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선화는 음악실에 들어서자마자 옅은 탄성을 내뱉었다.
두 대의 그랜드피아노에 숱한 악기들, 거기다 벽 하나를 가득 채운 악보들까지.
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는 선화가 아닌 다른 누군가 와도 놀랄 만한 광경이었다.
“이곳이 박이안 피아니스트의 곡들이 탄생한 곳이군요.”
선화의 입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가 술술 튀어나왔다.
내가 간 이후로 관심이 가 더 많이 찾아보았다고.
특히, 강연에서 생각을 여지없이 펼치는 모습에서 더욱 기대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보이지 않는 예술을 보이게끔 느낀다는 이야기.
자신의 연주를 수묵화에 빗대어 표현하던 이유를 알게 된 대목이라고 했다.
이윽고 나와 선화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오케스트라에 대한 화제로 넘어갔다.
오케스트라 창단에 함께하면서 그녀 또한 오케스트라에 대해 공부를 한 모양이었다.
하나의 악기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소리를 만드는 곳.
다양한 악기의 향연이야말로 오케스트라가 가진 최대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매력이 뛰어나더라도, 혼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까.
현악기는 날카로우면서도 전진하는 음색을 내기에 좋고, 관악기는 특유의 울림으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기에 좋다.
두 선율을 합치면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욱 진전 있게 만들어 낼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그림을 사조로 확립하고, 더 많은 이들에게 퍼뜨리기에 안성맞춤이겠지.
“신생 오케스트라인 만큼, 새롭되 특색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습니다.”
여타 오케스트라는 오랜 전통을 무기 삼아 가지고 있다.
빈 필, 네덜란드 콘테르테, 등 모두 1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오케스트라였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들의 클래식 계보를 유지하며 이룰 수 있던 결과물.
신생 오케스트라를 준비하는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국악은 이미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충분히 기존의 오케스트라와 접목 할 수 있다고요.”
세계인들은 국악이라는 소재만으로도 신기하게 느끼리라.
한국인 특유의 한의 정서와 넋을 표현하는 국악이기에.
서양 악기로는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특유의 음색이 존재한다.
나 또한 선화의 연주로 느끼지 않았던가.
이미 뜯은 현을 누르고 놓고를 반복하는 기교는 서양 현악사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러한 아련한 음색을 활용한다면 누구도 만들지 못한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내 말을 차근히 듣던 선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매력적인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들에 모두 동감한다고.
특히, 국악을 음악으로 더욱 널리 퍼뜨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고 덧붙였다.
세계화.
많은 이들에게 국악을 알리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무대가 필요하다고 표현했다.
선화는 모든 악기들의 화합을 계획하고 있는 내 오케스트라라면 그러한 무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사뭇 신생 오케스트라가 하는 치기 어린 행동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내 연주와 자신의 연주를 평했던 모습에서 그러한 어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본격적으로 오케스트라에 함께할 의사를 밝힌 선화는 오디션에 관심을 보였다.
“오디션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제가 만든 곡의 1악장. 그 선율에 자신의 악기를 덧입히면 됩니다.”
한국대 강연과 온라인 강연에서 알렸던 <항해>의 1악장.
서류 심사를 통과한 사람들이 1악장의 선율에 소리를 더할 예정이었다.
설명을 듣던 선화는 무척 흥미로운 듯 입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국악원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정해진 곡을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나처럼 창작곡을 만들어 연주를 하는 것은 흔치 않은 경우라도 덧붙였다.
“그럼 한 번 들어볼까요?”
선화가 옅은 기대감을 보이며 말했다.
지난번 국악원에서 선화의 연주에 대해 답례하겠다고 한 것과 동시에, 앞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갈 동료로서 들려주는 음악.
나는 곧바로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쳤던 유려한 선율.
바다의 맑은 기색을 떠올리듯 밝은 소리가 음악실을 가득 메웠다.
반주 수준으로 옅은 선율의 연속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지 선화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1악장의 연주가 끝나자 그녀는 옅게 박수를 쳤다.
“저도 관심이 가는 선율이네요.”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표현한다는 것을 알겠다며.
무언가 전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연주라고 덧붙였다.
말을 이음과 동시에 선화는 등에 이고 온 긴 물체를 꺼내 들었다.
하얀 보자기에 둘러싸인 물건은 다름 아닌 가야금이었다.
둥–띠잉-
느슨하게 연결된 현이 독특한 음색을 내뱉는다.
<항해>에 덧댄 선율이 이어지자 내 머릿속에 오묘한 그림이 그려진다.
가느다란 선율은 마치 파도처럼 나아간다.
커다란 파도가 아닌, 잔물결을 이고 가는 파도.
하지만, 동시에 항해를 나선 뱃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다.
힘차게 가야금을 뜯는 손길에 일렁임이 일고, 그 일렁임이 고스란히 연주에 반영된다.
내가 그린 파도의 이미지를 답습하는 면모에 나도 자연스레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녀의 연주에 더해 <항해>의 이미지가 더욱 뚜렷해진다.
피아노와 가야금, 전혀 다르게 생긴,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음색이 나란히 음악실에 울려 퍼졌다.
***
빈 국제공항.
커다란 캐리어를 이끄는 여성이 비행기로 향했다.
이안의 오케스트라 창단 오디션을 위해 한국행을 택한 요한나.
그녀를 응원하듯 밝은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좌석에 앉은 요한나는 빈 필의 마에스트로와 만난 것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걱정이 됩니다.”
처음 요한나가 오디션 참가 의지를 밝혔을 때.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레오는 요한나에게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누구보다 이안을 좋아하고, 선망하는 레오였다.
오죽하면 이안의 연주는 ‘뉴 클래식’이며 빈 필하모닉도 앞으로의 클래식을 위해서라면 이안의 연주를 따라야 한다고 했겠는가.
하지만, 빼어난 연주가인 것과 오케스트라의 단장을 맡는 것은 천지 차이라고.
그 차이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박이안 피아니스트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네요.”
레오의 목소리에서 걱정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이미 존재하는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는 것과 새롭게 탄생하는 오케스트라의 창립 멤버가 되는 것은 다른 개념이었으니까.
특히 신생 오케스트라가 겪을 시행착오를 고스란히 요한나가 겪을 것이라는 걱정이 가득했다.
레오 또한 처음 빈 필의 마에스트로로 들어왔을 때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하지만, 요한나가 이안의 오케스트라에 들어간다면 그 수준을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새로운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의 태도는 크게 바뀌었다.
“한국 국악을 오케스트라에 접목한다라. 이안씨는 매번 저를 놀랍게 하더군요.”
요한나도 듣고 깜짝 놀란 소식이었다.
악기의 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할 때부터 범상치 않았건만.
뒤이어 그것이 완전히 새로운 소리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안이기에 할 수 있는 발상이라며 놀라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제야 레오도 요한나의 한국행을 응원했다.
“새로운 시도라면 그 시행착오에서 배울 것이 있을 겁니다.”
도리어 자신도 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었지.
하지만, 본인의 위치를 지키겠다며 요한나를 응원하겠다고 덧붙였다.
그 새로운 소리를 만드는 과정을 잘 지켜보고, 다음에 빈 필에도 전파해달라고.
요한나를 보내는 레오의 입가에 뭉클한 기색이 엿보였다.
게다가 레오는 새로운 전망도 가지고 있었다.
“아마 요한나처럼 다른 베테랑 음악가들도 관심을 보일 겁니다.”
베테랑.
도리어 이미 정점을 찍은 사람이기에, 새로운 도전을 하는 이안을 따르고 싶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요한나도 레오의 의견에 적극 동감했다.
신생 오케스트라라는 사실을 도리어 역이용하여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오케스트라를 만들겠다는 선언.
요한나 자신이 그랬듯.
그 신선함에 함께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더욱 커져갔다.
***
‘정말 못 말린다니까…’
휴대폰을 보고 있던 샬롯은 제 이마를 쳤다.
SNS 영상을 올린 남자는 누구보다 자신이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프라임플러스의 CEO.
워낙 괴짜 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
영상 속 CEO는 얼마 연습은 하지 못한 듯, 자꾸 실수를 하면서도 애써 연주를 이어가고 있었다.
곡은 단연, ‘더 마스터’를 뜨겁게 달군 이안의 곡이었다.
‘지난번에 교재를 샀다고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안의 교재를 구매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오늘은 어디까지 연습을 했는지, 이안의 연주를 찾아서 봤다는 이야기까지.
최근 CEO의 입에서 ‘이안’이라는 이름이 몇 번이나 나왔는지 셀 수 없었다.
게다가 교재를 산 이후로 매일 꼬박꼬박 연습 일지를 업로드하고 있을 정도이니.
극성팬도 이보다 열성적이진 않으리라.
하지만, 이것은 비단 괴짜 같은 성품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파급력이 대단하다는 말이겠지.’
CEO가 이렇게 움직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번에는 프라임플러스를 크게 띄운 프로그램의 코스프레를 한 채 실적 발표회에 나타났을 정도.
매번 정장만 입고 나오던 CEO가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왔던 것은 큰 화제를 이끌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CEO가 이러한 팬심을 드러내는 것은 정말로 이안의 ‘더 마스터’가 프라임플러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방증이었다.
게다가 CEO의 행동에 힘입어 이안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회자되고 있었다.
이안의 ‘더 마스터’가 공개된지 3주차.
전 에피소드가 공개되었음에도 ‘더 마스터’는 TOP1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꽤나 쟁쟁한 컨텐츠들이 업로드됐음에도, 이안의 에피소드는 여전히 큰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교황의 행진곡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곡을 연주하고, 만드는 천재성.
비엔나에서 펼쳤던 독주회 인기가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던 타이밍이었는데.
‘더 마스터’의 여파로 클래식 음원차트에 다시금 이안의 곡이 역주행하고 있었다.
‘시즌2 촬영 소식에 아주 난리도 아니었지.’
오케스트라 창단 일대기를 그릴 예정인 ‘더 마스터’ 이안 에피소드 시즌 2.
제작 발표와 동시에 언론사에서 소식을 대서특필하는가 하면, 기사 댓글로도 많은 기대감이 모였다.
20대 청년이 오케스트라를 만든다는 이야기부터, 이안이 악기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소식까지.
워낙 독보적인 행보를 이어오던 이안이었기에 관심은 순식간에 이안의 오케스트라로 쏠렸다.
게다가.
‘2연타를 제대로 날렸지.’
이안이 새로운 음악으로써 국악을 오케스트라에 적극 기용하겠다는 소식은 물론.
빈 필 오케스트라의 수석 피아니스트인 요한나가 오케스트라 오디션에 참가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관심은 더욱 뜨거워졌다.
한때 피아노계를 주름잡았던 피아니스트 아니던가.
그런 존재가 신생 오케스트라에 관심을 가진다는 소식과 음악계에서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시도는 베테랑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덕분에 늘어난 신청서들로 이안과 현철이 밤낮 할 것 없이 검토를 이어갔지.
오죽 많았으면 내내 촬영을 하던 샬롯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를 놀라게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저런 사람들도 참여하다니.’
앞으로 ‘더 마스터’에 출연 제안을 하려고 했던 사람도 몇몇 있을 정도.
프랑스의 거리 예술가를 시작으로, 요한나와 같은 유명 오케스트라의 악장까지.
그야말로 ‘베테랑’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해주는 사람들의 연속이었다.
서류에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볼수록 샬롯은 가슴이 뛰었다.
저 베테랑들의 인터뷰만 따도 장면이 몇 개나 나올지.
‘내일 보면 알 수 있겠지.’
드디어 내일.
대면 오디션 막이 오르는 날이 코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