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16화 (116/250)

116화

“참가 번호 64번.”

호명과 함께 이번에는 갈색 머리칼을 가진 여성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싱긋 웃는 여성.

여성의 등장에 다른 참가자들도 그녀를 알아본 듯 몇몇이 웅성거렸다.

나 또한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요한나 켈러.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피아니스트가 내게 심사를 받으러 무대를 올라온 것이다.

“준비되면 시작해주세요.”

요한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빈 필의 수석 피아니스트라는 직위에 맞게.

그녀는 조금의 떨림 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연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그녀는 빈 필의 수석 피아니스트라는 위치를 여지없이 보여줬다.

유려하게 펼쳐지는 연주는 기본.

누구보다 조화로운 연주를 펼쳤던 사람이라 그런지, 어떤 코드가 협주에 잘 어울리는지 아는 것 같았다.

‘하긴, 피아노계의 파가니니라고 불렸던 사람이니까.’

워낙 유명한 빈 필하모닉이기에.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중고등학생 때도 요한나의 명성을 몇 번 들은 바가 있었다.

피아노계의 파가니니를 자처했던 리스트가 아닌, ‘피아노계의 파가니니’라는 명칭을 고스란히 받은 것은 그녀의 기교 때문이었다.

리스트로 정립된 것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파가니니의 선율을 자아내는 기교.

그 스타일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요한나의 선율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기교보다 분위기로 승부하려는 느낌.’

분명 기교적으로도 뛰어난 곡이었다.

마치 파도를 연상케 하듯 오르내리는 음계의 향연에 분산화음을 적절하게 펼치는 모습.

머릿속에서 파도에 이어 물거품이 이는 듯 디테일한 그림이 그려졌다.

끝없이 몰아치는 파도를 보여주려는 듯 이어지는 뛰어난 기교.

그것이 내가 아는 요한나의 연주 기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연주는 요한나와 동시에 앞선 사람 중 한 사람의 연주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분위기를 만드는 연출은 아까 그 첼리스트 같은데.’

참가 번호 52번.

독특한 이미지의 첼리스트인데다 연주의 특색 때문에 더욱 머릿속에 남았다.

뛰어난 연주 실력도 있었지만, 그녀에게서 돋보였던 것은 바로 완급 조절이었다.

노를 저을 때, 똑같은 힘으로 노를 움직이면 배는 나아가지 못하듯이.

앞으로 나아갈 때는 힘을 세게 쥐고, 노를 원래 위치로 돌릴 때는 힘을 최대한 빼야 한다.

마치 사람의 마음을 밀고 당기듯 쫄깃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그 부분을 요한나가 절묘하게 벤치마킹한 것이다.

피아노계의 파가니니라는 이명처럼 몰아치는 기교를 펼쳤던 요한나이거늘.

지금은 몰아치기보다는 이전의 52번이 했던 것처럼 기교에 힘을 더하고 빼고를 반복하며 잔잔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지.’

첼리스트와 요한나 사이의 간격은 1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곡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 정도라면 그 실력은 검증된 것이나 마찬가지.

게다가 곡을 구성하는 능력은 물론, 같은 피아노임에도 겹치지 않고 적절한 선율을 표현한 것은 이미 합격점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악보에서 봐도 두 곡은 같은 피아노임에도 겹치는 부분 없이 전혀 다른 선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치 기차선로를 떠올리게 하는 구성.

그 위에 어떠한 악기의 선율이 얹어져도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연주가 끝난 요한나를 향해 나는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참가 번호 64번, 본래 연주 스타일을 바꾸셨네요?”

무대에 오르기 전에 곡을 바꾸는 것.

나도 리스트 콩쿨에 오르기 전에 곡을 바꿔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강세를 바꿔 분위기를 바꾸는 정도라도, 5분을 채우는 동안 같은 텐션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동안 연습을 하면서 손에 익은 속도와 강세가 아직 남아있을 테니까.

변경된 곡을 펼치려면 이미 손에 익은 분위기를 절제하고, 새로운 선율을 넣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하지만, 요한나는 도리어 내가 대단하다는 듯 놀란 눈길을 보냈다.

“우와… 진짜 음악을 보기라도 한 거예요?”

요한나는 이내 털어놓듯 이야기를 꺼냈다.

도저히 심사 기준을 모르겠어서 이전 합격자의 분위기를 벤치마킹했다고.

굴곡이 느껴지는 강세와 표현력이 돋보인 것이 합격의 요소라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합격을 위해서라면 합격자의 느낌을 따라야 하지 않겠냐며 하는 모습에서 그녀가 얼마나 이번 오디션에 진심인지 알 수 있었다.

요한나의 말에 전체가 술렁였다.

요한나 덕에 합격 기준을 얼핏 알아냈다는 희망찬 목소리도 있었지만, 반대로 경외감 어린 목소리도 있었다.

분명 소리의 차이를 금방 이해하고, 그것을 연주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저도 그럼 합격인가요?”

긴장감을 털어내듯 한숨을 몰아쉬던 요한나가 너스레를 떨었다.

뛰어난 곡 편성 능력과 기존 음악을 이해하는 해석력, 거기다 자유자재로 리듬과 강세를 바꿀 수 있는 연주 실력까지.

이미 결정한 사항 아닌가.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

음악당의 가장 끝자리.

무려 4대나 되는 카메라가 동시에 음악당을 비추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창단 일대기를 고스란히 담기 위해 했던 선택.

연이어 튀어나오는 빼어난 연주들에 샬롯은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본 방영분뿐만 아니라 미공개 영상으로 차후에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좋은 음악들.

하지만, 샬롯을 놀라게 만드는 일은 따로 있었다.

‘저게 대체 무슨 말이야?!’

이안과 요한나의 대화를 바라보던 샬롯은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연주 스타일을 바꿔? 음악을 보기라도 한 거냐고?

워낙 추상적인 표현이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음악적으로는 모두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참여자들이 오오하며 탄성을 지르는 것으로 무언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인터뷰 따내야겠다.’

샬롯의 머릿속에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감돌았다.

지금껏 대화 없이 짤막하게 합격 이야기만 했던 이안이 길게 이야기했다는 것은 연출로써 활용할 가치가 있다는 것.

이안의 말과 요한나의 인터뷰를 차례대로 배치하면 극적인 장면이 하나 나오리라.

다른 하나는 정말로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대화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정말 알고 싶었기에.

샬롯은 곧장 요한나가 있는 자리로 향했다.

“요한나씨. 혹시 저 기억하시나요? ‘더 마스터’ 총연출, 샬롯입니다.”

“물론이죠 샬롯씨! 촬영은 잘 되어가고 있나요?”

이미 인터뷰로 만났던 둘이기에.

요한나와 샬롯은 보자마자 짧은 사담을 나눴다.

인터뷰를 위해 복도에 나가자마자 샬롯은 궁금하던 질문을 던졌다.

“아까 무대에서 하신 말씀 무슨 뜻인가요? 이안씨가 말하길, 연주 스타일을 바꾸셨다고 하던데요?”

“아하… 그거요? 아무래도 이안씨가 제 연주가 달라진 것을 눈치채셨나 봐요.”

요한나는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숱한 오디션과 입단 과제를 보았지만, 이번과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고.

기존 곡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곡으로 평가하는 탓에 심사 기준을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했다고 덧붙였다.

‘하긴, 요한나씨라면 오케스트라 입단 심사도 해봤을 테니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피아니스트.

거장의 반열에 들어가도 늦지 않은 사람이기에.

심사기준을 파악하려고 했던 것은 그리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일은 다음부터였다.

“사실, 합격하고 싶어서 앞선 합격자의 뉘앙스를 따라 했답니다.”

이번 무대에서도 요한나 특유의 기교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마치 현으로 끊임없이 보잉을 하는 것처럼, 분산화음들을 빠르게 펼치는 것.

그 자체만으로 압도적으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사를 내뱉게 만든다.

그것으로도 대단한데, 즉흥으로 연주를 바꾼 것은 다른 개념의 이야기였다.

아무리 기본 베이스가 같다 한들, 뉘앙스를 달리하려면 기존에 연습했던 것을 모두 내려놓고 다시금 연주를 준비해야 한다.

새롭게 준비한 연주를 펼치다가도 오랫동안 숙지해둔 기존 연주법이 나오면 도리어 마이너스이기에.

열성적이게 연주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기존 연주법이 나오지 않도록 끝까지 이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감성이 곡에 녹아들수록 신경 써야 하기 때문에 생각이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40년 경력 피아니스트가 이안씨의 판단 하나에 연주를 바꿨다고?’

이미 검증된 실력으로 숱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요한나이지 않은가.

그 정도 거장인 요한나가 이안의 심사 기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연주 방향을 바꿨다.

신생 오케스트라에 입단을 위해 그동안 고수했던 연주 스타일을 바꾸고, 이안이라는 젊은 거장과 함께 있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스타일을 내려놓았다.

얼마나 요한나가 이안을 존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

동시에 샬롯이 이안의 대단함을 다시금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샬롯은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고 인터뷰를 이어갔다.

“요한나씨가 연주 스타일을 바꿀 정도라니, 그 첼리스트도 무척 대단한 사람인가 보군요?”

문득 궁금해졌다.

요한나 정도의 실력자라면 이안의 인정뿐만 아니라 첼리스트의 연주 또한 대단했다는 것일 테니까.

이안 만큼이나 젊은 동양인 소녀로 보였던 첼리스트.

그 첼리스트도 찾아서 인터뷰를 진행한다면 더욱 좋은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요한나의 답변에 샬롯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잘 모르겠어요. 기본기도 갖춰져 있지 않았는데, 연주하는 게 신기할 정도였으니까요. 혹시 샬롯은 그 사람이 누군지 아나요?”

“네?! 그런데도 첼리스트의 연주를 따라 했어요?”

요한나의 멋쩍은 웃음에 샬롯은 옅은 탄성을 터뜨렸다.

얼마나 이안의 선택을 믿었으면 할 수 있는 일인가 싶었다.

게다가 요한나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본기도 갖춰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지 않던가.

이안의 결정 하나에 소녀의 연주를 따라 했다는 것.

이안을 믿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다시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와 동시에 샬롯의 머릿속에는 묘한 궁금증이 떠올렸다.

‘그럼 대체 그 소녀는 누구지?!’

젊은 거장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연주가.

하지만, 기본기는 전혀 없는 연주가.

전혀 맞아떨어질 수 없을 법한 것이 한데 섞인 사람의 정체가 어느 때보다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샬롯의 가슴 한편에서는 묘한 떨림도 일렁였다.

분명 요한나가 첼리스트의 연주를 벤치마킹한 것은 첼리스트 또한 대단한 실력자라는 증거.

피아노, 바이올린밖에 수학하지 않았지만, 이안의 안목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한 사람들과 만들어낸 특별한 오케스트라는 어떤 선율을 만들어낼지.

앞으로의 촬영이 더욱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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