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19화 (119/250)

119화

‘이게 무슨 일이야.’

이른 아침, 모두가 출근하는 시간에 한 사내가 경악성을 터뜨렸다.

홍석우.

그는 주식회사 담웅의 직원이자, 리드미컬 체임버홀의 담당자였다.

석우는 아침 일찍 온 메일을 보고도 믿기지 않은 듯 눈을 비볐다.

하지만, 메일에 떠오른 메시지는 변하지 않았다.

리드미컬 체임버홀 후원에 대해 무척 감사합니다.

앞으로 저희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계속해서 발전하여 귀사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 박이안 드림.

‘설마 우리를 선택할 줄이야!’

박이안 피아니스트가 오케스트라의 홈그라운드를 찾는다는 소식에 업계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미 한국에서의 위상은 말할 것도 없는 박이안이니까.

게다가 그가 만드는 오케스트라는 이미 ‘더 마스터’에서 창단 일대기까지 찍을 정도로 전 세계의 관심까지 몰고 있었다.

단순히 홈그라운드를 찾는 것 이상의 가치.

석우 또한 이번 소식이 단순히 홈그라운드 선정을 넘어 다른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또한 경쟁에 출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뒤이어 들리는 소식에 그는 기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곳이 많이 참여했다고 들었는데.’

업계에서는 이미 어떤 기업이 손을 들었는지 소문이 파다했다.

악기사로 유명한 청악 그룹을 시작으로, 유수의 음악 관련 재단들이 참여한 것은 기본.

대기업 중 하나인 서천 그룹이 참여했다는 말에 석우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런 우월한 경쟁자들이 있었음에도.

이안이 체임버홀을 선택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참으로 신기하단 말이지.’

석우는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았다.

여러 대기업에서 제공하기로 한 음악홀은 대부분 2천 석에 가까운 객석을 보유한 대규모 콘서트홀.

그에 비해 체임버홀은 객석이 500석밖에 되지 않고, 규모도 그들과 비교하면 작았다.

그럼에도 이안이 자신의 음악홀을 선택했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유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노력은 우리가 해야지.’

이안이 누구인가.

젊은 거장이라고 불리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인물.

그런 사람이 자신들의 음악홀을 선택했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리라.

그 부분을 사전에 파악하고, 더욱 강화하는 것이 이안의 선택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게다가.

‘이건 좋은 기회야!’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의 홈그라운드이자 음악당은 하나의 관광지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유명 관현악단을 섭외하는데 성공하기만 해도 업계에서 소문이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사람도 아닌 이안의 오케스트라이다.

지금 음악계에서 최고로 각광 받는 사람이자, 신생 오케스트라임에도 새로운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곳.

그와 함께라면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석우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

본격적인 연습에 앞서.

나는 단원들과의 개인 면담을 진행했다.

개인의 상황을 알아봄과 동시에 오디션 때 했던 내용을 토대로 피드백을 할 수 있는 시간.

합주를 하기 전에 미리 특색을 파악하고, 필요한 조언을 덧붙인다면 더욱 빠른 적응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연주할 때 어깨에 힘을 많이 주는 편이죠? 그러면 일찍 피로해서 4악장까지 힘들 거예요.”

“손가락이 때론 흔들려요. 아마 강약 조절이 문제인 것 같은데, 마디 간격으로 곡을 연주해보세요.”

“아마 협주를 할 때는 트럼펫 호흡을 그리 길게 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몰아치는 부분에서는 끊기지 않게 호흡 조절에 신경 써주세요.”

연이어 피드백을 던질 때마다 단원들은 사뭇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리 빨리 개인의 특색을 잡아낼 수 있느냐고.

오디션 때와 면담 때, 단 두 번에 걸쳐 결점을 찾아내는 모습에 신기할 지경이라고 표현했다.

순번이 중간쯤 지나자 도리어 단원들이 어떤 피드백을 건넬지 궁금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연이어 피드백을 건네고 있을 때.

나를 놀라게 만든 단원이 하나 있었다.

“악보를 볼 줄 모르는 거예요?”

내 질문에 서령이 다소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음악에 대한 이론을 배운 것은 초등, 중등 교육으로 받은 것이 전부라고 설명했다.

일반적인 악보는 오선지가 있고, 그 위에 음표를 적어 음의 위치와 박자를 표시한다.

플랫과 샵을 적어 반음을 표시하고, 이음 줄, 셋잇단음표 등을 통해 단순히 음표의 나열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부분까지 채운다.

‘이걸 보고 연습했다고?’

하지만, 서령이 건넨 노트는 음표는커녕 오선지도 없었다.

과제를 위해 <항해>의 선율을 메모한 것이라고 내민 것은 계이름을 써놓은 것이 전부.

8분음표, 4분음표 등을 표현하려는 듯 V자로 박자를 표시한 것은 있었다.

초등학교만 나왔다면 알 법한 음표의 박자 표시들.

하지만, 레가토나 페르마타 등, 여타 악상 기호는 보이지 않았다.

악상 기호를 몰랐던 탓에 메모에는 ‘느리게’, ‘여운 남게 음을 끌어서’, ‘단칼에 끊기’와 같은 설명적인 표시가 되어 있었다.

“오선지로 써오려고 했는데…”

서령은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일부는 애써 오선지를 따라 하려고 한 듯, 손으로 다섯 개의 줄을 그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도 계이름을 따라 음표의 위치만 표시한 것이 전부.

쉼표를 넣지 않아 리듬도 맞지 않는 부분도 일부 있었다.

하지만, 도리어 이런 악보를 보고 연주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어쩌면 나의 전생만큼 천재일 수도.’

서령은 절대음감이라는 자신의 장기를 무척 잘 활용하고 있었다.

낙서처럼 보이는 메모에는 형식이 오선지가 아닐 뿐, 음악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표현대로, 별도의 교육을 받지 못했을 뿐 곡에 담긴 선율은 독특하면서도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 규칙성이 서령의 연주에 리듬감을 부여하는 것이겠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이 정도 곡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메모하는 수준,

문득 전생이 처음 음악을 접했을 때의 감각이 떠올랐다.

그 또한 전혀 배움이 없었지만, 소리를 음악으로 느끼지 않았던가.

분명 그러한 천재적인 면모가 지금의 서령을 만들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서령의 손때가 묻은 노트를 몇 장 더 넘겨보았다.

그중 최근에 적은 것으로 보이는 메모가 하나 보였다.

“이건 뭔가요?”

내 질문에 서령의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더 붉어졌다.

마치 비밀 일기를 들킨 사람처럼, 손으로 얼굴을 가리던 서령은 한참이 지나서야 털어놓았다.

“오케스트라 이름이 정해졌다고 해서… ‘빛’을 주제로 곡을 써봤어요.”

벌써?

오케스트라 이름이 전파된 것은 고작 3일 전 일이었다.

그 사이에 악상을 떠올렸다고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서령이 적은 계이름들은 3분 정도 되는 뉴에이지 음악에 비견할 양이었다.

3분이라는 짧은 시간 음악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나이기에.

나는 자연스레 노트를 서령에게 내밀었다.

“한번 연주해볼래요?”

서령은 다소 당황한 듯 눈을 흘기다가 이내 노트를 받아 자세를 고쳤다.

노트에 적힌 음들을 차례대로 보고는 마치 그것을 고스란히 첼로에 옮기듯 활을 쥐었다.

활이 현들을 스쳐 지나가자 음색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은 5도 화음.’

솔시레.

밝은 음색이 특징인 화음이 첼로에서 퍼져나간다.

연주를 시작함과 동시에 나는 눈을 감았다.

곧이어 머릿속에서는 음표들이 차례대로 그려졌다.

오선지에 따라 차근히 맺히는 음표들은 ‘빛’의 모티브를 따왔다는 사실을 방증하듯.

밝게 진행되는 곡조가 이어졌다.

***

‘창피해.’

서령은 노트를 보여주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악보의 축에 끼지도 못하는 낙서들을 보고 이안이 뭐라 생각할지.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자신의 낙서가 얼마나 하찮게 보일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서령의 예상과 달리 이안은 무척 진지한 눈길로 그녀의 노트를 바라보았다.

‘설마 읽고 있으신 건가?’

고작 계이름과 박자의 기록 정도밖에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음악 이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터라 서령은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수준으로 곡을 메모하곤 했다.

때론 그 부분이 서러울 때가 있었다.

아무리 절대음감이라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한 곡을 습득하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지도 못했다.

결국 악보는 음악인들의 약속이고, 자신은 그 약속조차 모르는 바보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안은 달랐다.

마치 악보라는 표현이 아닌, 음악 그 자체만으로 감응하는 것처럼.

이안은 서령의 노트를 보면서 옅은 흥얼거림으로 음을 파악했다.

그런 진지한 모습에 서령도 얼굴을 가리던 손을 조심스레 치울 수 있었다.

“한번 연주해볼래요?”

평소 같았으면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으리라.

하지만, 그토록 진지한 눈으로 자신의 기록을 봐준 모습과 진심이 묻어나는 이안의 말에 서령은 자신도 모르게 노트를 받아들었다.

노트에 적힌 계이름들을 차례대로 본 서령은 곧바로 첼로를 쥐었다.

반복되는 선율을 진행하자 오묘한 음색이 들려온다.

마치 아지랑이를 연상케 하는 떨리는 소리.

하늘에서 비추는 햇살을 떠올리며 만들어본 곡이었다.

잠깐 곡에 심취하여 연주를 하고 있던 찰나.

서령은 갑작스레 들리는 피아노 소리에 놀라 하마터면 연주를 멈출 뻔했다.

이안이 서령의 연주에 맞춰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저걸 단번에…’

놀라움과 당황 사이.

서령은 그저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노트를 본 몇 분 사이에 곡의 갈래를 눈치채고 곧바로 연주를 덧붙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경지였다.

게다가 이안의 연주는 서령이 펼치는 연주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다.

강렬한 음색의 첼로가 몰아치는 부분에서는 부드러운 반주를 깔았고, 첼로의 선율이 약해질 때는 멜로디를 덧입히려는 듯 다채로운 선율을 더했다.

어느덧 서령은 부끄러움과 여타 놀라운 감정을 내려놓고 오롯이 연주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게 협주구나.’

서령의 첫 협주 경험이었다.

어느덧 그녀는 자신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음을 깨달았다.

때론 격려하는 것 부드럽게, 때론 경쟁심리를 자극하는 강하게 선율을 더하는 이안의 연주.

그에 맞춰 서령도 덩달아 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둘이서 만드는 연주에도 벌써부터 벅차오르는데, 수십 명에 달하는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면 어떤 기분일까.

처음 느끼는 감각에 서령은 최근 들어 가장 밝은 웃음을 지으며 연주에 임했다.

“그럼 다시 과제로 써온 <항해>를 연주해볼까요?”

이미 연습을 하며 땀범벅이 되고, 손이 저려 왔다.

하지만, 서령은 이안의 물음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기분을 놓치기 싫었기에.

서령은 곧바로 활을 고쳐잡고 현에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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