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짝짝짝짝짝!
로마 오페라극장에 박수 세례가 울려 퍼졌다.
첫 데뷔 무대를 치른 일루시아 오케스트라.
그리고, 일루시아를 이끈 단장이자 지휘자, 콜린이 감상에 젖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청중을 향해 허리를 숙였을 때.
콜린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단연 이안이었다.
‘직접 보여드리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야.’
이안의 피드백은 마법 같았다.
콜린이 몇 번이고 연습을 하면서 잡아내지 못했던 부분을 이안은 단숨에 잡아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음악을 바라보고, 틀린 그림 찾기 하듯 곧바로 잡아내듯.
이안이 수정 방안을 내뱉을 때마다 곡은 크게 변화했고, 콜린을 포함한 단원들은 자신들의 변화에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다.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기량을 최고로 끌어올리는 이안의 조언.
경연 무대를 펼쳤을 때 단원들의 활기찬 얼굴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첫 무대에서 이런 연주를 펼쳤다는 것만으로도 꿈만 같아.’
애초에 우승은 꿈도 꾸지 않았다.
본래 경연에 오른 것은 다른 유수한 오케스트라를 살펴보고, 그 속에서 또 다른 배움을 얻어 가기 위함.
더 나아가 세상에 오케스트라 출범을 알리는 신호탄을 날리는 것이 이번 경연의 주된 목표였다.
신생 오케스트라에게 유수한 오케스트라가 참여하는 경연에서 단번에 우승을 차지하는 것은 욕심이었으니까.
이안이 건넨 피드백은 다른 어떤 오케스트라도 펼칠 수 없는 감동을 만들었지만, 그것이 신생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단박에 거대 오케스트라의 수준으로 올리는 것은 아니었다.
악단의 곡을 들은 사람들이 응원과 환호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기에.
콜린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무대를 내려왔다.
그런데.
“교황님께서 독대를 원하십니다.”
딸꾹.
검은 슈트를 입은 남성의 말에 콜린은 딸꾹질을 연발했다.
콜린은 교황을 직접 만나고 나서야 현실감을 되찾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콜린은 곧바로 교황에게 인사를 건넸다.
“교황님을 뵙습니다.”
콜린도 이번 경연에 교황이 참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톨릭 신자였기에, 콜린은 이번 교황이 음악적 조예가 무척 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신부이면서 성가대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추기경이 되었을 때도 미사에서 ‘음악의 힘’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가톨릭 신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콜린이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스미스 교황이었다.
그런데 음악에 대한 관심이 이 정도였을 줄은 몰랐다.
스미스 교황의 입에서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들이 술술 튀어나올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박이안 피아니스트가 지금 로마에 있습니까?”
콜린이 자신들을 이끈 것은 이안이라는 말을 하고 난 직후.
이안의 이름을 들은 교황이 더욱 흥분해서 질문을 연발하지 않던가.
이안과는 어떠한 관계인지, 이번 곡의 피드백을 모두 이안이 건넨 것인지, 지금 이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자신을 불러놓고 다른 사람 얘기만 하면 기분 나쁠 법도 하건만.
도리어 콜린은 이안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교황님께서도 알 정도라니.’
가톨릭교도들의 우두머리.
교황이 이안의 이름을 알고, 저리 열성적이게 원할 줄이야.
이안의 명성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는 대목이었다.
***
“빠르게 응답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롯 매디슨이라고 합니다.”
금테 안경이 인상적인 여인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샬롯 매디슨.
그녀는 프라임플러스의 책임 프로듀서라고 소개했다.
한국으로 치면 방송사 부장급 되는 사람이리라.
제작 인력과 출연진 등 모든 인사관리와 프로그램을 책임질 정도라면 꽤 높은 자리일 텐데.
그 정도 직급의 사람이 직접 올 줄이야.
“저야말로 좋은 제안을 주셔서 감사한걸요.”
한창 오케스트라 창단을 고민하고 있던 때였으니까.
어떤 창구를 통해 단원 모집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프라임플러스의 컨텐츠를 활용한다면 기대감을 한층 더 강하게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미팅을 잡았는데도 이리 흔쾌히 나와주시지 않았습니까. 저희야말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야지요.”
샬롯은 빙긋 미소를 짓고는 곧바로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더 마스터’의 기본적인 연혁을 시작으로 내가 프로그램에 나왔을 때의 이점들.
연주를 제대로 담기 위해 최상의 오디오 제작진을 준비해뒀다고 덧붙였다.
더 나아가 후회하지 않을 결정이 될 것이라며 프로그램의 우수성을 늘어놓았다.
내가 출연한다면 분명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게다가 오케스트라 창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도리어 샬롯은 반갑다며 응수했다.
“서로에게 윈윈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샬롯의 표정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벌써부터 그림이 얼핏 그려진다고.
그동안 내가 이뤄낸 성과라면 다큐멘터리 요소로 충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케스트라 창단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던 중.
큰아버지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큰아버지는 전화 수신자를 보더니 샬롯에게 양해를 구했다.
샬롯은 괜찮다며, 천천히 다녀오라고 응수했다.
큰아버지가 나가는 길을 바라보면서 나는 묘한 의문을 피웠다.
‘뭐지. 중요한 이야기인가.’
보통 큰아버지는 미팅을 할 때 연락을 받지 않는다.
미팅의 기본은 상대와 이야기를 끝마칠 때까지 자리를 피하지 않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양해를 구하고 나갈 정도라면 중요한 전화이리라.
하지만, 샬롯은 개의치 않은 듯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럼 오케스트라 창단 이외에 다큐멘터리 메인 에피소드로 구성할 만한 일정이 있을까요?”
샬롯은 기존에 ‘더 마스터’에서 펼쳤던 에피소드를 차례대로 읊었다.
아이돌의 경우 미국 진출에 이어 빌보드 차트 진입과 첫 미국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고, 요리사는 새 식당을 개업하는 스토리를 담았다고.
심지어 카레이서가 나온 에피소드에서는 기네스에 기록된 자체 기록을 경신하는 에피소드를 펼쳤다고 덧붙였다.
나로서는 오케스트라 창단을 먼저 생각하고 있던 터.
“갑자기 죄송합니다.”
한창 고민을 이어가던 중, 큰아버지가 자리로 돌아왔다.
마침 다큐멘터리 에피소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샬롯은 큰아버지에게 에피소드 소재로 적합한 제안이 있냐고 질문을 던졌다.
샬롯의 말에 큰아버지는 방금 좋은 제안이 들어왔다고 덧붙였다.
“교황님의 연락입니다. 이안이와 만나보고 싶다고요.”
방금 전화가 콜린의 전화였다고.
미팅으로 인해 연락이 힘들 것이라고 했는데, 내가 아닌 큰아버지에게 전화를 건 것이 이상하여 전화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교황이 나와 음악적 소통을 해보고 싶다고.
콜린을 통해 나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사실을 전해 들은 샬롯은 한참 동안 입을 벌린 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현실을 깨달은 샬롯은 카메라 가방에 손을 얹었다.
“혹시 지금부터 촬영해도 될까요?”
***
교황청.
가톨릭의 행정기관이자, 가톨릭 교회 전체를 통솔하는 중앙 통제기관.
그리고 교황이 주된 업무를 진행하는 공간이다.
내가 지금 있는 곳, 바로 교황의 집무실이었다.
마호가니 목재로 만들어진 가구들과 하얀 천으로 장식된 소파와 의자들.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빛깔에서 고급스러움이 묻어났다.
“인생 통틀어 가장 놀라운 순간을 꼽으라면 지금일 겁니다.”
콜린이 너스레 떨던 것이 떠올랐다.
경연을 끝내고 교황과 만났을 때는 기적이 일어난 것 같았다고.
자신들의 음악이 너무 좋았다는 말을 했다고 흥분 섞인 어조로 말했었지.
이 모든 것이 내 덕이라며 연신 감사 인사를 했던 것이 생생했다.
가톨릭교도로서 교황을 만난 것은 천운이라며.
교황의 집무실에 초대받은 내가 무척 부럽다고 속내를 밝혔다.
‘생각보다 평범한데.’
교황이라면 무릇 모든 가톨릭교도들 중 선두에 서서 신을 칭송하는 존재 아닌가.
그런 생각과 달리 집무실은 비교적 평탄했다.
벽에 걸린 성 베드로의 초상과 신상, 십자가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집무실과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집무실 한편에 있는 책장에는 찬송가 대신 클래식 음반들로 가득했다.
책장의 옆에 놓인 턴테이블은 교황의 음악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남북 예술단 공연에서 선보인 연주는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소파에 앉은 교황이 차를 한 모금 홀짝이며 말했다.
<평안>을 한 번 들은 것만으로 무지한 팬이 되었다고 팬심을 드러냈다.
“포화를 떠올리듯 퍼지는 공포스러운 선율에 이어 햇살같이 찬란한 선율. 이것이 바로 평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비발디의 <사계>를 들은 이후 처음이라고.
집무실에 앉아 음악을 들을 때면 가슴 한편이 뭉클해진다고 덧붙였다.
음악이 감동을 전할 수 있는 매개체라는 사실.
다시금 그 생각을 일깨워줘서 고맙다는 마음을 표현했다.
“과찬이십니다.”
“이안씨는 무척 겸손하시군요.”
허허.
교황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진심이라며 뜻을 전했다.
교황이 되기 이전에 성가대에 관심을 가지며 음악이 가진 힘을 깨달았다고.
음악을 통해 뜻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 놀랍다며 칭송했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교황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가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었다.
몇 차례 <평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던 교황은 이내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안씨는 교황이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소 철학적인 질문에 나는 내가 아는 바를 그대로 꺼내놓았다.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지도자이자, 세계의 존경을 받는 사람.
특히 평화를 사랑하여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을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교황은 맞는 말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듯한 씁쓸함.
교황은 차근히 자신이 가진 딜레마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저 또한 한 명의 목자일 뿐입니다.”
교황은 자신이 너무 신격화되는 것 같아 아쉽다고 덧붙였다.
도리어 그 때문에 교황을 어려워하는 것 같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쳤다.
자신 또한 신을 믿는 사람 중 하나이고, 남들보다 신의 말씀을 잘 따르는 사람일 뿐이라고.
그것은 자신이 교황이라 그런 것이 아닌,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응당 해야 하는 일이라고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그런 것에 비해 교황의 행진 때 사용되는 곡은 교황을 찬양하는 면이 강하다고.
신성시하듯 펼치는 곡조에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고 했다.
신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해하기에 어려운 탓에 대중들에게 다가가기엔 과하다고 자신의 생각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하긴, 종교 음악들이 어려운 건 사실이니까.’
오스트리아도 오랫동안 가톨릭을 믿어왔기에.
전생의 기억 속에 교회 음악들에 대한 정보들이 가득했다.
고대의 기록을 답습하기 위해 히브리어로 된 성가(聖歌)를 부르고, 교리를 공부한다.
귀족과 평민 사이의 종교적 격차가 나는 가장 큰 이유였지.
현 교황은 그러한 것이 싫다고 말했다.
신을 믿는 사람도, 신을 믿지 않는 사람도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소탈하고 간결한 음악.
“부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목자의 청을 들어주시겠습니까?”
행진이나 성당 입장 때 사용되는 교황의 등장 곡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종교의 느낌을 덜고, 일반 대중들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음악.
교황의 요청에 내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무려 교황의 등장 곡이다.’
성인으로 추대받는 인물의 이미지를 곡 속에 간결하고 소탈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머릿속에 걱정 어린 의문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악상들이 마구 떠오른다.
눈앞에 있는 스미스 교황의 편안한 웃음을 그리며.
상상 속에 들어찬 오선지에 음표들이 하나둘씩 맺힌다.
묘하게 심장이 두근대는 박동을 전해온다.
거기에 더해 나는 교황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더 했다.
“그럼 혹 제 부탁도 하나 들어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