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처음은 호기심이었다.
<평안>의 독특한 선율로 자신의 귀를 매료시킨 것은 물론, 피드백만으로 한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뒤바꿀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
마치 마법과도 같은 일을 이뤄낸 이안이 행진곡을 어떻게 바꿔낼지.
항상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던 스미스 교황도 이번 일만 생각하면 들뜬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자주 듣고 싶어 사도궁에 연습실도 마련했건만…’
안타깝게도 교황의 일상은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게다가 며칠 후 부활절이지 않은가.
로마 가톨릭에서 성탄절만큼이나 중요시 생각하는 부활절.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축일이기에, 교황청은 그 어느 때보다 바빴다.
스미스 교황도 축일 미사 때 이야기할 연설문을 작성하느라 일주일을 꼬박 쉬지 못했다.
겨우 오늘이 되어서야 1차 원고를 만들 수 있었고, 조금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안씨는 잘 되어 가고 있으려나?’
몸은 피곤에 절어 녹초가 되었지만, 황금 같은 기회를 포기할 순 없었다.
오늘이 지나면 원고 수정에, 부활절 일정을 조율하고, 끊임없이 일정이 몰아치기에.
교황은 몸을 이끌고 1층으로 향했다.
1층 복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이안의 연습실.
복도에 들어설 때부터 은은한 선율이 느껴졌다.
마치 자신을 인도하듯 펼쳐지는 소리에 교황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연습실 문으로 다가갈수록 소리는 더욱 커졌고, 덩달아 스미스 교황의 심장도 더욱 큰 박동을 보내왔다.
문 앞에 도달한 스미스 교황은 노크를 하려다 손을 멈췄다.
노크 소리에 이안이 연주를 그만두지 않길 바랐기에.
교황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게 문고리를 조심스레 돌렸다.
“안녕하세요 교황님!”
스미스를 먼저 반긴 것은 샬롯이었다.
샬롯 또한 이안의 연주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안씨를 불러드릴게요.”
샬롯이 이안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스미스 교황은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지금 자신이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리면 연주가 끊길 테니까.
자신은 그저 연습 도중에 몰래 들어온 불청객이거늘.
손님으로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교황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이안을 바라봤다.
피아니스트 이안에 대한 배려이자, 이안의 연주를 감상하고 싶다는 마음이 동시에 일렁였다.
차분하게 연주를 감상하려 했건만.
연주를 듣던 스미스 교황의 눈이 점점 커졌다.
‘벌써 곡을 만든 것인가!’
주교와 추기경, 교황에 오르기까지 음악을 놓지 않았던 그였기에.
과거부터 이어져온 행진곡을 모두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릿속에 곡들을 떠올려도, 이안이 연주하는 행진곡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오는 답은 하나.
지금 이안이 연주하는 곡은 자작곡이라는 뜻이었다.
연습실에 입성한 지 단 3일 만에 곡을 만들어냈다는 것에 스미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완성도도 무척 높지 않은가.
‘인간의 발걸음을 보는 것 같은 기분.’
행진곡.
말 그대로 행진할 때 사용되는 반주용 음악이었다.
특히 교황이 행진할 때 울려 퍼지는 행진곡은 오르간과 숱한 현악기들의 향연이 들어가 더욱 웅장하고, 신성한 면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안이 연주하는 것은 조금 달랐다.
피아노 선율 하나만으로도 웅장함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 스미스 교황이 추구했던 간결한 멜로디가 들어가 있었다.
마치 신성시되는 교황의 묵직한 발걸음이 아닌, 그저 똑같은 인간으로서 걸어가는 것처럼.
교황은 단기간에 원하는 이미지를 곡에 녹여낸 것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스미스 교황을 놀라게 한 것은 하나 더 있었다.
‘가벼워졌음에도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다니.’
대부분 성당에서 사용되는 곡은 파이프 오르간의 선율과 성악가들의 목소리가 덧대어져 무척 장엄한 것이 특징이다.
행진곡도 마찬가지.
가톨릭 최고 권위자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장엄한 선율을 더욱 웅장하게 펼치곤 했다.
숱한 악기들을 활용하는 대신, 피아노만 사용한다면 곡의 풍성함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지사.
한 사람이 목소리를 내는 것과 열 사람이 목소리를 내는 것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안의 연주는 가벼워졌다는 생각만 들 뿐, 이전보다 부족하거나 빈약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도리어 묵묵히 걸어가는 청년을 떠올리게 하는 선율에 교황은 감탄 어린 눈빛을 보냈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이지?’
아무리 고민해봐도 스미스 교황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그의 머릿속에 감도는 생각은 단 하나.
이안의 연주는 멈추기 싫을 정도로 좋았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끝내 연주를 마친 이안이 뒤를 돌아봤을 때, 교황과 샬롯은 절로 박수가 나왔다.
교황의 얼굴에서 곡이 벅참과 함께 곡이 끝났다는 아쉬움이 함께 묻어났다.
“정말 좋았습니다. 이안씨. 훌륭한 곡을 만들어주었어요.”
교황은 자신의 감상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당장 손색이 행진곡으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샬롯도 그에 긍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안이 툭 내뱉는 말에 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직 초안일 뿐입니다. 많이 부족하지요?”
교황은 겸손인지 진심인지 모를 이안의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듣는 것만으로 머릿속에서 아기천사가 튀어나와 팡파르를 부는 듯한 기분이었는데.
완성의 정도를 떠나 연주 자체가 좋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전혀 부족하지 않다고, 너무 좋았다고 말하면서 교황의 머릿속엔 오묘한 기색이 더해졌다.
‘이것이 초안이라면 대체 완성본은 어떤 느낌일까?’
연습실로 향할 때 느꼈던 호기심보다 더욱 커다란 호기심이 일렁였다.
이보다 풍성한데 간결한 선율이 있을 수 있을까.
불가능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안이라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에 교황이 기대 어린 시선을 보냈다.
***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교황의 행진곡을 재단하는 과정.
새롭게 떠오른 이미지들을 곡에 녹이고, 녹아든 이미지가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떠오른다.
마지막에는 전체적인 그림을 둘러보며 완벽한지 확인하는 작업까지.
어느덧 내일이면 행진곡을 올릴 시간이었다.
초안을 들은 스미스 교황이 이대로도 좋다며, 마침 행진곡을 펼칠 무대가 있는데 괜찮겠냐며 의견을 물었지.
교황의 제의에 되레 놀라워하던 것은 샬롯이었다.
“부활절에서 교황님의 행진곡을 발표하다니! 이것보다 더한 에피소드는 없을 겁니다!”
CP로서 이보다 좋은 연출은 없을 것이라며.
교황이 나가고 나서야 흥분된 기색을 내놓았지.
무교인 나에게는 부활절 달걀을 나누는 종교 행사 정도로 느껴지겠지만, 가톨릭교도들에겐 아니었다.
가톨릭에서 부활절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한 성탄절만큼이나 거대한 행사.
샬롯이 부활절 사진이라며 보여준 화면에는 넓디넓은 성 베드로 광장에 사람이 가득 몰려있었다.
발 디딜 틈 없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
그 수는 2002년 서울 시청을 붉게 물들였던 붉은악마의 인파와 흡사할 정도였다.
다르다면 성 베드로 성당의 넓이가 서울 시청의 4배가량 된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많은 이들에게 연주를 펼칠 수 있겠지.’
샬롯의 말에 따르면, 부활절 행사는 단순한 축일 그 이상이었다.
로마에 거주하는 가톨릭교도뿐만 아니라, 근거리의 해외에서도 찾아올 정도로 거대한 행사라고.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바티칸을 관광하러 온 사람들이 가장 몰리는 시기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더욱 곡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곡은 가톨릭교도가 아닌 사람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곡이니까.
독보적인 행진이 아닌, 다른 이들과 함께 걸어가길 원했던 스미스 교황.
그를 닮은 선율이 머릿속에서 그림처럼 그려진다.
‘시작은 안단테.’
Andante.
천천히 걷는 걸음걸이 정도 되는 빠르기로 곡이 시작된다.
처음은 한 사람의 걸음걸이를 표현하듯 간결하게.
모두에게 익숙한 C장조의 선율을 시작으로 머릿속에 스미스 교황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치 스미스 교황의 평소 모습을 떠올리듯.’
곡을 준비하면서 내가 본 것은 기존 행진곡뿐만이 아니었다.
사도궁을 오가며 봐온 스미스 교황의 모습들.
평소 교황의 모습은 그가 일전에 자신을 한낱 목자라고 표현했던 것이 진심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사도궁에 마련된 관저도 마다하고, 주교 때부터 살아온 임대 아파트에서 출근하는 교황.
교황은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모닝커피를 즐기고, 식사를 마친 후 사람들과 티타임을 가지는 것을 좋아했다.
교황청에 있는 사람 모두를 직함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주는 섬세한 사람.
그러한 태도를 보인 덕에 사람들은 그가 ‘교황이라서’가 아니라 ‘스미스라서’ 따르는 듯 보였다.
그 부분이 이번 행진곡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다.
‘혼자가 아닌, 함께 나아가는 교황.’
내 의지를 반영한 듯, 곡이 나아감에 따라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십자가를 이고 나아가는 고행의 길.
홀로 가기엔 외롭고, 아픈 길이지만, 스미스 교황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따라 함께 길을 나선 수많은 교도들과 사람들이 있기에.
스미스의 행진은 거룩하면서도 소탈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마치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처럼.
그 발걸음을 형상화한 선율이 연습실을 가득 메웠다.
마지막 음표를 누름과 동시에 완성된 풍경 한 폭이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열 번째 자작곡이자 행진곡.
<동행>이 완성되었다.
***
며칠 뒤.
“최고의 그림이 나올 것 같습니다.”
짐을 싸던 샬롯이 당당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녀의 반응에 현철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표를 던졌다.
부활절 무대는 그야말로 ‘대박’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 모자람이 없었으니까.
‘그 숫자를 보고도 떨지 않더니.’
현철은 부활절 행사를 회상했다.
감히 숫자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꽉 찼던 기억.
대한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로 살아오면서도 처음 보는 인파였다.
마치 추수철에 벼가 한가득 자라난 것처럼.
빽빽하게 모인 사람들에 현철마저 몸에 묘한 떨림을 일으켰었다.
그럼에도 이안은 개의치 않다는 듯, 신호에 맞춰 연주를 시작했다.
‘C장조로 시작하는 정직한 음색.’
처음 행진곡이 울렸을 때.
사람들은 무척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교황이 나올 때는 오르간과 성악가들의 목소리가 어우러진 장엄한 행진곡이 펼쳐졌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단 한 사람.
이안의 피아노 독주로 교황의 행진을 장식했다.
‘하지만, 혼자서 펼치는 연주여도 충분히 훌륭했다.’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연주.
마치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연상케 하는 선율이 매끄럽게 흘러갔지.
이내 곡에 화음이 덧입혀지며 이전과 같은 웅장함이 감돌자 사람들은 평소처럼 부활절 미사를 진행했다.
스미스 교황이 이안에게 공을 돌리면서 터져 나온 박수 소리는 지금껏 들은 박수 소리들 중 가장 컸었지.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샬롯이 넌지시 향후 일정을 물었다.
이제 ‘더 마스터’의 촬영도 종료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오케스트라 창단을 준비해야 하리라.
이미 현철은 이안이 행진곡을 작곡하는 동안 여러 준비를 해놓았다.
홍보 자료를 만드는 것은 물론, 홍보 자료를 돌릴 업체들도 일부 알아놓았다.
현철의 이야기를 듣던 샬롯은 놀라운 진행력이라면서 칭찬하면서도 묘한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은 이어질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안씨의 창단 일대기도 저희 ‘더 마스터’와 함께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본래 촬영은 끝났지만, 추가로 더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1부가 교황의 행진곡을 작곡하는 것이었다면, 2부로 이안의 오케스트라 창단기를 담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동안의 놀라운 행보를 보면 이안을 재차 캐스팅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며.
10년가량 업계를 주름잡았던 샬롯은 이안을 보면 느낌이 무척 좋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안이 있다면 열 명의 거장이 들려줄 이야기를 한꺼번에 보여줄 것이라며.
이번 일을 강하게 추진하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저희에게도 좋은 제안인 것 같군요. 이안이에게 전달해두도록 하겠습니다.”
현철 또한 좋은 생각이라 생각했다.
창단 일대기를 촬영하고, 오케스트라를 창단한 이후에 발표한다면, 이안의 오케스트라를 홍보하는데 큰 이점으로 작용할 테니까.
일대기를 촬영한다면 이안이 어떤 생각을 하고, 오케스트라에 어떤 음악을 연주할 것인지 토론하는 장면이 나오겠지.
그 자체만으로도 오케스트라 연주회의 예고편이나 다름없었다.
프로그램을 보는 것만으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연주회에 대한 홍보를 할 수 있다.
‘더 마스터’는 세계에 서비스되는 프로그램이니까, 어떤 홍보 시스템보다 큰 효과를 만들 수 있으리라.
허나, 매니저인 현철 스스로 일을 진행시킬 순 없는 일.
마지막 선택은 이안에게 달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