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06화 (106/250)

106화

등 뒤에서는 촬영진들이 촬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번 교황곡을 만드는 과정을 모두 카메라에 담겠다는 마음으로.

스태프와 카메라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다.

Palazzo Apostolico, 사도궁.

이곳은 교황청의 역사를 함께 한 곳이자, 스미스 교황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과거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듯 내부에는 수많은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과 미술품들이 자리 잡고 있다.

천여 개의 방들을 가진 사도궁에서 내가 받은 방 하나.

교황 측에서 내가 작곡에 정진할 수 있도록 마련해준 연습실이었다.

‘기존의 곡 분석은 대부분 완료했다.’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한 지 약 3일째.

그동안 내가 한 것은 기존의 곡들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내 눈앞에는 수많은 악보들이 놓여있었다.

최근 사용되는 것부터, 이전 교황 때 사용되던 것들까지.

교황이 등장할 때 펼쳐지는 행진곡의 악보였다.

교황의 우려는 기존의 곡이 과도하게 신성시된다는 것이었으니, 그가 그렇게 느낀 원인부터 찾는 것이 먼저이리라.

‘곡들의 특성을 이해하는 게 먼저겠지.’

어떤 곡에서는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십자군의 군세가 떠오르고, 어떤 곡에서는 발자취에 생명이 탄생하는 그림이 떠오른다.

모두 교황과 신을 찬양하고 숭배하기 위한 곡들.

이러한 것들이 교황을 고민에 빠뜨린 주요 원인이라 생각했다.

그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조건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에 떠올랐다.

행진을 연상하게끔 해야 하면서, 교황의 권위를 고스란히 담으며, 신자가 아닌 사람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선율이어야 한다.

서로 섞일 수 없는 조건들을 한데 섞기 위해.

나는 손이 저릿해질 정도로 수많은 악보들을 고스란히 피아노로 옮겼다.

비교하고, 분석하고, 탐색하기 위해.

한 번 연주할 때보다 열 번 연주했을 때 그 차이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리고 연주를 반복해갈수록 상상 속에 있던 그림이 뚜렷해지는 듯하다.

그런데 이틀 차가 되었을 때쯤부터 머릿속에서 새로운 감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제는 곡 전체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

이전 연주가 숲길을 거닐며 나무를 하나씩 관찰하는 식이었다면, 지금은 숲 전체를 보는 기분이다.

마디 대신 악장(樂章)을 보고, 악장 대신 곡 전체를 본다.

곡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한 발자국 뒤에서 관망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열된 액자에 담긴 그림들을 보고, 그 그림의 특이점을 파악하는 것처럼.

눈을 감으면 3일 밤낮 동안 연주하고 체득했던 곡들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보였다.

연주함과 동시에 여러 정보를 곡에 녹여 펼치려고 했던 것을 넘어.

이젠 연주를 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음원을 틀어놓은 듯 선율이 느껴지고, 곡의 분위기를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이러한 감각에 눈을 뜨게 된 것일까.

몇 차례 생각하던 나는 이내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동안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가상의 오선지를 따라가며 연주를 펼쳤다.

그 과정에서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나 또한 그림에 빠져들어 간 것처럼.

곡 자체에 스며들어 이야기를 강조하고, 선율을 만들어냈다.

이번에도 시작은 비슷했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악보를 따라 나아가며 곡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마치 스케치부터 채색까지 하나씩 하는 것처럼.

그러나 몇 차례 연주를 반복하자 그림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점점 멀어진다.

틀린 그림 찾기를 잘하려면 도리어 멀리서 봐야 된다고 하던가.

곡의 정보를 하나하나 뜯어보는 대신, 전체 상황을 바라보자 곡들 사이의 특색이 확연하게 두드러진다.

‘이제야 보인다.’

숱한 행진곡들에서 보이는 공통점.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성스러운 성당의 풍경이 그려지는 부분이 있었다.

특히 행진곡들에서 사용되는 곡들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졌다.

거대한 악단의 전진을 연상케 하는 여러 악기들의 합주.

악보상, 오르간과 여럿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가미되는 부분이었다.

마치 성당의 노란 스테인드글라스에 햇빛이 내리쬐듯.

여러 선율이 한데 모여 펼쳐지자, 성당 내부에 황금빛이 감도는 듯한 이미지가 그려진다.

아마 이 선율에 성가대의 합창이 더해지면 신성함은 더욱 극에 달할 테지.

로마 가톨릭의 심장인 바티칸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행진곡들이었다.

‘이 부분을 바꾸는 것이 시작이다.’

성당에서 이뤄지는 실내 곡의 뉘앙스.

당장이라도 ‘할렐루야’를 외칠 것만 같은 강렬한 선율을 정제하고, 보다 간결하고 가벼운 선율을 장식해야 한다.

마치 성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 행진곡이 펼쳐져도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도록.

웅장함이 덜어진 부분에는 직관적인 선율을 넣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곡을 감상할 수 있게끔 만든다.

‘교황의 이미지를 살리되, 과하지 않도록.’

생각이 자리 잡자 순식간에 머릿속에 악보가 차오른다.

이전에도 원곡을 바꿔 새로운 곡을 창작한 적이 있으니까.

<죽음>과 <조우> 또한 원곡을 바탕으로 재해석하고, 선율을 재탄생해서 만들어낸 곡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앞선 두 곡이 나무를 재단하기 위해 가위를 들었다면, 이번에는 정원 전체를 가꾸는 분위기.

마치 SF 영화의 홀로그램처럼 머릿속에서 이미지가 떠오른다.

존재만으로도 신성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성당의 이미지 대신, 보다 자유롭게 사람들이 거니는 베드로 광장의 분위기를 넣는다.

또한 오르간과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향연을 조금씩 약화시키고 피아노에서 퍼뜨릴 수 있는 수많은 화음을 집어넣는다.

어디까지나 이 곡은 행진곡이기에.

과열된 신성함을 빼되, 교황의 위치를 떨어뜨려선 안 된다.

기존의 행진곡들에서 모티브를 따오되, 직관적인 선율들로 풍성함을 채운다.

가상의 오선지를 떠올리는 능력에 더불어 연주와 상상만으로 상황이 펼쳐지는 능력.

신비한 힘에 더해 곡을 재단하기 위한 손길이 더욱 바빠진다.

***

‘이건 대박이야!’

샬롯은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본래 이안에 대한 기대는 있었다.

워낙 독보적인 행보를 이어갔던 인물 아닌가.

연주회를 하나 한다고 해도 작곡하는 모습, 무대를 탐색하는 모습, 등 존재만으로도 여러 에피소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오케스트라 창단이라는 생각까지 가진 인물이었기에.

이보다 더한 소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에피소드를 가져올 줄이야.

‘교황의 곡을 신자가 아닌 사람이 만드는 것은 처음일 텐데.’

교황과 만남을 가진 것만으로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소식일 터.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교황이 곡을 의뢰했다는 소식에 샬롯마저 두근거림을 멈출 수 없었다.

게다가 교황청의 허가를 받아 방송팀까지 바티칸에 입성할 정도였으니.

철옹성 같던 교황청이 문을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것이었다.

‘게다가 사도궁에 연습실을 마련해줄 줄이야.’

교황이 직접 직무를 펼치는 공간.

계단 몇 개만 올라가면 교황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테러의 위험에서 교황을 지키고자 사도궁은 좀처럼 문을 열지 않는 것이 관행.

이안에게 주어진 예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덕에 샬롯도 사도궁으로 들어와 이안의 모습을 촬영할 수 있었지.

자신도 처음 들어오는 공간에 떨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건만.

들어오자마자 피아노와 악보를 살폈던 이안의 모습은 대단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와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연주를 이어가지 않았던가.

게다가…

‘벌써 며칠째지?’

오늘로 촬영 3일째.

그 사이 이안이 한 것은 교황청에서 받은 악보를 답습하는 것이었다.

분명 무교에 바티칸에 온 적도 없을 터인데, 이안은 악보를 두고 곧장 연주를 펼쳤다.

‘연습’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도 이안의 연주는 시작부터 완성에 가까웠다.

‘보통 기존의 거장들은 자신의 창작물을 만들 때 자신에게 집중하는 편인데…’

샬롯은 그동안 ‘더 마스터’를 진행하며 숱한 거장을 만났다.

이미 거장의 반열에 접어들고, 자신의 스타일이 확고해진 사람들.

그렇기에 대부분 거장들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때, 다른 것을 참고하지 않는 편이었다.

일부는 자존심의 문제로, 일부는 행여나 모를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어떤 이유로 문제가 발생하면, 잘잘못을 떠나 대부분의 화살이 유명인인 거장에게 향하곤 했으니까.

온전히 자신의 것을 만들고자 다른 색채가 들어갈 여지를 주지 않는 것.

그것이 그동안 그녀가 만났던 거장들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기존의 곡만 3일 동안 반복하며 연주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안의 모습을 직접 바라보는 샬롯은 그사이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같은 곡을 수없이 반복하면 지루할 만도 하거늘.

기존의 곡을 탐색하며 특이점을 살리는 것인지 이안의 연주는 들을 때마다 발전하고, 풍부해졌다.

‘곡을 연구하는 것 같아.’

마치 초심을 잃지 않은 대가를 보는 것처럼.

연주할 때마다 신중을 기하는 모습은 이안이 왜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되었는지 증명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거장의 아우라가 점점 커져 갈 무렵.

3일째 되는 날부터 다른 선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지?!’

음악을 정통하지 않은 샬롯이지만, 그동안 연주와 다르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이안이 연주했던 곡들은 듣는 것만으로도 웅장한 기색이 터져나가고, 방을 가득 울릴 정도로 강렬했다면.

이번에 연주하는 곡은 웅장한 기색은 여전했지만, 터지듯 강렬하진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연한 선율이 채우며 더욱 간결한 화음이 섞여들어 갔다.

웅장함과 경쾌함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잡은 듯한 음색.

듣는 것만으로 무언가 태동하는 묘한 기류가 일렁였다.

하지만 이내 샬롯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악보를 쓰는 건 본 적이 없는데…?’

‘더 마스터’는 출연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방송.

이안 또한 예외는 없었다.

사생활이 지켜지는 선에서 밀착취재를 해왔거늘.

하지만, 3일간 이안의 일상은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아침 일찍 사도궁에서 연주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 잠을 청하는 것의 연속이었다.

악보를 작성할 시간은 사실상 없었던 것.

만약 잠을 아껴서 악보를 썼다 하더라도, 연주를 하는 지금 이 순간 악보가 올려져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피아노 악보대에는 기존의 악보만 있을 뿐, 다른 악보는 없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설마 지금… 바로 연주를…?’

샬롯의 머릿속에 이안에 대한 평론이 하나 기억났다.

음악을 보이게 하는 것처럼 연주하는 실력이라고.

평론가 특유의 미사여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안의 모습은 평론가의 말과 일치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고 연주하는 것처럼.

샬롯은 애써 경악성을 참으며 귓가에 울리는 곡을 감상했다.

스으윽.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주에 방해가 되지 않게끔 아주 천천히.

워낙 미세한 소리라 샬롯이 문 근처에 있지 않았더라면 듣지 못할 정도였다.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린 샬롯은 깜짝 놀랐다.

뜻밖의 손님이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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