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21화 (121/250)

121화

음악홀은 오케스트라에게 필수 요소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연습을 하려면 커다란 공간이 필수니까.

빈 필에서 수석 피아니스트로 있던 요한나는 홈그라운드가 가지는 의미를 더욱 잘 알고 있었다.

다수의 조화를 시험해보고, 합을 맞춰볼 수 있는 장소이자, 고정 연습홀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큰 영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홀을 둘러보는 요한나의 눈길이 더욱 매서워졌다.

리드미컬 체임버홀.

중견 기업이 소유한 음악홀이자, 실내악을 전문으로 하기 위해 만들어진 체임버홀이었다.

500명에 이르는 객석을 수용할 수 있는 좌석을 비롯해, 지하에 위치한 개별 연습실까지 존재하는 무척 우수한 홀이었다.

요한나가 몸담았던 빈 필의 오페라극장처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흔 명에 달하는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사용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몇몇 단원들은 처음 체임버홀을 둘러보며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깔끔하고 넓은 홀의 모습에 감탄을 자아내는 사람도 있었고, 홀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신기하다는 듯 이리저리 둘러보며 밝은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일부는 다소 의아한 듯 주변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요한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일반적인 홈그라운드와 다르네요.”

요한나의 질문에 의아한 듯 눈을 끔뻑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그녀 또한 이안과 같은 거장이라면 더욱 넓은 곳이 더욱 걸맞은 곳이라 생각했으니까.

대체로 오케스트라들은 콘서트홀급의 홈그라운드를 가지며, 그 웅장한 기색을 여지없이 펼쳤다.

요한나를 비롯해 오케스트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보기엔 기존과 다른 상황에 조금 당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요한나는 질문을 건네면서도 얼핏 의중을 알 것 같았다.

입장과 동시에 객석보다 무대의 비중이 많은 것을 확인한 덕이었다.

‘보다 다양한 체계를 활용하려는 것이겠지.’

오케스트라는 악기의 위치에 따라 선율이 바뀐다.

관현악을 앞으로 배치하고, 타악기를 뒤에 배치하는 것은 단순히 이름이 ‘관현악단’이라서가 아니다.

위치에 따라 소리의 울림이 달라지고, 그 울림은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자칫 위치를 잘못 조정하면 한쪽 이어폰이 안 들리는 것처럼 밸런스가 무너지기에.

오케스트라에서 악기의 위치도 무척 중요한 요소였다.

특히 이안이 만든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기존에 사용하지 않던 악기들로 악단을 꾸렸기에 위치에 따른 균형이 무척 중요했다.

원하는 음색을 앞으로 내세울 수도 있고, 악기에 따라 직접 밸런스를 맞출 수 있는 공간.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첫 삽을 뜨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의중을 조금은 눈치챘음에도 먼저 질문을 한 것은 의문 가득한 다른 단원을 위한 배려였다.

그런데 이안이 대답하기도 전에 아람이 먼저 생기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곳이면 소리가 잘 응집될 거예요. 아직 신생인 저희 오케스트라는 밖으로 나가는 소리보다, 저희들의 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할 테니까요. 그래서 여길 고르신 거죠 단장님?”

이아람.

특유의 생기발랄한 면모가 특징인 플루티스트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력만큼은 화려하다 못해 강렬했다.

학창 시절 때부터 오케스트라를 시작한 이력들.

특유의 오케스트라 사랑 덕에 아람은 남들보다 먼저 이안의 뜻을 일부 눈치챈 것이었다.

반짝이는 눈빛으로 보던 아람에게 옆에 있던 루이사가 옆구리를 찌르며 대꾸했다.

“끊지 말고 들어봐. 단장님 얘기하시려고 하는데.”

인상을 찌푸리고 이야기할 정도로 강한 어조.

다소 공격적으로 보일 수 있는 말투인데도 아람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도리어 ‘아하!’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아람은 배시시 웃었다.

합격자 발표를 할 때부터 같이 있었던 두 사람.

앙숙과 친구 사이를 넘나들 듯 두 사람은 티격대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금세 피식 웃고 있었다.

‘저쪽은 테레민 연주가였지?’

플루티스트 아람과 테레민 연주가 루이사.

요한나의 머릿속에서도 두 사람의 연주는 생생했다.

아람의 연주는 플루트의 재치와 리듬감으로 축제의 악단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마치 춤을 추듯 움직이는 몸짓은 과해 보였지만, 플루트에서 나오는 음색은 빈 필의 플루티스트와 비견해도 절대 뒤지지 않았다.

반대로 루이사는 테레민이라는 독특한 악기로 우울함을 표현하는데 강한 면모를 가졌다.

특히 루이사가 만들었던 <항해>는 풍랑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짙은 선율이 특징이었다.

독특한 음색이 어떻게 합쳐질지 요한나조차 기대될 정도.

이야기를 차근히 듣던 이안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람씨가 말하셨듯, 저희는 아직 신생 오케스트라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들 또한 서로의 연주를 들으면서 교감하는 시간이 필요하죠.”

이안의 설명에 다수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나 또한 이안의 의견에 긍정표를 던졌다.

‘기존 오케스트라와 다른 것은 사실이니까.’

아직 단원들끼리 제대로 친해지지 않은 탓에 더해 단원들 사이에서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옅은 불안감이 느껴지는 기류.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몇몇 단원은 요한나처럼 본인의 위치를 내려놓고 온 사람들도 있었고, 누군가에게는 이번 오케스트라가 인생을 걸고 온 것일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단원들의 얼굴에서 진지함이 묻어나왔다.

기존 악보만 답습했던 오케스트라와 다른 행보였지만, 그동안 이안이 만들어온 길이 있기에.

이안이라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두의 표정에서는 결연함이 느껴졌다.

요한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게다가.

“남들에게 보이기 전에, 내실부터 다져야 합니다.”

이안의 한 마디에 요한나는 크게 동감했다.

신생 오케스트라이기 이전에, 수많은 새로운 길을 개척한 리히트 오케스트라이기에.

앞으로 갈 길이 멀었다.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은 악기들의 조화와 단원 사이의 조화, 개인의 수준을 올리기까지 할 일이 태산이었다.

그러나 이안의 단단한 표정에 요한나도 덩달아 굳은 의지를 보였다.

이안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처음 한국행을 택했을 때처럼 자신감이 요한나의 가슴 한편에 일렁였다.

***

홀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나는 자연스럽게 단원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본래 사용되는 오케스트라 대형이었다.

다만,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국악이 들어 있으니 그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

좌측에는 양악기를 위주로, 우측에는 국악기를 위주로.

그에 맞춰 좌측 선두부터 바이올린을 비롯한 현악기, 그 뒤에 플루트를 포함한 관악기를.

후방에는 마림바와 같은 타악기를 배치했다.

우측은 가야금과 거문고, 아쟁이 선두에 배치됐고, 그 뒤에 대금과 같은 관악기와 북들이 자리를 지켰다.

배치가 끝나자 나는 곧바로 악보를 꺼내 들었다.

전날 완성한 <항해>의 완성본.

“<항해>가 완성됐습니다.”

내 선언에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선화도, 요한나도, 서령도, 아람도, 루이사도.

모든 단원들이 모두 한마음이 된 듯하다.

몇몇 단원은 기대 어린 시선으로 악보를 빠르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빠르게 곡을 파악하고 연습을 이어가고 있었다.

약 10분가량 개인 확인의 시간을 준 후.

“자, 그럼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첫 협주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연습을 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악기를 고쳐잡았다.

내 지휘봉 끝을 바라본 사람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내 지휘봉을 휘두름과 동시에 뱃고동 소리를 연상케 하는 바순의 소리를 시작으로 <항해>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처음은 들뜬 기색으로.’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진다.

첫 항해에 긴장 어린 마음도 있을 것이고, 이미 익숙한 베테랑들의 마음도 있을 터.

이를 상징하듯 서령의 첼로를 비롯해 바이올린들이 통통 튀는 보잉을 통해 재치 있는 선율을 만들어낸다.

이에 질세라 국악기들도 맹렬하게 현을 뜯기 시작한다.

선화를 선두로 펼쳐지는 국악 현악기들의 향연.

국악 특유의 매기고 받는 식의 연주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선율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양악과 국악이 서로 번갈아 가며 연주를 하면서 화음을 쌓아간다.

‘다음은 파도의 흐름.’

내 눈길이 관악기들로 향한다.

빠르게 눈을 맞춘 단원들은 볼을 한껏 부풀린 채 악기에 숨을 불어넣는다.

이전의 가는 뱃고동 소리를 더욱 펼쳐놓은 듯.

더욱 울림이 더해진 음색이 체임버홀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마치 선원들 한 명 한 명의 특색을 고스란히 그리는 듯한 연주에 나는 곧바로 이들을 통솔할 악기를 향해 눈길을 돌린다.

‘요한나!’

말 없는 외침이 요한나에게 뻗어나갔다.

요한나는 이미 눈치챈 듯 피아노 건반에 빠르게 손을 올렸다.

둔-

낮은음을 시작으로 차례대로 올라가는 분산화음의 연속.

마치 빠르게 크로키를 하듯 머릿속에 배의 형상이 그려진다.

모든 음색들을 한꺼번에 아우르는 듯한 짙은 음색에 이전에 펼쳐지던 밝은 화음에 밸런스가 맞춰진다.

안정적으로 나아가던 선율은 3악장에 도달하자 급속도로 어두워진다.

‘이번은 테레민.’

배치도상 가장 후미에 있는 테레민.

루이사가 철사 사이의 공간에 손을 움직이자 테레민이 찢을 듯 낮고 웅장한 선율을 내뱉는다.

전자음 특유의 기색이 더해지자 마치 천둥 번개를 형상화하듯 날카로운 음색이 체임버홀에 울려 퍼진다.

테레민의 음색에 움츠린 듯, 다른 선율들이 잠깐 약해지다가 점차 제자리를 찾는다.

마치 풍랑을 만난 배가 처음에는 당황하다가도, 이내 원위치를 되찾듯.

관현악들이 다시금 밝은 음색을 되찾자, 마치 풍랑이 끝난 듯 이번에는 테레민이 밝은 소리로 점차 사라진다.

완전히 별개였던 악기들.

양악과 국악의 합치.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조합들이 지휘봉의 움직임에 따라 하나가 되고, 더욱 맹렬하게 나아간다.

이윽고 마치 항해를 끝낸 배가 정박하러 속도를 줄이듯.

모든 악기들이 어우러진 음색이 점차 잦아들기 시작한다.

부두에 닿는 소리를 나타내듯.

마지막으로 휘두르는 지휘봉에 모든 악기들이 한꺼번에 짧고 굵은 화음을 펼친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지휘봉에 사람들이 얕은 숨을 쉬며 끝을 기다렸다.

‘완성이다.’

처음으로 펼쳤던 <항해>의 완성본.

그 협주 또한 무척 성공적이었다.

부두에서 시작하는 배가 그려지며, 바다를 항해는 자유로움.

더 나아가 풍랑을 만나 몸서리치는 선원의 이미지와 이를 극복하려는 모습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가히 완벽에 가까운 조화.

모두가 베테랑과 같은 수준의 연주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머릿속에 그림이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합격자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어느덧 이마에 가득 맺힌 땀방울.

나뿐만 아니라 모든 단원들이 한껏 땀을 흘리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마치 마지막 지시라도 기다리는 듯.

단원들이 나를 향해 있었다.

그제야 나는 지휘봉을 내리며 인사를 건넸고, 그 순간 활기찬 박수와 환호성이 단원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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