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22화 (122/250)

122화

루이사 뮬러.

그녀는 독일에서 제일가는 현대음악학교, BIMM의 학생이자 그곳에서도 수재로 불렸던 인물이었다.

클래식 음악가인 부모의 재능을 물려받은 덕에 루이사는 음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자연스레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부모를 통해 클래식 악기를 교양처럼 습득할 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은 꼭 하고 마는 성미에 전자음악들도 섭렵했다.

이러한 과정은 훗날 테레민이라는 생소한 악기를 다룰 때도 큰 도움이 되었다.

독특한 악기에 뛰어난 음감, 곡을 만들어내는 능력까지.

BIMM의 교수진들은 루이사가 현대음악계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이때 들려온 이안의 오케스트라 창단 소식은 BIMM에서도 큰 화제를 몰았다.

“박이안 피아니스트가 오케스트라를 만든대!”

독일에서도 이미 이안은 유명인사였다.

오스트리아에서 펼친 독주회 소식이 가장 먼저 전해진 곳이 독일이었으니까.

독일 또한 클래식이 무척 강세를 보이고 있던 곳이기에, 연이어 신비로운 행보를 이어간 이안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루이사의 평은 무척 박했다.

‘이상해.’

부모를 통해 숱한 클래식 음악 지식을 얻은 루이사였다.

그런 루이사에게 이안이 만드는 오케스트라는 생소하다 못해 이상했다.

참여 악기에 규정이 없다는 말과 오디션에서 창작곡을 보겠다는 선언.

그동안 루이사도 숱한 오케스트라를 봐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독일인인 루이사에게는 국악을 활용한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기에.

루이사에겐 이안의 모습이 괴짜 천재처럼 그려졌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루이사의 눈을 번쩍 뜨게 할 소식이 전해졌다.

‘요한나가 참여한다고?!’

빈 필하모닉의 수석 피아니스트, 요한나의 오디션 참여 소식.

유럽계 국가에서는 요한나를 모르는 음악인은 좀처럼 없었다.

요한나는 빈 필의 마에스트로, 레오와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피아노계의 파가니니라고 불리던 인물이 뭐가 부족해서 한국행을 선택했단 것일까.

게다가 요한나를 선두로 여러 베테랑들도 연이어 출전 소식을 전하며 루이사도 조금씩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런 베테랑들이 지원할 정도라면…’

한 번 도전해볼 가치가 있었다.

게다가 악기의 제한도 없으니, 루이사도 참가 자격이 충분.

BIMM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욱 실전 음악인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루이사 또한 출사표를 던졌다.

그렇게 지금은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일원로서 첫 협연을 펼쳤는데.

마법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게 말이 되나?’

악보를 초견(初見)하는 것은 대수가 아니었다.

처음 받은 악보라도 빠르게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악기로 연주하는 것은 음악가들의 기본 소양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완벽에 가까운 선율.

이안의 눈빛과 손짓만에 여러 개의 악기들이 감응하고, 저마다의 소리를 적절하게 내뱉는다.

루이사에게 생소한 국악기들도 이내 섞여들어가더니 한 번도 듣지 못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것이 마치 오랫동안 합을 맞춘 사람들처럼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다수가 만드는 연주를 하나로 모으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니까.’

독주는 혼자서 박자를 맞추고, 리듬감을 만들면 된다.

하지만, 협주의 경우 동일한 박자를 맞추되, 다른 악기들과의 흐름도 생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합을 맞춰가며 특정 부분에서 악기가 튀지는 않는지, 개인의 힘에 따라 선율이 과하지는 않는지, 등 여러 가지를 살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처음으로 연주하는데도 그 부분들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완성에 도달한 상태.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자신의 파트에 들어간 루이사는 연주를 하면서 무언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이거… 내가 만든 부분이랑 비슷한데?’

풍랑을 만난 배를 형상화하는 <항해>의 3악장.

천둥, 번개가 몰아치듯 찢어지는 테레민의 소리가 추가되는 부분이었다.

악보에 따라 자연스레 허공에 손을 움직이면서 나는 소리.

분명 루이사가 만든 과제 곡을 원형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스스로 만든 곡과 비슷한 멜로디에 루이사는 곧바로 적응하여 유려한 연주를 이어갔다.

‘설마 과제 곡에서 내용을 뽑아온 거야?!’

연주를 이어가던 루이사는 확신했다.

이안이 자신이 만든 과제 곡을 활용하여 <항해>를 완성하였다는 것을.

우울한 멜로디를 흘렸던 선율은 분명 자신이 만든 곡조와 유사했다.

하지만, 그 선율을 오케스트라와 합치기 위해, 숱한 수정을 거친 티가 났다.

‘그렇다면 이런 연주가 가능해.’

본인들이 만든 곡들이 베이스로 깔렸다면.

다른 단원들도 실수 없이 연주를 이어가고 있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본인이 만든 곡인 만큼, 그 뉘앙스나 선율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루이사도 자신이 만든 낮은 선율을 풍랑에 빗대어 표현한 이안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하지만, 감탄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걸 그동안에 완성했다고?’

오디션이 끝나고, 피드백까지 거치는데 약 일주일.

아무리 기존의 <항해>가 완성되어 있다 한들, 다른 이들의 곡을 한데 녹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곡을 수학했던 루이사에게는 그 어려움이 얼마나 큰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화음 하나, 음표 하나 틀어지는 것만으로도 협주의 균형이 무너진다.

차라리 새로 쓰는 것이 더 편했을 텐데.

기존의 화음들을 교묘하게 수정하고, 그 수정한 바를 서로 묶어 하나로 만드는 것을 생각하니 루이사의 몸에 전율이 일렁였다.

매번 건조한 성정으로 담담하게 움직였던 손이 오늘은 묘한 흥분감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테레민 파트를 끝마친 루이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처음 협연에 당황하거나 어려울 만도 한데, 모든 단원들이 이안의 지휘봉과 악보 사이를 오가며 화려한 연주를 펼치고 있었다.

이안의 지휘봉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현악기가, 관악기가 저마다의 소리를 내놓았다.

절대 섞이지 않을 법한 소리들이 한데 섞이고, 새로운 선율을 만들어냈다.

몇몇 단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입꼬리는 크게 올라가 있었다.

루이사도 다르지 않았다.

‘오길 잘했다.’

좀처럼 웃지 않던 루이사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수많은 베테랑들을 만나고, 새로운 음악을 탐닉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지막 화음을 터뜨림과 동시에 루이사의 가슴 한편에 물꼬가 트인 듯 전율이 일렁였다.

***

첫 연습이 무척 좋아서 그럴까.

지휘봉을 내려놓자 박수가 쏟아졌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만 해도 새로운 음악홀이 낯선 듯, 다들 표정이 굳어있었는데.

지금은 어색함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머리가 젖을 정도로 땀이 흥건하고, 가쁜 숨을 몰아쉴 정도인데.

모두의 표정은 밝았다.

“혹시 곡을 완성하시는데, 저희 과제 곡을 활용하셨나요?”

아람이 손을 들어 질문하자 모두의 시선에 한데 꽂혔다.

몇몇은 아람의 말에 같은 것을 느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네. 각자의 개성을 조금씩 살려서 곡에 입혀봤습니다.”

일주일이라는 기간 동안 했던 작업.

피드백과 면담을 통해 개인의 연주를 들었던 것을 <항해>에 녹였다.

요한나의 여유 있는 곡조는 <항해>의 기존 곡을 변경하여 여타 악기들이 잘 흡수되도록.

첼리스트 서령과 플루티스트 아람의 선율은 각각 1악장과 2악장의 메인 선율을 장식했다.

루이사의 테레민 또한 3악장에서 중요한 분위기를 연출할 뿐더러, 4악장에서 밝은 에너지를 전달하게끔 만들었다.

그 밖에 다른 단원들의 과제 곡 또한 모두 <항해> 속에 녹여 하나의 협주곡으로 완성시켰다.

첫 협주였음에도 완성도가 무척 높았던 까닭은 모두가 만든 곡이 어렴풋이 묻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지만, 완벽하진 않았습니다.”

다소 낮은 어조의 목소리에 단원들이 금세 표정을 바꿨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냉랭해졌음에도 단원들의 눈빛은 무척 진지했다.

피드백을 수용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사에 나는 코멘트를 하나둘씩 내놓았다.

“바이올린. 연주 자체는 좋았지만, 다소 생소한 악기들과 콜라보를 해서 그런지 소리가 작아졌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단원 중 몇몇이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화씨, 국악 관악기들도 한 번 점검해주세요. 점차 소리가 커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선화를 비롯하여 태평소, 대금을 든 단원들이 알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퍼커션은 조금만 더 합을 맞춰야 할 것 같습니다. 박자는 맞았지만, 눈치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지휘에 따라 자신 있게 쳐도 됩니다.”

마림바와 전통 북, 등 타악기들을 담당한 단원들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외에도 내 피드백은 멈추지 않았다.

합은 좋았지만, 소리의 균형을 해치는 부분들이 있었기에.

첫 작업은 그 부분을 고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협주에 더욱 유려한 음색이 터져 나올 테니까.

***

“잘 지내셨습니까, 선생님.”

“그래. 너도 무탈하냐?”

두 사내가 술잔을 부딪쳤다.

대한 오케스트라의 전, 현직 마에스트로.

현철과 다니엘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자연스레 대한 오케스트라였다.

“대한은 요즘 어떻고?”

“제가 열심히 한다지만, 어찌 선생님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겸손한 다니엘은 현철에게 마에스트로 자리에 오시겠냐는 농담 섞인 말을 내뱉었다.

턱도 없는 소리라는 현철의 답변에 분위기는 부드러워졌다.

이어 그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지금에 대한 오케스트라, 그리고 앞으로 대한이 나아갈 향방까지.

술이 줄어드는 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얼마나 이야기가 이어졌을까.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갈 즈음 현철은 말문을 열었다.

“혹 할 말이 있지 않느냐?”

현철의 눈썹에 묘하게 힘이 들어갔다.

현철은 후임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다니엘에 대해 많은 관찰을 했기에.

그의 말투나 눈빛에서 얼핏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매일 연락을 할 정도로 현철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던 다니엘이지만, 만나자고 청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매번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던 다니엘이었다.

그런 다니엘이 식사 자리까지 마련한 것은 단순히 식사를 위해서는 아닐 터.

대한을 이끌어간 단장으로서 직감이 무언가 더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현철의 예상이 적중했다는 듯, 다니엘이 사뭇 놀란 듯 움찔거렸다.

이내 옅은 한숨을 쉬는 다니엘.

그의 손이 잘게 떨리며 술잔에 파문을 그렸다.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제야 다니엘은 숨겨뒀던 이야기들을 모두 내놓았다.

배신감이 느껴진다고.

다니엘이 이안의 <염라>를 바탕으로 헌정곡을 만들었던 것은 단순히 현철의 곡이라서가 아니었다.

<염라>가 정확히 교향곡의 형태를 지닌 전형적인 클래식 곡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로도 수많은 자작곡을 만들면서 정통 클래식의 행보를 이어가는 이안에 대해 같은 음악인으로서 뿌듯했었다고.

심지어 베토벤의 곡까지 고전의 향취를 지키며 복원한 것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덧붙였다.

분명 그랬던 이안이거늘.

처음 오케스트라 창단에 기대를 가지고 있었더니, 점차 들려오는 소식은 클래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이었다고 평했다.

게다가.

“선생님께서는 왜 아무 말을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때론 자신이 편견을 가진 것 아닌가 생각했다.

본래 오케스트라에 정해진 악기 규범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규범이 없다고 해서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는 기본 체계를 갖춘 상태에서 파생시키는 정도라면 정통 클래식을 지켰다고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이안의 오케스트라 구성은 4할이 국악기인데다, 2할은 오케스트라에서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 악기를 활용하고 있었다.

클래식 양악기가 사용되는 것은 고작 4할. 정통 클래식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식에도 다니엘이 연락하지 않은 이유는 이안의 옆에 한국 클래식의 선구자, 현철이 있기 때문이었다.

염라라고 불리던 현철이니까.

정통 클래식 관현악단을 이끌었던 현철이라면 신선함과 정통 사이의 간극을 맞춰 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철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의아할 정도라고 표현했다.

이글거리는 다니엘의 눈빛에는 그동안 존경했던 마에스트로에 대한 아쉬움과 분노가 가득 맺혀있었다.

하지만, 현철의 입장은 완고했다.

“나는 더 이상 마에스트로가 아니라 매니저다.”

자신이 관리하는 사람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것이 현철이 생각하는 매니저의 주업무였다.

그와 동시에 현철은 이안이라는 천재를 자신의 잣대를 대어 규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손대지 않았음에도 월등한 성과를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독자적인 행보를 걷는 데도 모든 것을 성공으로 이끄는 천재.

현철은 그저 이안이 가는 길이 편해질 수 있도록 버팀목을 건넬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현철의 모습에 다니엘은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혼란스럽습니다. 그리도 정통을 지키시던 분이…”

말끝을 흐리는 다니엘의 눈길에 분노가 어렸다.

마치 이안이라는 인물이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을 망쳤다는 듯.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좀처럼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분노가 가득하다. 이안이랑 대결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낮고 엄숙한 목소리.

현철의 말은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이것은 경고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의 분노를 내비치지 말라는 의미.

하지만, 현철의 말에 도리어 다니엘은 더욱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기회만 있다면 할 것입니다.”

떨림 없는 곧은 눈빛에 현철도 사뭇 진지해졌다.

단순히 치기 어린 질투나 개인에 대한 원망이 아니었다.

음악에 대한 진심이 느껴지는 태도에 현철이 묘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한 명의 투사처럼 지냈던 현철처럼.

다니엘 또한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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