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18화 (118/250)

118화

이미 이안의 연주는 예상한 바였다.

가야금이 더해졌음에도 연주는 전혀 어색함 없이 진행된다.

누가 더 잘한다, 어떤 악기의 음색이 더 낫다고 평할 것 없이 둘의 조화는 ‘조화’라는 말 그 자체였다.

앞으로 이런 음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40년 경력 요한나조차 묘한 전율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요한나의 눈길을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표정이 바뀌었네.’

요한나는 서령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두 거장의 연주에 서령의 눈빛이 바뀐 것을 가장 먼저 알아본 요한나였다.

분명 오디션을 기다릴 때와 자기소개를 할 때까지만 해도 묘한 불안감에 떨리는 눈동자였건만.

연주를 보는 눈망울은 대단한 확신이 가득 찬 듯 곧고 밝았다.

‘뭔가 이안씨와 닮았어.’

요한나는 처음 이안을 마주쳤던 순간을 떠올렸다.

독주회를 관람하러 온 수습 단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여지없이 드러내던 이안.

거기에 연주를 할 때마다 생각이 바뀌는 듯, 그 표정 또한 바뀌지 않았던가.

확신과 다양한 생각들로 가득 찬 곧은 눈빛이 아직도 생생했다.

연주를 하고, 듣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 듯 다채롭게 바뀌는 표정과 눈빛.

이안이기에 가질 수 있는 눈빛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눈빛을 서령이 하고 있었다.

‘천재가 천재를 알아본 것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으려나?’

합격자가 모이기 직전.

요한나는 샬롯이 이야기해준 서령의 정보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샬롯 또한 CP로서 서령에 대해 궁금했기에 서류를 다시금 찾아보고 온 상태였다.

“놀라우리만큼 깨끗했어요. 음대 경력도 없고, 대회에서 수상한 경력도 없었어요.”

클래식 판에서는 커리어와 스펙을 무척 따지는 편이다.

콩쿨 우승 경력으로 개인의 실력을 가늠하고, 재학 또는 졸업한 학교를 보고 수준을 평가한다.

결국 음악 또한 주관성이 짙은 예술이니까.

아무리 연주 실력이 출중해도 수준이 비슷한 사람이 둘이라면 결국 객관적인 지표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 클래식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안씨는 오로지 소리로만 판단했단 말이지.’

샬롯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

이번 오디션이 블라인드 테스트로 진행됐다는 점이었다.

어떠한 학력, 콩쿨 우승 경력도 더해지지 않고, 오직 선보인 연주만으로 평가하는 오디션.

능력만으로 인물을 뽑으려고 했던 이안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의지만으로도 박수받아 마땅했다.

‘레오가 뉴 클래식이라고 이야기한 이유가 있었어.’

빈 필의 마에스트로도 이안의 시도에 ‘뉴 클래식’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이번 오케스트라 창단도 그러했다.

기존 관현악단에서 필요한 악기들을 뽑는 것이 아닌, 뛰어난 연주가라면 모두 등용하는 모습.

그리고 그 숱한 악기들을 한데 모을 것이라는 자신감.

완전히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이안의 모습에 요한나의 가슴 한편에 존경심이 일렁일 정도였다.

태초부터 클래식의 정통성에 승부를 하는 오케스트라.

아이러니하면서도 이안이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요한나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

***

본격적인 오케스트라 창단 준비에 반응한 것은 기업들이었다.

혹자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사용할 악기를 지원한다고, 또 다른 기업에서는 차후 연주회에 필요한 물품들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후원 리스트에서도 가장 눈여겨본 것은 공간에 대한 내용이었다.

‘홈그라운드를 만들어야 하니까.’

오디션 때처럼 대한 오케스트라 음악당을 빌릴 수는 없는 노릇.

앞으로 협주 연습을 이어가려면 정해진 연습실이 필요할 것이다.

처음 선화는 국립국악원에서 연습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겸허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국악원 공연장은 겉보기엔 일반 공연장과 같았지만, 구조적으로 국악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일 터.

지속적으로 연습을 이어갈 수 있는 곳이자, 아트센터와 공연홀과 같은 실내악에 최적화된 장소가 필요했다.

몇 가지 후보들을 추리던 큰아버지는 한 곳을 추천했다.

“서천 그룹에서 제공하려는 곳이 확실히 좋긴 하더라.”

대기업 소유의 홀.

사진만으로도 거대한 위용이 느껴질 정도였다.

대한 오케스트라 음악당처럼 2천에 달하는 객석을 보유한 것은 기본.

이미 수 차례 유명한 오케스트라들의 내한 공연을 했던 곳이라 오케스트라 연주에도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유명 오케스트라를 비롯하여 유수의 뮤지컬, 연극들이 펼쳐졌던 곳이기에 대중들에게도 꽤 알려진 공연홀이었다.

그곳에서 연주한다는 것만으로도 홍보가 될 터.

큰아버지도 그 부분에 집중했다.

‘확실히 대단한 곳이긴 하지.’

서천 그룹의 음악홀은 이미 검증된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전에 피아노 거장도 그곳에서 연주하고는 좋은 울림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댔지.

그 정도라면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중견 기업에서 제안한 음악홀 서류를 내밀었다.

“여긴 어떤 것 같아요?”

나는 후원 리스트 중 다른 공연홀의 자료를 내밀었다.

서천 그룹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중견 기업의 음악홀.

객석이 2천여 개인 서천 그룹의 음악홀과 비교하자면, 5백여 개의 객석을 가진 중견 기업의 음악홀은 작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대중들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았기에.

큰아버지는 다소 부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내게도 생각이 있었다.

“공연보다는 연습에 집중할 수 있는 곳이었으면 해요.”

서천 그룹이 제공하고자 하는 음악홀을 사용하면 이점이 무척 많은 것은 따놓은 당상.

다른 것을 떠나 홍보 수단만 생각해도 그 위력은 무시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실전 감각을 키우려면 큰 음악홀을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리라.

처음부터 큰 곳에서 연주한다면 웅장하긴 하겠지만, 선명한 소리를 듣긴 어려울 것이다.

단원들이 더욱 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려면 서천 그룹보다 중견 기업에서 제안한 음악홀이 더욱 맞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케스트라는 공연하는 것이 다가 아니니까.’

내가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던 것은 내가 만들어낸 음악적 유산을 만들기 위함.

오케스트라 무대로 내가 가진 사조를 널리 퍼뜨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케스트라 내에서 사조를 정립하는 것 또한 중요했다.

단원들 사이에서 사조를 쌓으려면 공연보다 연습에 치중된 음악홀을 사용해야겠지.

그래야 개인의 실력이 훨씬 빨리 쌓이고, 사조가 만들어질 테니까.

많은 사람 앞에서 연주를 보이는 것이야, 필요하다면 넓은 음악홀을 대관하면 그만.

연습을 주로 할 곳을 홈그라운드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이었다.

“그 생각이라면 여기가 낫긴 하지.”

내 의견을 듣던 큰아버지도 맞장구를 쳤다.

공연은 오케스트라의 꽃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지만, 아직 신생 오케스트라에게 중요한 것은 연습일 것이라고.

게다가 나의 오케스트라는 기존의 곡이 아닌, 자작곡을 시작으로 하는 만큼 개인의 적응이 더욱 먼저라고 덧붙였다.

개인들이 충분히 소리에 적응하고 나서 넓은 곳으로 옮겨도 늦지 않겠다는 판단.

큰아버지는 중견 기업에 연락을 넣겠다는 말과 함께 질문을 건넸다.

***

“벌써부터 기대가 많네요.”

모두가 돌아가고 난 시간.

개인 촬영을 하던 샬롯이 카메라를 끄고 말문을 열었다.

오늘 보여줬던 연주는 그야말로 대단했다는 말부터 처음 들어보는 국악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는 말까지.

외국인인 샬롯이 보기에도 피아노와 가야금의 이중주는 깔끔하다고 표현했다.

“데뷔 공연까지 하면 작별이네요. 벌써 아쉬운 마음이 들려고 그래요.”

샬롯은 너스레를 떨며 앞으로의 일정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데뷔 무대가 정해지면 그 공연을 마지막 화로 하고 촬영을 마칠 것이라고.

창단 일대기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며 연출할 방안까지 생각해뒀다고 말을 덧붙였다.

거기에 나는 추가로 한 술을 더 떴다.

“마지막 에피소드, 연주회 공연을 라이브로 송출해볼까요?”

내 제안에 샬롯은 흥미로운 듯 입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첫 연주회를 녹화로 진행하면, 빠른 행보를 이어갈 수 없다.

‘더 마스터’ 측에서 녹화본을 편집하고, 그 편집한 영상을 방영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래서 생각한 것이 라이브 송출이었다.

오디션을 비롯한 오케스트라 창단 준비는 녹화 후 방영한다 하더라도, 연주회만큼은 라이브로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테니까.

게다가 연주회라는 사실은 라이브로 진행할 명분은 충분히 있었다.

그동안 프라임플러스에서 하지 않은 이례적인 일.

라이브로 진행하게 된다면 연주회에서 가장 중요한 현장감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다큐를 몰입해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 샬롯도 혀를 내둘렀다.

“역시, 이안씨의 생각은 남다르네요.”

거절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인 제안이라고.

실제와 같은 리얼함을 추구하는 다큐멘터리라면 충분히 고려할 만한 사항이라고 덧붙였다.

게다가 독일에서 독주회를 했을 때는 사실상 중계권이 없었는데.

내 제안대로 하면 중계권을 쥐고 가는 것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만큼 좋은 생각과 안목을 가지고 있다는 거겠죠?”

샬롯은 뒤이어 내가 뽑은 합격자들이 대부분 각광받는 슈퍼 루키와 베테랑이라며 칭찬을 더했다.

블라인드 테스트였음에도 그 모든 것을 알아본 것 아니냐며.

특히 샬롯은 서령에 대해 기대가 많다고 덧붙였다.

“요한나씨가 워낙 관심을 가지셔서 저도 한 번 알아봤는데, 세계적인 첼리스트도 놀랍다고 하더라구요.”

그러한 연주라면 분명 무언가 있을 거란 생각에 촬영본을 일부 첼로 거장에게 넘겼다고 표현했다.

샬롯은 마침 인터뷰 영상이 도착했다며 영상을 보여주었다.

영상 속에는 하얗게 머리가 센 노인이 화면을 보고 있었다.

이어 이어지는 익숙한 첼로 선율.

서령의 연주였다.

처음 그녀의 연주를 본 첼로 거장은 고개를 저으며 난색을 표했다.

“이건 뭐라 말하기 그렇군요. 활을 잡는 법과 운지법도 제대로 잡지 못하니 원.”

현을 모두 활용하지 못하는 서령이었기에.

기본기가 보이지 않는 연주를 본 첼로 거장은 이렇게 연주를 해선 안 된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연주가 지속될수록 그의 표정은 점차 놀라움으로 번져갔다.

“참… 신기하다고밖에 할 수 없네요. 기본기도 없고, 운지법도 제대로 된 것이 아닌데 소리가 정확합니다. 마치 자신만의 활로를 개척한 것 같았어요. 게다가 음을 느끼고 연주하는 모습은 전공생 수준을 넘어선 듯 보여요. 잘 다듬으면 누구보다 아름다운 보석이 될 수 있는 원석 같은 연주랄까요?”

거장은 놀랍다는 듯 평을 이었다.

기본기가 없음에도 이러한 연주를 펼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그 수준이 높다고 표현했다.

그와 동시에 거장은 내가 서령을 합격시켰다는 소식을 듣곤 곧바로 부럽다며 미소 어린 표정을 지었다.

대개 기본기를 보고는 일찌감치 탈락시켰을 것이라며.

안목이 대단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영상을 마지막으로 촬영을 정리하던 샬롯은 문득 궁금한 듯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오케스트라 이름은 정했나요?”

샬롯의 질문에 몇몇 스태프도 덩달아 손길을 멈췄다.

오랜 시간 촬영을 하면서도 여태껏 오케스트라 이름조차 말하지 않았던 탓일까.

대부분 사람들이 궁금증 어린 시선으로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 또한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

내가 가진 사조, 표현을 모두 담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에도 좋은 이름.

지금 머릿속에는 정리된 하나의 이름이 자리 잡혀 있었다.

나는 생각만 하던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처음 내뱉어보았다.

“리히트 오케스트라. 그렇게 지어봤습니다.”

리히트(Licht).

독일어로 ‘빛’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만든 사조와 음악이 빛처럼 빠르게, 모두에게 나아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전생의 의지를 덧붙이기 위해 독일어를 활용한 이름.

게다가 생각만 하면 빛으로 만들어진 음표와 오선지가 펼쳐지는 것을 모티브로 지은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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