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근 한 달 반 만에 돌아오는 집이었다.
리스트 콩쿨을 위한 네덜란드행에 이어, 로마행까지.
연이어 일정을 소화하느라 이제야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선물들이었다.
‘벌써 이렇게 쌓였네.’
유튜브를 시작할 때부터 어떻게 알았는지 팬들이 몇 가지 선물을 보내곤 했다.
과자와 같은 먹거리를 시작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인형이나, 손수 쓴 편지들.
거기에 비엔나 하르모니아 음반사와 음반 계약을 체결한 이후, 선물의 양은 더욱 많아졌다.
음반 공개를 기점으로 팬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 음반사를 통해 해외 팬들의 선물까지 추가된 것이다.
그 덕에 나는 ‘산더미’라는 표현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각국의 특색이 드러나는 간식거리와 외국에서 유명한 캐릭터 인형, 직접 그렸다며 보낸 내 캐리커처까지.
각양각색의 선물들을 살피던 중, 한 물건이 내 눈길을 더욱 사로잡았다.
‘웬 스프링노트?’
손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스프링노트 한 권.
하얗게 칠이 된 스프링은 칠이 벗겨져 있었고, 밝은 노란색 표지는 몇 번이고 손을 댔는지 바래져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피아니스트로서 첫 콩쿨 우승, 동서 콩쿨 우승에 대한 기사가 보였다.
그제야 이 스프링노트가 단순한 노트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스크랩북.
피아니스트로 살아온 1년간의 행적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었다.
청악 콩쿨 우승자, 박이안. 이번에는 독주회를 펼쳐…
카타리네 스튜디오, 박이안 피아니스트와 협업 준비 중. 한국인 최초로 시도되는 일…
박이안의 연주에 독일이 감동하다. 비엔나 필하모닉. 이안을 벤치마킹하겠다고 선언.
박이안 독주회, 전체 자작곡으로 진행되어 평론계가 떠들썩, ‘제2의 베토벤’ 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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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있었던 콩쿨을 시작으로 지금껏 해온 일들에 대한 기사가 잔뜩 있었다.
내 이름과 평론을 형광펜으로 칠할 정도의 세심함.
게다가 최신 뉴스까지 들어 있었다.
스미스 교황, 피아노 독주로 이뤄진 행진곡으로 등장하여 화제.
박이안 피아니스트, “행진곡 <동행>은 스미스 교황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
교황청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기사들.
언론에서도 무척 이례적인 일이라며 대서특필했다.
그동안 폐쇄적인 성향을 가졌던 교황청인 만큼, 대중 친화적인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행사였다고 평이 이어졌지.
게다가 교황청을 시작으로 행사에 참가했던 가톨릭교도들도 <동행>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내비쳐 화제였다.
보통 교황을 낮잡아보는 시선에 격노하는 교도들이었기에.
불만이 거의 없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놀랍다는 언론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스미스 교황도 후폭풍이 없진 않을 거라며 걱정했었는데, 도리어 교도들부터 좋은 평가를 주어 다행이라고 했지.
“교황님의 은덕 덕분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떠오르는 이안씨의 작곡 능력 덕분입니다.”
스미스 교황의 미소가 여전히 생생하다.
교황의 행실 덕에 부작용이 덜한 것 아니겠냐는 말에 그는 도리어 나를 치켜세웠다.
이러한 곡을 들을 수 있게 해주어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언젠가 이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게끔 노력하겠다고 덧붙였지.
스미스와의 일을 떠올리던 나는 문득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이 소식을 벌써 스크랩해서 보냈다고?’
기사를 보던 중 나는 이상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스크랩북을 만드는 일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불과 며칠 전에 나온 기사를 스크랩하고, 그것을 우리 집으로 보내기까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팬의 선물이라기엔 시간이 맞지 않았다.
택배가 하루 만에 오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수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박이안 피아니스트 1호 팬 박수철 드림.
‘…?’
“네 아버지가 뭐 하나에 꽂히면 저러기 일쑤였다.”
옆에서 내 모습을 지켜보던 큰아버지가 설명을 곁들였다.
피아노를 배울 때도 그랬듯, 하나에 집중하면 못 말릴 정도였다고.
큰아버지에겐 익숙한 일이라는 말에 나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아버지께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나는 곧바로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혹시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됐어요?”
“이미 해놨다.”
큰아버지는 곧장 서류 뭉치를 건넸다.
그동안 대학에서 온 강연 요청들.
내가 서류를 요청함과 동시에 큰아버지도 같은 생각을 했다고 덧붙였다.
“대학 강연을 통해서 홍보를 겸하려고 하는 거지?”
큰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스트라 창단을 위해서라면 우선 인원을 모집하는 것이 가장 먼저겠지.
단순히 인원을 모집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수한 인재들이 내 오케스트라 창단 소식을 알게 되는 것이 중요했다.
대학교라면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음악에 관심이 많은 인재들이 모이는 곳일 터.
그들에게 직접 홍보하는 것이 오케스트라 창단의 첫 단계였다.
***
오랜만에 발걸음이 한국대로 향했다.
내가 2학년을 다니다 그만둔 학교.
그와 동시에 가장 먼저 내게 강연 요청을 보낸 학교이기도 했다.
국내 최고의 음대가 있는 한국대를 시작으로 일본, 독일 등 각국에서 강연 요청을 한 학교를 순방하며 대학 강연을 펼칠 예정이었다.
음대를 다닐 정도라면 음악에 어느 정도 재능이 있다는 말.
거기다 초청 강연에 참여할 정도라면 내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그만큼 음악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다는 뜻.
어느 쪽이어도 오케스트라 창단을 준비하는 나에겐 좋은 기회였다.
보다 많은 사람, 우수한 인재에게 오케스트라 창단 홍보를 할 수 있으니까.
“오랜만에 뵙네요.”
강연에 앞서 가장 먼저 찾아온 곳은 학장실이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건만.
학장실은 자퇴 서류를 내밀었을 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여전히 가구는 제 색을 잃지 않았고, 책상 위에 있는 자개 명패도 반짝였다.
한국대 음악대 학장, 이호창.
여전히 잔망스런 눈빛을 가진 학장님이 나를 바라봤다.
“강연 요청한 지 반년 가까이 됐는데 이제 와서?”
“그럼 도로 갈까요?”
아니, 아니!
너스레에 맞대응을 하자 학장님이 손사래를 치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 한 마디도 지려고 하지 않냐며.
큰아버지와 아버지도 그러더니, 나까지 그렇다며 가족 내력은 못 말린다고 농담스레 말을 이었다.
“아예 고정 교수는 어떠냐? 현철이는 끝까지 안 한다고… 어휴.”
학장님이 장난스레 궁시렁거렸다.
교수보다 학장과 친해지기 쉽다는 소문을 여전히 잘 지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학장님인데도, 엄숙한 분위기보다는 도란도란 이야기가 이어졌다.
교수할 생각은 없냐는 질문을 시작으로, 나라 말고 학교에도 헌정곡 하나 줄 수 없겠냐는 부탁까지.
내가 나서서 한국대 좋다는 한마디만 하면 입학률이 엄청 뛸 것이라며 홍보를 부탁하는 뉘앙스의 농담도 던졌다.
다음에 좋은 학교라고 소개하겠다는 말에 학장님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올라갔다.
차근히 농담과 근황을 묻는 질문을 이어가던 중.
본격적인 강연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행여나 학생들한테 헛바람 넣고, 애들 자퇴하게 하면 안 된다? 자퇴가 더 큰 책임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은 선배된 도리로 알려줘야 될 거 아니냐.”
농담투 같은 이야기로 시작된 강연에 대한 이야기.
늘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학장님도 이번만큼은 진지한 기색을 내비쳤다.
큰아버지와 함께 줄리어드를 졸업한 실력자이기에.
음악에 대한 생각도 남달랐다.
피아노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인지, 아니면 음악 자체에 대한 것을 주제로 삼을 것인지.
상세한 예시까지 들어가며 이야기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예술가였다.
나는 학장님의 질문에 짧은 답변을 건넸다.
“음악으로 이야기해야겠죠?”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듣기만 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것이 확실하다는 말이 있듯.
그동안 내가 전달하고픈 이야기들은 모두 음악으로 하지 않았던가.
<평안>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참혹한 전쟁과 평화의 이미지도, <동행>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스미스 교황의 이미지도.
백 마디 말보다 연주로, 음악으로 보여주겠다는 생각이었다.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남긴 거장들도, 자신들의 말이 아닌 음악들로 증명했듯.
나 또한 그들처럼 음악으로 내 의사를 전달하겠다는 생각.
학장님도 내 의견에 동감하는 듯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맞지.”
평소에 갖은 말을 붙이던 학장님도 이번에는 큰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내 의견이 맞다는 짤막한 대답이 전부.
하지만, 그의 말에 실린 무게감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
한없이 가볍다가도 순식간에 진지해지는 것은 물론, 언행에 무게감마저 남다르다.
평소에는 친구보다 더욱 친근한 모습에서, 지금은 그 어느 예술가보다 철학이 담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손을 모은 채 턱을 괴는 모습만으로도 전문가의 이미지가 그려지는 자태에.
나는 그가 학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지 얼핏 알 것 같았다.
***
짝짝짝짝
강당에 들어서자마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저녁이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도, 강당을 가득 메운 학생들.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아는 얼굴도 적지 않았다.
강당 한편에서 박수를 보내는 우식을 시작으로, 합주 강의 때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쳤던 차교수님.
이외에 얼굴은 알고 지냈던 기악과 교수님과 학생들이 몇몇 보였다.
‘자리가 바뀌었네.’
사람들을 바라보니 1년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예전에는 내가 학생들의 자리에 앉아 초빙 교수의 강의를 듣고 메모하고 했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반대가 된 상태니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할 일은 내가 보았던 교수들처럼 제대로 된 강의를 펼치는 것이겠지.
“안녕하십니까. 피아니스트, 박이안입니다.”
우와아아아아!!!
내가 인사를 건넴과 동시에 박수와 더불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특히 기악과 새내기로 보이는 학생들이 마치 연예인이라도 본 듯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한 반응이 마치 전염되듯.
강당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학생회와 교수들도 이러한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듯, 서로 불안한 눈빛만 교환했다.
대학은 여타 학교처럼 호통을 치고, 조용히 시키는 분위기가 아니니까.
‘타이밍을 놓쳤네.’
적당히 소리가 줄어들었을 때 제지했어야 조용해졌을 터.
하지만, 그 타이밍조차 잡지 못해 과열된 박수 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
사람들을 찬찬히 살피던 나는 그대로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피아노의 뚜껑을 연 나는 곧바로 건반에 손가락을 내질렀다.
둥–
강하게 누른 탓에 더욱 선명하고 강렬한 선율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내가 건반을 누름과 동시에 박수로 가득했던 강당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마치 앞으로의 연주를 기대하는 듯.
사람들의 표정에서 기대감이 잔뜩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연주를 하려고 피아노를 누른 것이 아니었다.
한 가지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었지.
“방금 제가 누른 건반. 무슨 화음인지 아는 사람 있나요?”
내 질문에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답은 무척 쉬웠다.
C코드, 도미솔.
피아노를 떠나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졸지 않았더라면 모를 리가 없는 화음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표정은 골똘하다 못해 심각함이 묻어나왔다.
그렇게 쉬운 문제를 내가 냈겠냐며 의심하는 눈치.
분명 무언가 다른 뜻이 숨어있을 것이라는 생각하는 듯, 강당은 한 치의 수군거림도 없이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