각을 해보겠다는 말로 우선 브레이크를 걸어둔 상태.

콜린은 재차 로마행에 대한 내 결정을 물었다.

나는 대답에 앞서 파티장을 살피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 파티를 주최한 리스트 협회도 결국 뿌리는 콘체르테 오케스트라였으니까.’

이번 콩쿨의 주최사, 리스트 협회.

협회의 시작은 나와 협연을 꾸렸던 콘체르테 오케스트라였다.

리스트라는 존재가 만든 사조를 기억하고, 미래에 펼치기 위한 악단.

리스트 사망 100주기에 맞춰 콩쿨을 만들고 협회를 창단한 장본인이었다.

그들도 시작은 콜린이 하려는 것처럼 경연에서 명성을 쌓는 것에서 시작했겠지.

기존의 사조에서 영감을 받고, 새로운 사조를 펼치려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서 이뤄낸 결과물.

그랬던 이들이 지금은 협회라는 단체로 거대한 명성을 가지는 것은 물론, 한국에서도 인정하는 콩쿨을 개최하는가 하면, 이처럼 화려한 파티장을 조촐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거대하게 성장했지 않았느가.

‘답사를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내 머릿속에 조그마한 확신이 들어섰다.

앞서 콩쿨과 자작곡들은 내 사조를 확인하고 구체화하는 단계였다면, 이제는 그 사조를 다른 이들과 나누고 더욱 발전시킬 때였다.

콜린의 말대로 이 과정은 혼자 하기엔 벅찰 것이다.

숱한 거장들도 곡을 만들었다고 해서 명성을 얻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혼자 연주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함께 연주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해서 지금의 명곡으로 남았겠지.

나 또한 거장들처럼 사조를 남기고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오케스트라를 창단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그 시작에 대한 힌트를 바티칸 경연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

‘날 것 그대로의 오케스트라들이 올 테니까.’

거대 경연인 만큼,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이 찾아올 테지.

콜린의 오케스트라처럼 신생 오케스트라도 있을 것이고, 빌렘의 콘체르테 오케스트라처럼 명성 높은 사람들도 오리라.

신선한 매력을 나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특유의 관록으로 무대를 휘어잡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각자 뚜렷한 색채들을 가진 교향악단이 그들의 특색을 맘껏 펼치는 경연이기에.

내가 만들 오케스트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그런데 콜린씨는 왜 그리 제가 필요한 겁니까?”

자꾸만 같이 가자는 말을 하던 콜린에게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콜린은 내 질문에 무척 진지한 듯 여러 생각을 꺼냈다.

같은 또래의 피드백을 받고 싶었다는 말과 글로벌 인맥이 늘면 좋지 않냐는 너스레까지.

그러나 그의 진심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이안씨의 청음력이라면 저희 오케스트라의 시작을 누구보다 면밀하게 봐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피아노 조율 차이로 곡을 바꾸는 실천력을 봤을 때부터 나와 함께 로마에 가고 싶었다고.

그 미세한 차이를 느끼는 것은 물론, 하이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거침없는 행보가 지금 자신의 오케스트라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결선 무대에서 펼쳤던 연주.

미묘하게 선율의 흐름을 바꿔가며 연주를 이어가는 것이 바로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이자, 이번 콩쿨에서 2위가 된 원인이라고 자조적인 평가를 덧붙였다.

무척 면밀하게 분석한 콜린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깊게 생각을 한 사람이 만든 오케스트라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아마 신인답지 않은 실력을 선보이겠지.

단장의 실력이 비견할 수 없을 만큼 높으니까.

그렇기에 더욱 가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만들 오케스트라도 콜린의 오케스트라만큼 대단한 실력으로 시작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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