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17화 (117/250)

117화

장장 5시간.

참가자들의 연주를 일일이 듣고 나서야 합격자를 가릴 수 있었다.

합격자는 총 32명.

홀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건네거나, 아직은 어색한 듯 움츠러들어 있었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 나를 시작으로 한 명씩 무대에 올라 자기소개를 덧붙였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박이안입니다.”

소개 한 번 했을 뿐인데 박수가 쏟아졌다.

일부는 환호성을 지르며 호응했다.

무대에 올라 객석을 바라보자 합격자들의 모습이 더욱 잘 보였다.

‘몇몇은 서류 심사 때도 눈여겨봤던 사람들이네.’

객석에 앉은 합격자들 중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서류와 포트폴리오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던 사람들.

서류를 볼 때도 절로 고개를 끄덕여지던 사람들이 대다수 앉아있었다.

서류를 건네며 큰아버지가 그리 표현했지.

“블라인드 안 해도 될 걸 그랬다.”

큰아버지도 서류를 심사하면서 봤던 유망주들이 대거 합격했다고.

블라인드로 진행했음에도 내가 뽑은 사람들이 대부분 베테랑에 가까운 사람들이거나, 최근 슈퍼 루키로 이름을 알린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

요한나는 말할 것도 없는 베테랑.

이외에도 세 사람이 특히 눈에 띄었다.

“안녕하세요! 이아람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상큼한 어조로 인사를 건네는 여인.

플루트 전공의 이아람이었다.

한국어로 인사를 건넴에도 목소리 톤에서 반가움이 가득 묻어나서일까.

외국인 단원들도 아람의 의도를 알아챈 듯 박수로 화답했다.

생긋 웃는 표정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연주 때도 저 표정을 잃지 않았지.’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아람은 묘하게 율동을 하듯 어깨와 무릎을 움직여가며 리듬감을 살렸다.

자유로운 리듬감이 특색이라 그럴까, 그녀의 연주는 파도의 일렁임을 그려내듯 유려하게 흘러간다.

연희대 플루트 전공을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듯.

아람은 연주하는 동안 즐기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람은 벌써 친구라도 만든 듯, 옆에 다른 여인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여인은 조금은 귀찮은 듯, 하지만 포기했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국인인 아람과 달리, 여인은 옅은 갈색에 푸른 눈빛이 인상이었다.

그녀 또한 내가 눈여겨보던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루이사 뮬러입니다.”

루이사의 인사는 무척 건조했다.

단조롭게 할 말만 하고 무대에 내려가는 모습에서 몇몇은 수군거릴 정도.

그러나 루이사의 연주를 떠올리면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테레민이라고 했었지?’

루이사가 연주를 하러 올라올 때부터 신기했다.

나무 상자에 굵은 철사 두 개가 꽂힌 모습의 특이한 악기.

악기라고 소개하지 않으면 악기로 생각지도 못할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테레민.

두 철사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자기장을 손으로 간섭하여 선율을 만드는 악기.

오케스트라에서 사용된 전적이 전무(全無)할 뿐더러, 대중들 상당수가 모르는 악기이기도 했다.

그런 생소한 악기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듯, 루이사의 손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아무것도 없는 철사 사이에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자 묘한 음색이 터져 나왔던 것이 생생하다.

묘한 음색이라 어우러지기 힘들 줄 알았건만.

루이사가 연주하는 <항해>는 밤의 오로라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도리어 특이한 음색을 가장 잘 살긴 연주.

루이사에게 합격점을 준 이유였다.

“안녕하세요. 요한나 켈러입니다. 편하게 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호호~”

무대에 올라온 요한나는 푸근한 인상을 내비쳤다.

요한나를 알아본 사람들이 옅은 경악성을 터뜨리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오케스트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빈 필을 알 테고, 빈 필을 안다면 수석 피아니스트 요한나를 모를 리 없을 테니까.

빈 필의 피아니스트인 것만으로도 실력 검증은 필요 없을 정도.

게다가 오디션 직전에 연주 방식을 바꾸고, 바꾼 선율을 고스란히 적용시킬 정도라면 합격자로서 충분할 것이다.

차례대로 인사를 진행하던 중, 마지막 한 사람만 남겨두고 있었다.

헝클어진 곱슬머리에 트레이닝복 차림에 더욱 눈길을 끌었던 사람.

첼로 연주자로 참여한 채서령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서령은 무척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몹시 떠는 서령의 모습에 몇몇 합격자들이 격려차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서령은 되레 그 소리에 조금 놀란 듯 더욱 어깨를 오므렸다.

아까는 어찌 그러한 연주를 했는지 신기할 지경으로.

‘연주할 때는 무척 당당했는데.’

서령의 연주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기본적인 첼로 운지법을 모르는 듯 신기한 연주를 펼쳤으니까.

4개에 달하는 현을 모두 사용하지 않고 단 두 개의 현으로만 연주를 펼치는 서령의 모습은 신기할 정도.

하지만, 서령이 만들어낸 소리는 모든 합격자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라고 할 정도로 우수했다.

운지법이 교과서적이지 않음에도 음계를 정확히 표현했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리듬감 또한 <항해>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었지.

게다가 내가 보는 것은 하나 더 있었다.

‘저런 실력자가 제대로 배운다면 어찌 될까?’

기본기도 전혀 잡히지 않았음에도 다른 연주자들보다 더욱 빼어난 연주를 펼치지 않았던가.

만약 서령이 다른 첼로 합격자들을 통해 기본기를 배우고, 더 많은 기교를 습득한 채 연주를 펼친다면?

서령의 가능성은 지금보다 더욱 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서령까지 인사를 완료하고 나서야 나는 다시금 무대에 올랐다.

자기소개를 하며 조금은 긴장감이 풀려서일까.

사람들의 표정은 시작할 때 비해 더욱 편안해져 있었다.

그런 합격자들에게 나는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할 것은 과제 곡이자, 저희 오케스트라의 첫 곡. <항해>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과제를 위해 제시한 부분은 1악장에 불과하다.

앞으로 오케스트라가 <항해>의 전체를 모두 선보이려면 4악장까지 펼쳐야겠지.

내 머릿속에는 이미 완성된 <항해>의 악보가 들어 있었다.

오늘은 합격자들에게 <항해>의 전체를 들려주는 것이 1번 목표였다.

거기다.

“오케스트라에서 국악을 담당해주실 박선화 선생님입니다.”

내 소개에 선화가 다소곳한 자태로 인사를 건넸다.

소리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지만, 국악의 기교와 기술에 대해서는 전문가인 선화가 더 나을 테니까.

선화의 등장에 국악기를 가지고 왔던 합격자들이 더욱 열띤 반응을 보였다.

몇몇은 선화의 오케스트라 참여에 출사표를 던진 제자들이었다.

내가 눈짓하자 선화은 그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곤 무대 한편에 있던 가야금으로 향했다.

“오늘은 저와 선생님이 준비한 <항해>의 전체를 들어볼 겁니다.”

내 선언에 합격자들은 순식간에 술렁였다.

아마 1악장에 이어 나머지 악장에 대한 궁금증일 터.

내가 피아노로 향해 다가가자 웅성거리던 소리는 순식간에 멎었다.

피아노에 앉은 나는 선화에게 눈길을 보냈다.

선화 또한 준비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선화가 집에 찾아왔을 때 만든 가야금과 피아노 이중주로 펼치는 <항해>.

앞으로 <항해>가 어떤 방향으로 펼쳐질지 보여주는 첫 무대가 시작되었다.

***

偦伶. 재주 서, 영리할 령.

서령이라는 이름의 뜻은 재주와 영리함을 모두 가지라는 의미였다.

이름 덕일까, 서령은 특히 음악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서 계이름을 배운 이후부터 서령에게 모든 소리는 음악이나 다름없었다.

절대음감.

일상의 사소한 소리도 계이름으로 나타낼 수 있을 정도의 능력.

그렇기에 이안과 선화의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서령의 입에서 계이름이 툭툭 튀어나왔다.

시작을 끊은 것은 선화였다.

다소 둔탁한 소리의 가야금이 첫 음을 뜯자 마치 현악기와 타악기를 동시에 연주한 것 같은 음색이 퍼졌다.

한국미가 넘치는 부드러운 선율.

그 위에 이안이 만들어낸 피아노 음색이 더해지자 기묘한 음색이 터져 나왔다.

‘신기하다.’

서령은 대부분 합격자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동안 익숙하게 들어왔던 클래식과는 완전히 다른 형식.

마치 피아노와 가야금, 두 존재가 서로 대화를 하듯 음색이 펼쳐진다.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여 차곡차곡 음색을 쌓아가듯.

두 악기에서 튀어나온 음색은 경쟁하듯 강렬하게 나아가면서도, 때론 서로 하나가 된 듯 동일한 화음을 연이어 펼쳐나간다.

‘아름다워.’

여전히 어색한 기류를 벗지 못했던 서령마저 고개를 빼고 두 사람의 연주를 지켜보았다.

서로 빼어난 연주를 선보이면서도, 군데군데 서로를 확인하듯 눈을 마주친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소리는 더욱 한데 묶여 아름답게 지나가고, 둘의 합은 더욱 절묘해진다.

마치 몇 년 동안 합을 맞춘 사람처럼 둘의 음악은 자연스러울 정도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서령은 이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서령 또한 이안과 같은 22살이었기에.

그녀의 눈에 이안은 대단하면서도 한편으로 부러운 사람이었다.

타고난 음감 덕에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서령의 집안은 딸의 음악 공부를 지원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특히 가격부터 남다른 클래식은 더더욱 시도할 수 없었다.

대학교 진학은커녕, 성인이 되기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형편.

18살 무렵, 동네 교회에서도 재능을 알아보고 지원해준 첼로가 서령의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레슨비를 낼 형편이 되지 않아 독학으로 열심히 해본다고 했지만, 부족함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서령은 특유의 음감을 최대한 발휘하여 첼로를 독학했다.

두 개의 현만 사용하는 것은 그때 생긴 습관이었다.

‘하지만, 기본이 안 되어 있다고 다들 거부했지.’

서령은 우울한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첼로 하나 붙잡고 여러 오케스트라 오디션을 봤건만.

대부분 고액의 입단비를 요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조금 괜찮은 오케스트라들은 서령의 연주를 보고 기겁을 했다.

“기본 교육도 받지 않으셨어요?”

서령은 매번 같은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서령이 할 줄 아는 연주법으로는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할 수 없다고.

매번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안의 오케스트라는 달랐다.

포트폴리오에서 기본기 없는 연주를 봤을 텐데도 통과 연락을 했다는 것에 의아할 정도.

그렇기에 서령은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과제 곡을 완성하는데 며칠 밤낮을 쏟았다.

이안이 오디션 무대에서 합격이라는 말을 했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 할 거야.’

서령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부족한 기본기를 배우고, 오케스트라에서 적응하려면 한세월이 걸리리라.

그러나 서령은 이번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부족함을 뻔히 알고도 자신을 뽑아준 이안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서령은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저기에 내 연주가 더해진다고?’

이안과 선화의 연주는 이미 완성에 가까웠다.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청량함이 느껴지는 곡.

그 곡을 연주하는데 자신이 있다는 상상을 하자 서령의 몸에 전율이 일렁였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오케스트라에 입단했다는 사실.

TV에서만 봤던 오케스트라가 지금 서령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서령의 가슴이 더욱 두근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