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03화 (103/250)

103화

암스테르담 공항.

아침부터 공항은 해외로 나가려는 사람들로 북적했다.

그 가운데 한 남자가 누군가를 기다리듯 목을 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연예인이라도 기다리듯 긴장과 환희가 동시에 어린 얼굴을 한 남자.

그는 네덜란드의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일루시아 오케스트라의 단장, 콜린 반 다이크였다.

‘자신 있게 얘기했지만,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콜린도 자신이 이렇게까지 이안의 도움을 절실히 원할 줄은 몰랐다.

처음 심사위원 자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콩쿨에 참여했던 것은 천재적인 존재와 경쟁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전 세계를 무대 삼아 활약하고 있는 이안이었기에.

심사위원이 아닌 경쟁자의 입장에서 연주를 들었을 때 느낄 전율을 기대한 것이다.

콜린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전율을 맛보고서 그의 마음에는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

콜린의 주변에는 뛰어난 스승이 있었다.

네덜란드 피아노계를 주름잡았던 이비 드 보아.

네덜란드 오케스트라 양대 산맥 중 하나인 콘체르토의 수장, 빌렘 하이팅스.

그럼에도 콜린이 이안의 피드백을 원하는 것은 스승들에게서 보지 못한 청음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느끼지 못한 피아노의 음색을 깊게 파악하고, 본선 곡을 단숨에 바꿔버리는 실행력.

게다가 짧은 시간 동안 곡의 특이점을 파악하고 그 위에 자신의 사조를 씌우는 능력까지.

이안을 만나고 난 후 콜린이 가지고 있던 천재의 기준이 아득히 높아질 정도였다.

‘이안씨라면 내가 듣지 못한 부분까지 모두 짚어줄 수 있을 거야.’

형용할 수 없는 천재.

이안이라면 기존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까지 느낄 터.

콜린은 그러한 것들을 얻고 싶었다.

이안의 피드백으로 한 음이라도 더 얹을 수 있다면.

작은 조언이 큰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콜린은 피날레 파티에서 연신 이안에게 로마행을 제안했다.

자신의 오케스트라에게 한 마디 부탁한다며 자신 있게 제안을 건넸지.

하지만, 한편으로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콜린은 씁쓸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 씹었다.

로마행이라는 거대한 제안에 정작 콜린이 이안에게 줄 수 있는 이점은 많지 않았다.

먼저 오케스트라를 창단한 만큼 그 과정에 필요한 것이나 노하우를 알려줄 순 있었지만, 빈약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콜린이 강력하게 로마행을 제안하지 못한 이유였다.

자신들에게는 이안이 와서 한 마디 건네는 것만으로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지만.

이안에게 이번 로마행은 오케스트라 경연을 관람하는 것 말고는 큰 보상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흔쾌히 로마행을 택한 이안에게 어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비즈니스석을 예매했음에도 마음의 빚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언가 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수많은 생각을 하던 중 누군가가 콜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콜린씨.”

콜린을 향해 두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희끗한 머리와 굵은 눈썹이 돋보이는 노장과 그와 닮은 굵은 눈썹을 지닌 청년.

두 남자의 등장에 콜린은 환한 미소를 피웠다.

단 두 명이 다가오는데도, 뒤에 수많은 관현악단을 통솔하는 것처럼 위압감마저 느껴진다.

이안이라는 천재가 지금 로마행을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천군만마를 얻었다는 마음에 콜린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

로마 오페라극장.

일루시아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극장 안을 가득 메운다.

단원들은 머리칼이 젖다시피 할 정도로 땀이 흐르고, 지휘자로 선 콜린도 헉헉거릴 정도지만, 그들의 연주는 멈추지 않는다.

악기 세팅에서 곡을 연주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탓에 배정받은 리허설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에.

다소 강행군으로 보일 수 있어도 연습을 속행했다.

‘벌써 4일이나 지났네.’

로마에 도착한 지 나흘째.

처음엔 다소 서먹했지만, 연주가 시작되자 단원들은 감정을 배제하고 유려한 연주를 이어간다.

그리고 나는 연주를 끝마칠 때마다 연주에 대한 강평을 내놓는다.

오케스트라 선율에 단숨에 적응하는 것을 보고 콜린이 감탄사를 연발했지.

“이제 선율은 완성된 것 같네요. 다만 템포가 밀리는 면이 조금 있네요. 아마 지휘를 보는 시점이 달라서 생긴 것 같은데, 지휘자를 쳐다보는 시점을 맞추면서 진행해보시죠.”

짧게 건넨 코멘트에 콜린을 비롯한 모든 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 말에 공감하는 듯.

콜린을 쳐다보는 단원들의 눈길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과연 콜린이 선출한 사람들이라 그럴까, 내가 제시한 코멘트에 별도로 협의를 하지 않았음에도 단숨에 곡의 흐름이 변한다.

악보의 마디가 끝나는 시점에서 단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콜린의 지휘를 살핀다.

피드백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호른의 음색이 불안정한 것 같지 않냐? 악기 점검 한 번 받아야 할 것 같은데.”

큰아버지의 존재 또한 큰 우군이 되어 주었다.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였으니까.

호른과 팀파니, 등 내게도 익숙하지 않은 악기들에 대한 큰아버지의 피드백이 곁들여지자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더욱 풍성해졌다.

오케스트라 덕후 아니랄까 봐.

큰아버지의 명성을 알고 있던 콜린이 얼마나 내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함을 표했는지.

“이 고마움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내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변화를 겪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콜린을 포함하여 단원들도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하던 것을 깨달았다면 입을 떡 벌렸다.

콜린은 자신이 해준 것이 없는데도 이렇게 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했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 많은 정보를 습득하는 중이었다.

‘오히려 신생 오케스트라라서 보이는 것들.’

합주에 익숙지 않은 단원들이 흔히 할 수 있는 실수부터, 합을 맞춘 지 얼마 되지 않은 단원들이 소통하는 방식, 등.

대한 오케스트라와 같은 거대 오케스트라를 모델로 삼았다면 못 봤을 것들이 보였다.

일루시아 오케스트라는 창단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오케스트라.

그 덕에 신생 오케스트라를 운영할 때 직접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 선명히 보였다.

이미 최고의 자리에 오른 오케스트라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일 테지.

신생 오케스트라이기에 할 수 있는 실수들과 느껴야 하는 깨달음들이 머릿속에 박힌다.

게다가.

“한국의 박이안 피아니스트 아니십니까?”

오픈 리허설인 탓에 극장에는 다른 단장들도 와있었다.

콜린처럼 신생 오케스트라 팀을 이룬 사람들, 다른 신생팀들의 연주에서 배울 것을 찾으러 온 사람들이겠지.

그런 이들도 다가와서 내게 물음을 건네지 않던가.

“혹시 저희 오케스트라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오케스트라 선율에서 가장 중요한 걸 잡자면 무엇이 있을까요?”

“피아노 협주를 할 때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콜린처럼 나이가 어린 단장도, 반대로 고령의 단장도 있었다.

제각기 다른 외모를 가졌지만, 조심스레 다가오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보통 이러한 경연에서 경쟁 상대에게 부탁을 하진 않을 터, 아마 내가 연주에 가담하지 않은 것을 보고 오는 분위기였다.

그들이 내놓는 질문도 내게 새로운 생각들을 불러일으킨다.

콜린처럼 신생이기에 할 수밖에 없는 고민들.

나도 오케스트라를 창단한다면 그들과 같은 고민을 하겠지.

궁금증 어린 시선을 보내는 단장들에게 나는 한마디를 던졌다.

“일루시아 오케스트라가 하는 것을 보십시오.”

백문이 불여일견.

내가 조언을 건네는 것보다 내 조언이 들어간 연주를 보는 것이 확실할 테니까.

내 말에 콜린은 기꺼이 보여줄 수 있다는 듯 합주를 이어간다.

신생 오케스트라 단장들이 나와 일루시아를 번갈아 보며 반짝이는 눈빛을 보낸다.

***

프라임플러스.

미국의 OTT 시장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단순히 배급사 역할을 했던 다른 사업체와 달리 프라임플러스는 독자적인 오리지널 컨텐츠를 만들어내며 크게 성공했고, 지금의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들의 컨텐츠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더 마스터(The Master)’을 꼽을 수 있었다.

“‘더 마스터’는 인플루언서와 대중의 장벽을 허물고, 더 나아가 ‘다큐는 재미없다’라는 불문율을 깨버린 작품입니다.”

프라임플러스의 대표 컨텐츠, ‘더 마스터’.

‘마스터’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분야별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였다.

최근 라인업만 보아도 살벌했다.

K-POP으로 세계를 제패한 아이돌 그룹,

10년간 F1의 우승을 놓치지 않은 카레이서,

독설가이자 미슐랭 스타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의 요리사, 등.

업계 최고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고뇌와 일상을 담아 많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끄는 시리즈였다.

하지만, 그것을 제작하는 CP는 새 시리즈를 낼 때마다 고역이었다.

‘이번에는 누구를 해야 하지?’

기획서를 하나씩 살피는 CP의 눈길이 냉철했다.

황금 체인이 인상적인 금테 안경을 쓴 여인.

‘더 마스터’의 시작을 함께 한 사람이자 프라임플러스 CP, 샬롯 매디슨이었다.

매번 1타 출연자를 뽑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대단한 마스터들은 촬영 전부터 다양한 이유로 출연을 거부하거나 특유의 자존심으로 촬영을 엎어버리기 일쑤였으니까.

‘지난 방송 때 위생 수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촬영 전면 취소당할 뻔했으니까.’

샬롯은 그때를 회상할 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거장들을 마주하는 일이기에 시간은 물론 돈, 에너지까지 많은 것을 헌신하다시피 해야 했다.

특히 이번 컨텐츠 주제로 잡은 음악 예술가 후보는 더욱 심했다.

이전에도 음악 거장을 섭외하려다가 연신 불발된 탓에 아이돌로 선회했지 않은가.

샬롯의 책상 위에는 다양한 음악 예술가들의 프로필이 깔려 있었다.

그들 중 샬롯의 이목을 끈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박이안 피아니스트.’

피아노를 전공한 지 1년 만에 숱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피아니스트.

스무 살이란 나이에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의 OST를 만드는가 하면, 베토벤의 음악을 재탄생시키고, 클래식의 고장에서 독주회까지 펼쳤다지.

게다가 최근에는 리스트 콩쿨에서 우승했다는 기사까지 나왔지 않은가.

이안의 프로필을 보는 샬롯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다른 프로필 속 거장들도 대단했지만, 이안만큼 월등한 행보를 이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이안은 자작곡을 수없이 뻗어나가며 매번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지 않던가.

OST와 베토벤의 음악 재현, 최근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노래까지 만들었다지.

‘소재가 무궁무진한 존재인걸?’

방송을 생각하는 샬롯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비교적 어린 나이임에도 이안은 거장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숱한 업적만 봐도 이안을 ‘마스터’라고 부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지금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존재이니까.

‘촬영은 가능하겠지?’

이안의 행보를 생각하면 촬영도 걱정이었다.

바쁜 일정 탓에 연락을 받아줄지도 의문이고, 이미 이안이 네덜란드를 떠나 어디론가 향했다는 정보만 있을 정도로 이곳저곳을 누비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러니 더욱 해야 한다는 생각이 샬롯의 머리를 가득 채운다.

메일, 전화, 안 되면 자택으로 직접 찾아가서라도 섭외 요청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샬롯은 곧바로 섭외팀으로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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