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C코드. 너무 쉬운 문제였나요? 그럼… 이건요?”
첫 화음에 대한 답을 알려준 후, 나는 몇 번 더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두 번째 질문 이후로는 사람들이 곧장 손을 들었다.
음대 1학년이라도 곧장 대답이 나올 정도로 쉬운 코드들이었으니까.
C코드를 시작으로 G코드, F코드, 등.
도미솔, 솔시레, 파라도, 등 어렸을 때 피아노 학원만 다녔어도 곧장 답이 튀어나올 법한 화음이었다.
당연하게도, 이 질문들로 수준을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에 초석을 가꾼 것일 뿐.
“물론 모든 명곡들이 이런 기초적인 코드로 시작하는 건 아닐 겁니다.”
나는 천천히 본론을 꺼내 들었다.
숱한 거장들의 명곡들을 재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오선지에 적힌 음표들을 따라가기도 바쁜데, 그 속에 셈여림과 지시표를 모두 지켜가는 것이 어렵지 않냐는 질문에 대부분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초기에 그랬으니까.
악보가 머릿속에 훤히 보여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결국 셈여림과 지시표에서 나왔다.
어디에서 음을 여리게 하고, 강하게 하고.
시작을 빠르게 하는지, 느릿하게 하는지에 따라 곡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문제는 그것을 교과서적으로 지키려는 바람에 연주가 기계처럼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제가 바이올린을 놓은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제 연주가 기계처럼 단순했기 때문이었죠.”
악보를 그대로 따라 하려는 습성.
그것이 최고라고 믿었기에 펼쳤던 오점이었다.
그러나 전생을 떠올리고, 가상의 오선지가 펼쳐지는 순간부터 내 음악 인생은 달라졌다.
전생의 기억에 힘입어 연주를 펼치고, 새로운 배움을 얻어가는 시간 동안 깨달은 바가 하나 있었다.
악보는 그저 수단일 뿐, 곡 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음악이 어려운 이유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나 여러분 같은 음악가는 그 음악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음악을 봐야 한다는 말에 다수의 학생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 정도.
손을 든 학생을 가리키자 그가 질문을 건넸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보이게 느끼나요?”
“보이게끔 만들어야죠. 뉴턴은 보이지 않는 중력을 사과로 증명해내지 않았습니까?”
만유인력의 법칙을 만들어낸 뉴턴.
중력을 음악에 빗대 표현하자면, 나에게 사과는 연주일 것이다.
뉴턴이 ‘떨어진다’라는 개념을 사과로써 정립하였듯.
나는 보이지 않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연주로 보여준다.
내 답변에 사람들이 어느 정도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 힘입어 나는 하려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곡에 존재하는 해석과 분위기.
실제 볼 수는 없지만, 몸으로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한 이야기들을 관찰하고 몸소 느끼는 것이 음악을 진정 시작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가 쓴 <환생>을 예로 들어보죠.”
이야기를 꺼냄과 동시에 전생의 기억이 가진 <환생>의 정보가 흘러들어온다.
전생이 제대로 된 뜻을 펼칠 수 없었던 슬픔과, 피아노를 마주했을 때 환희를 표현한 곡.
거기에 나는 나의 생각을 녹여내었다.
바이올린에 대한 뜻을 잃어버렸던 슬픔과,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 환희.
모두 보이지 않는 경험과 기억이지만, 연주에는 고스란히 묻어난다.
나 또한 악보를 떠올리는 것에 그쳤다가 그때 이후로 마치 감성 곡선을 보듯, 마디에 흐르는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곡에 담긴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 감정을 스케치하듯 표현해야 합니다.”
이어서 나는 <환상>과 <추격>을 만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미우의 콘티에 따라 선율을 펼쳤던 기억.
콘티에 자극을 받아 더욱 뚜렷한 이미지를 그리겠다는 마음에 머릿속에서 그림이 형상화되지 않았던가.
마치 <환생>을 썼을 때 느꼈던 감정 곡선이 선으로 표현되어 <환상>의 밑그림을 그리듯.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내가 원하는 <환상>의 그림을 스케치하는 것만으로도 표현력의 격차는 벌어졌다.
“스케치를 끝낸 다음 과정은 색을 입히는 작업입니다.”
다음은 그 스케치에 색을 덧댈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에서 떠올린 악상, <영감>.
곡의 이미지를 그려나갈 때 무채색이었던 것들이 <영감>을 기점으로 색이 더해졌었지.
마치 사람의 표정들에 혈색까지 표현하려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기듯.
기대감에 상기된 얼굴과 놀라움에 하얗게 질린 얼굴, 등을 표현했었다.
아마 그 과정이 없었더라면 <평안>을 만드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으리라.
“그렇게 제대로 완성된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 만든 곡이 <평안>이었습니다.”
전생의 기억이 가진 전쟁의 처참함과, 내 기억에 존재하는 평화로운 나날들.
시작은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이야기와 기억을 곡에 녹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처참한 전쟁의 현장에서 느꼈을 공포감, 슬픔, 절망감.
평면에 불과한 그림을 보고도 여러 심상이 떠오르듯, 곡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러한 사람들의 심리가 느껴져야 한다.
그 세심한 심리들을 선율로 담아내기 위해 내 손은 그때부터 붓을 잡은 화가처럼 미세한 컨트롤로 곡의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현재, 마지막이 아닌 지금 나의 현 위치.
“저는 요즘 곡을 연주할 때, 숲을 본다는 생각으로 곡을 바라봅니다.”
<동행>을 만들며 느꼈던 감각들이 피어오른다.
지금도 머릿속으로 생각하면 <동행>의 모티브로 삼았던 수많은 행진곡들과 <동행>에 담긴 이야기가 홀로그램처럼 떠오른다.
곡을 듣는 것만으로 상황이 영상 보듯 떠오르고, 마치 한 명의 시청자가 된 것처럼 바라볼 수 있는 상태.
과거에는 떠오르는 음표들을 리듬 게임 하듯 맞춰 나갔다면, 지금은 곡 전체의 흐름이 보이고, 당장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
새로운 방식의 해석을 모두가 납득할 수 있게끔 보여주는 고유의 표현력.
그것이 지금 나의 위치이자, 내가 가진 능력이었다.
“물론, 이것은 저만의 방식입니다. 제가 주입시킬 수 없겠죠. 다만, 제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어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 수 있다면, 그땐 누구보다 뛰어난 음악가가 될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진심이 담긴 마지막 말이었다.
내가 그랬듯, 누군가도 이 길을 따라올 수 있다면 분명 음악가로서 성공할 수 있으리라.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예술을 보이게끔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니까.
“저는 거기에 힘입어 저와 같은 음악을 할 단원을 모집할 생각입니다.”
본격적인 오케스트라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연주자를 모아 오케스트라를 만들 것이라고.
오케스트라 창단 소식에 사람들이 연이어 손을 들었다.
나는 그중 한 사람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별도의 오디션이 있나요?”
“네, 서류와 포트폴리오를 우선 평가하고, 통과한 분들에 한해 대면 오디션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오디션 과제를 우수하게 해내는 사람에게 오케스트라 입단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설명을 곁들였다.
과제 이야기에 사람들이 궁금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피아노로 다가갔다.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림과 동시에 강당은 고요해졌다.
마치 긴장 어린 시선으로 내 연주를 지켜보려는 듯.
타건이 시작되자 고요하던 강당이 커다랗게 울렸다.
G장조로 전개되는 밝은 선율.
기존에 내가 펼쳤던 화려한 곡들과는 달리 조금은 편안한 기색이 엿보이는 곡이다.
반복되는 선율과 일반적인 화음들의 조화.
대신 연주는 경쾌하게 퍼져나간다.
연주가 끝나자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새로운 곡을 들었다는 감상.
하지만, 이어진 말이 더해지자 학생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하얗게 질렸다.
“방금 연주한 곡에 자신만의 악기로 선율을 더하는 것. 그것이 저희 오케스트라 입단 과제입니다.”
***
‘예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본 듯이 하는 것’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스위스의 화가, ‘폴 클레’가 한 말이었다.
그림에 점, 선, 면, 공간의 결합이 사물을 만들어내고, 그 사물에는 인간의 근원적 진실이 담긴다고 했던가.
100년도 더 된 미술 거장이 하던 이야기가 22살 이안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현철은 묘한 깨달음에 눈을 끔뻑였다.
‘그림을 들여다보듯 연주한다고?’
처음 현철은 이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음악 강연을 하는데, 웬 뚱딴지같은 미술에 관한 이야기일까.
하지만, 강연이 이어질수록, 이안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현철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럼 그동안 연주에 풍성함이 남달랐던 것들이…’
현철은 그동안 이안이 선보였던 연주들을 고스란히 떠올렸다.
자신의 앞에서 <심포닉 에튀드>를 연주했을 때부터, 바티칸 베드로 성당 광장에서 <동행>을 연주했을 때까지.
처음에는 그저 표현력이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강세와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 더욱 분명한 선율을 만들어내는 능력.
이안의 아버지이자,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수철의 재능을 이어받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안의 연주는 수철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생동감 넘치는 연주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줬지.’
일본에서 펼친 연주들.
카타리네 스튜디오 OST를 연주할 때는 미우가 건넨 콘티를 답습하면서도, 이안의 심상이 물씬 들어간 듯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연주를 선보이지 않았던가.
월드 피아노 콩쿨에서 보여준 것은 또 어떻고.
춤곡의 스탭을 재현하는 듯한 리듬감.
전날, 마지막 연습까지 지켜봤음에도 이안의 연주는 현철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마치 퍼즐로 그림을 완성한 것에 자신만의 그림을 덧입혀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낸 것 같은 분위기였지.
그제야 현철의 머리에 전구가 켜진 듯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이 음악인가.’
수십년간 오케스트라를 이끌어온 마에스트로도 느끼지 못한 감각들.
현철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에는 동의하였으나, 그것을 그림 그리듯, 색을 넣는 듯, 완성된 작품을 감상하듯 멀리 놓고 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음악가에게 연주는 실전이지, 관망하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제아무리 다른 연주가의 연주를 보는 마에스트로도 느끼지 못한 온전히 곡을 보는 방법.
그것을 느꼈다는 생각에 현철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항해>
오케스트라 창단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곡이었다.
오케스트라는 한 명이 아닌 여러 사람들이 어우러져 소리를 내는 것이 특징이다.
만약 창립 멤버를 꾸린다면, 그 어우러지는 선율을 가장 잘 느낀 사람을 뽑아야 할 터.
그렇기에 만든 곡이 바로 <항해>였다.
시작은 승선한 사람들의 재잘거림을 나타내듯 트레몰로로 시작한다.
항해를 앞두고 들뜬 기색이 느껴지도록 G장조의 밝은 화음이 전체적으로 흐른다.
뒤이어 곡은 항해를 시작한 배를 묘사한다.
배 주변에는 하늘과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떠올리자, 자연스레 손가락이 넓은 화음을 천천히 진행시킨다.
멜로디를 최대한 배제하여.
마치 철썩이는 파도와 물소리만 최소한으로 표현하려는 듯, 연주를 이어간다.
‘이 위에 선율을 얹을 수 있도록.’
<항해>를 통해 내가 깐 배경.
이제 그 배경에 어떤 것을 넣을지는 참가자들의 선택에 달렸다.
만약 <항해>의 분위기를 느끼고, 바다와 같은 간결한 반주를 느꼈다면.
뒤이어 망망대해에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지, 바다로 향한 배가 무엇을 마주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참가자의 몫이었다.
그 부분을 어떻게 덧입히느냐가 이번 오디션 과제의 목표였다.
‘내 표현력을 이해하고 가장 흡사하게 펼칠 수 있는 사람.’
곡을 덧입히기 위해선 우선 내가 만든 곡의 분위기를 이해해야겠지.
그 해석을 하는 것이 첫 번째 관문이었다.
굳이 바다가 아니어도 좋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난다는 기대감과 어떤 것을 마주했는지 묘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뛰어난 인재리라.
애초에, 지난번 지현처럼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연주를 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테니까.
최근에 나선 리스트 콩쿨에서도 악보를 답습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그럼에도 선율에 이미지와 자신의 생각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단연 오케스트라 창립 멤버로 손색이 없겠지.
‘한국대에서도 실력자가 나오려나?’
이제 겨우 한 대학에 다녀온 것뿐이다.
앞으로 여러 대학을 다니며 소식을 전하고, 오디션 과제 곡을 발표할 예정.
유수의 대학교에서 뛰어난 인재들에게 내 곡과 생각을 전달하고, 그들은 내 곡을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덧입혀 건넨다.
오케스트라라면 응당 해야 하는 일들.
오디션부터 그 시작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묘한 전율이 일렁인다.
다음 대학에서는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강연을 펼쳐야 하기에.
막 다른 언어로 번역된 원고를 읽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노크를 하고 들어온 아버지가 걱정스런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이안아. 소식 들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